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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거장 보르헤스와 페론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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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거장 보르헤스와 페론의 악연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338〉 라틴 문학의 산실 '오깜뽀 별장' 탐방기

20세기 세계문학을 논할 때는 문호로 추앙을 받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천재작가 아돌포 까사레스, 라틴문학의 '대모' 빅또리아 오깜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던 이들의 회합장소이자 호르헤 보르헤스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비쟈 오깜뽀 별장이 뒤늦게 일반에 공개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산 이시드로 지역에 위치한 이 별장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고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오깜뽀 박물관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기자는 최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정부의 공식행사장에서 니콜라스 엘프트 오깜뽀 박물관장을 소개받았고 그와 보르헤스의 문학세계를 논하다 뜻밖에 "우리 박물관에서 점심이나 한 끼 하자"는 초청을 받았다.
▲ 라틴문학의 산실이었던 오깜뽀 별장 전경 ⓒ김영길

지난 13일 정오 ACE(아르헨티나 외신기사협회) 집행부 임원들과 오깜뽀 박물관을 찾은 기자는 중세 유럽의 고성을 방불케 하는 건물의 규모에 놀랐고, 아름드리 수목들이 어우러진 널찍한 정원과 한 폭의 서양화를 보는듯한 빼어난 주변경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00년대 말 건축된 이 호화스러운 별장은 거부이자 건축가였던 오깜뽀 가문의 상징이었고 아르헨티나 부르주아 계급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이 별장의 주인이 되어 아르헨티나 문인들의 대모 역할을 했던 빅또리아 오깜뽀(1890~1979)는 소녀 시절을 파리와 런던에서 보냈고 소르본 대학 졸업 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유력 일간지 <라나시온>에 인류의 불평등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라나시온>을 통해 아르헨티나 문학계에 이름을 알린 빅또리아는 이후 보르헤스와 까사레스 등 유명 문인들과 교류를 트고 지성인들을 위한 문학잡지 수르(SUR)를 창간해 이들을 집필진으로 끌어들였다.

이때부터 오깜뽀 별장은 아르헨티나 문인들뿐만 아니라 유럽문학을 이끈 호세 오르떼가 가세트,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 등의 회합장소가 됐다. 따라서 당시 세계문학계에서 무명이었던 보르헤스가 유명세를 탄 건 바로 이 별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이 별장에 모인 문인들이 유럽 귀족풍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호화생활이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깜뽀 별장의 서재에 진열된 세계각지에서 수집된 희귀한 고서들과 신간서적들은 이들 문인들에게는 보물창고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자기들만의 새로운 세계에 빠져든 이들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주위환경 변화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밤낮없이 유럽문학을 평가하고 남미문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곤 했지만 아르헨티나 정치상황 변화와 페론주의 확산을 업신여기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지방도시 산후안의 대지진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수십만에 달하는 이재민들이 거리로 내몰린 국가 비상 상황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민 모두는 이재민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과 자원봉사에 앞을 다투어 참여하는 그런 때였다.

하지만 오깜뽀 별장의 문인들은 이런 사회적인 요구를 외면했다. 당연히 주위에선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젊은 페론당원들은 "귀족이면 귀족답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페론당과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오랜 외국생활로 아르헨티나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빅또리아는 페론당의 모금운동 등을 사유재산권 침해와 사생활간섭으로 판단, 반민주세력으로 평가했고 페론의 정책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기도 했다.

한 마디로 사회 분위기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산후안 지진 이후 발족한 에바 페론재단은 가진자들에게 부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호소했고 아르헨티나 국민이면 누구나가 이 운동 참여를 당연시했던 여론을 무시한 것이다.
▲ 빅또리아 오깜뽀. ⓒ오깜뽀 박물관

1946년 페론이 여성들의 참정권을 추진하자 빅또리아 오깜뽀는 "비민주적인 정부가 여성들의 참정권을 유도하려는 것은 모순"이라는 논평을 발표 페론을 격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호르헤 보르헤스 역시 자신의 열렬한 후원자인 빅또리아와 호흡을 함께하며 반(反)페론 기치를 높이 들게 된다. 반페론주의 운동에 앞장을 선 것이다. 보르헤스는 페론주의 운동이 공산주의세력들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페론당원들은 오깜뽀 별장에서 호의호식하는 귀족형 문인들 모두는 서민들의 애로사항을 외면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라며 모든 공직박탈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호르헤 보르헤스가 공직을 떠나게 된 배경이다.

페론당원들은 이 별장을 과두정치를 위한 반체제 인사들의 집합장소로 낙인을 찍혔고 사법기관은 이곳을 출입하는 인사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1953년 정치범으로 몰린 빅또리아는 20여 일간의 감옥생활을 끝으로 아르헨티나를 떠나 프랑스 등 해외 생활을 보내게 된다. 빅또리아 체포 이후 이 별장을 드나들던 문인들도 뿔뿔이 헤어져 피신을 하거나 해외망명을 떠났다.

1968년 파리 생활을 청산한 빅또리아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지만 별장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평소 자신을 여왕처럼 떠받들던 하인들과 요리사들이 세상이 바뀌었다며 하나 둘씩 떠나가고 페론의 재집권이 사실로 굳혀져 가고 있었다.

별장유지와 관리를 고심하던 빅또리아는 1973년 자신의 별장을 유네스코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이 유적이 세계 문화 발전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이렇게 해서 박물관으로 변신한 부의 상징 오깜뽀 별장이 오늘날 페론당 정부와 기업들, 일반시민들의 후원금에 의해 운영이 되고 있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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