현 시점에서 오바마의 등장은 세계체제의 구조적 변동 국면과 그 속에서 재점검되어야 할 미국의 역할과 깊은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바야흐로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인지, 아니면 이미 쇠퇴해 버린 미국의 위상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인지, 혹은 재도약과 부활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의 과제가 오바마 행정부에게 주어져 있다. 오바마의 미국이 세계금융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세계적 위상과 역할 또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의연하게 지켜보는 게 '전략'이라는 MB
취임식 후 내년 상반기를 지나면서 오바마 외교정책의 전반적 구상이 윤곽을 드러나겠지만, 새 행정부 외교정책의 목표 중 몇 가지는 이전 시기부터 전수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과제들일 것이며, 또 다른 의제들은 변화의 역동성 속에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테러 및 대량살상무기를 미국의 안보 및 세계질서 유지에 가장 큰 위협요소로 간주하는 인식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에서는 부시 행정부와 차이를 보일 것이다. 유세 과정에서 줄곧 강조해 왔던 공세적 외교, 다자적 협력을 통한 해법 강구 등이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방식과 큰 대조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중심의, 그리고 군사적 수단을 통한 해법이 부시 행정부의 소위 '제국적' 외교방식이었다면,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다자주의적 국제 협조를 통한 해법을 강구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 내 일각에서는 오바마 행정부가 국내 경제문제, 이라크 철병, 이란 핵문제,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에 우선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는 정책적 우선순위가 밀릴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그런 배경에서 지금의 대북정책 기조, 이른바 '의연하게 북한태도 지켜보기'의 전략 구도를 - 무정책·무대응은 결코 전략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은 차치하고라도 - 좀 더 지속시킬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아울러 설사 오바마의 미국이 북한과 직접 양자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소위 통미봉남(通美封南)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 시카고 정권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의 오바마 당선자 ⓒ로이터=뉴시스 |
'한국의 노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오바마
그러나 너무 느긋해 할 국면이 아닌 것 같아 우려스럽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1963년 연설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얘기하면 이렇다. "지금은 열기를 식히는 사치스러움을 견지하거나 점진주의라는 진정제를 복용할 때가 아니다." (This is no time to engage in the luxury of cooling off or to take tranquilizing drug of gradualism.)
오바마 당선자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강한 톤으로 비판해 왔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부시 행정부 초기 6년간 대북 강경책, 또는 대화의 부재가 북한 핵보유를 낳았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논점이다.
그런 배경에서 북한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극적 외교를 주장해 왔다. 필요하다면 김정일과 대화하겠다는 표현도 그런 맥락에서다.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 핵보유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은 명백하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대북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 기조로 되돌아가 적극적으로 해법을 강구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듯하다. 더 나아가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냉전체제의 종식을 정치적으로 매력적인 성과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오바마의 또 다른 부시 비판은 "미국(부시 행정부)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한국의 노력을 과소평가 해왔다"는 논점이다. 오바마 당선자가 2007년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지 기고문에서 했던 말이다.
북한을 두고 한미간 인식차가 커서 한미관계에 심각한 조종(弔鐘)이 울렸다고 한국 일부 언론에서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그 시기에 오바마가 한반도를 바라봤던 시각이다. 요컨대 오바마가 바라보는 한반도 문제는 한미동맹관계의 유지와 발전, 적극적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해결, 그 과정에서 선순환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남북관계의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북한 길들이기, 자충수로 돌아올 것
미국의 새 행정부가 이런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에 접근한다면 한미관계를 중시하는 현 정부에서 과연 어떤 정책을 구상, 또는 재구상을 해야 할까?
북한도 몇 번의 입질을 해 본 다음, 미국과의 대화에 적극 응할 것이다. 북한으로서도 호기를 놓쳤던 9년 전의 과오를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체제 보전을 위한 마지막 탈출구임을 알고 있는 북한으로서, 그래서 미국에 대해 도에 지나칠 만큼 어깃장을 놓아왔던 스토커(stalker) 국가임을 고려할 때 핵카드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이다.
▲ CNN과 인터뷰중인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
이 과정에서 북한은 한국 정부의 대북 무정책, 또는 적대정책의 상황을 오히려 한국 길들이기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이 북한 길들이기의 조율시간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나, 앞으로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구도가 근본적 변화 없이 지속된다면 북한의 통미봉남 전략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과정에서 한미 간에도 불필요한 엇박자가 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측 의사나 요구사안을 미국을 통해 북한에게 전달하거나 북한의 의도를 미국을 통해 들을 수밖에 없는 구도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김영삼 대통령 시기의 한국-북한-미국간의 삼각구도가 재현될까봐 많은 사람들이 우려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아무리 외교가 대화를 통한 이해관계의 조정이라지만 북한 길들이기의 신념 때문에 한미관계 또한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더욱이 한국이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올해를 지나면서 대북정책의 전환 카드를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북한의 태도는 팔짱 끼고 '느긋하고 의연하게' 기다린다고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관여정책(engagement)은 접촉을 통해 상대방 행동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일이다. 의연함이 지나쳐 무신경으로 고착되거나 우리조차 의연함의 자폐구조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진정 실용을 생각한다면 정서나 신념보다는 비용을 고려하면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옳을 일이다. 실용 정신의 유연함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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