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 곤지 왕자, 王의 부인을 아내로
이제부터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한일 고대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인 곤지왕에 대해 알아봅시다. 곤지왕자(한국 호칭) 또는 곤지왕(일본 호칭)은 반도(한국)와 열도(일본)에 걸쳐서 큰 족적을 남긴 분입니다. 이 분의 행적을 제대로 알면 한일고대사 문제는 절반을 해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곤지왕과 관련해서 『일본서기』「유라쿠 천황 5년」을 보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제의 가수리왕(加須利君 : 개로왕)은 동생인 곤지에게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라고 말했다. 곤지가 대답하여 '임금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원하건데 임금님의 부인을 내려 주시고 난 후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가수리왕은 임신한 부인을 곤지와 결혼을 시킨 다음 '지금 나의 아내는 이미 아기를 낳을 때가 가까워졌다. 만일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아기를 낳게 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 속히 돌려보내라'라고 하였다. 곤지는 일본으로 출발하였고 임신한 부인은 쯔꾸시(筑紫)의 카가라노시마(各羅島 : 加唐島)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래서 그 아기의 이름을 시마키시[도군(島君 : 섬의 임금님)]라고 하였다. 곤지는 배 한 척을 마련하여 이 모자를 백제로 돌려보냈다."
규슈(九州) 운송국 관광자료 재구성 |
이 때 태어난 아기가 백제의 성군으로 잘 알려진 무령왕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가족관계에 대한 기록들이 극히 혼란합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타나고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옵니다. 『삼국사기』에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로 나오기 때문에 결국 무령왕은 곤지왕의 손자가 될 터인데, 『일본서기』에는 곤지왕의 아들(비록 형의 아이이긴 하나 이미 결혼했으므로)로 나오고 있습니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부분입니다. 이렇게 혼란한 원인은 기록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곤지왕과 개로왕의 가족관계도 불확실한데다 왕이 임신한 자기 아내를 동생(또는 아들)에게 하사하는 부분도 의문투성입니다.
그러나 고대 한일관계 전문가인 김현구 교수에 따르면 이 같은 일들이 일본 고대사에서는 흔히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김현구 교수는 일본 최고의 명문 가문의 하나인 후지와라(藤原)씨의 조상인 나까또미노까마따리(中臣鎌足)의 큰 아들 데이(定惠)는 당시의 코토쿠 천황이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인 나까또미노까마따리에게 하사하여 낳은 아들이고, 나까또미노까마따리의 또 다른 아들인 후이또(不比等)도 텐지천황(天智 天皇)의 임신한 부인을 나까또미노까마따리에 하사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파다하다고 합니다.1)
그러면 이 같은 일이 왜 나타날까요?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왕통(王統)과 국체(國體)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합니다.
왕이나 왕의 직계 혈족들은 항상 암살의 위험 속에서 살게됩니다. 그러니까 이 같은 왕실의 행태는 만약 왕통이 끊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왕의 혈족들을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여러 지역에서 키움으로써 왕가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것이라는 말이죠. 즉 이것은 왕의 혈족들을 분산시켜 믿을만한 심복들에게 양육시켜 왕족을 보호함으로써 국체를 보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부여왕계는 항상 위태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이 같은 관습은 매우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개로왕대를 전후로 해서는 천수를 누린 왕이 거의 없다는 점을 기억해둡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야마토에 도착하지 못하고 무령왕이 출생하자 이를 다시 백제로 보낸 것인데, 이것은 왕족의 보호라는 위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군요.
고대사의 일들을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만 재단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특히 고대에 있어서, 근친혼(intermarriage)은 왕족들이 자신의 혈통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혼인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이러한 습속과 관련된 다른 예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대에는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았습니다. 고대의 습속에 여자를 아래 사람에게 하사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전쟁의 노획물로서 여자는 배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예를 들면, 『삼국지(三國志)』에서 인용한 촉기(蜀記)에 "(관우는 유비가 조조군에 합류하여 여포를 궤멸시킨 후) 관우는 조조에게 여포의 부하 중의 하나인 진의록(秦宜祿)을 구해달라고 하고 진의록의 처를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자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는 말이 있습니다.2) 이 대목은 고대에는 여성들이 전쟁의 전리품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엄연히 살아있는 진의록을 두고서도 관우(關羽)는 진의록의 아내를 전리품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이 행위에 대하여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에도 비록 전리품이라고는 해도 다른 이의 아내를 상당히 존중한 사례들도 많이 나타납니다.
유목민(특히 쥬신 : 흉노, 부여, 고구려, 선비 등) 들의 경우를 보면 여성들의 지위는 한편으로는 낮은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높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여자들이 귀하기 때문에 약탈혼(掠奪婚 : marriage by capture)이 성행하여 결혼의 과정에서 여자가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목민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요한 전략적인 참모로서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납니다.
흉노의 경우, 아버지가 죽은 뒤 그 아들이 자기를 낳아준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재산과 첩들을 모두 소유하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모두루[또는 모돈(冒頓)] 대단군[텡그리고두 : 선우]입니다.3) 모두루 대단군(텡그리고두 : 천자)은 자기를 제거하려는 아버지인 투만(Tumen : 頭曼 - 주몽 또는 샤먼과 유사한 의미)을 죽이고 대단군에 올라 대정복 국가를 세워 한(漢)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唐)나라 현종은 자기의 며느리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녀가 유명한 양귀비(楊貴妃)였습니다. 당나라도 흉노(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이 같은 행태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유목민으로서의 쥬신적인 특성의 하나였다는 점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목민 사회는 여자가 귀하기 때문에 농경민의 사고방식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우연히 일본의 무사들의 무용담들을 그린 야사집(野史集)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책들을 보면서 두 가지에 매우 놀랐습니다. 하나는 너무 야한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내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한 여인이 그 남편이 전쟁을 나간 사이에, 시아버지가 자기를 추근대며 못살게 굴어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정조(情操)를 지켜나가다가, 남편이 돌아오자 이 같은 사정을 이야기하여 그 남편이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는 그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주부들의 잡지에 시아버지와 관련한 상담들도 있어서 놀랐습니다.
또 어떤 책들을 보니 유목민들은 멀리서 손님이 오면 아내와 동침시키는 일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자가 귀한 유목민들에게 생물학적으로 근친상간(近親相姦 : incest)의 문제가 많이 발생할 수가 있기 때문에 먼 곳에서 이방인이 오면 새로운 건강한 종(種)을 얻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이렇게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쥬신사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 Levirate)에 대해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지』「여포전」을 보면, 여포(呂布)가 유비(劉備)를 자기 아내의 침대에 앉혀 아내에게 유비에게 술잔을 따르게 하고 동생으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접은 유목민들에게는 최대의 대접이었고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야만적인 행위 중의 하나입니다(형수가 시동생을 자기 침대에 앉히고 술잔을 따르다니요?). 대개 침실이라는 것은 성적(性的)인 공간을 의미하고 있으며 술잔을 따르는 것은 다른 형태의 성적 교합(性的 交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포가 하는 행동은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같이 데리고 사는 형사취수혼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삼국사기』에도 고국천왕의 비였던 우씨(于氏)는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서거 후, 그 동생인 산상왕(山上王)과도 결혼하여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목민들에게 나타나는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족(漢族)이 가장 큰 악행과 패륜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형사취수혼입니다. 그러니까 한족의 사가들이 쓴 사서에는 고구려가 야만의 인종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농경민과 같은 정주민의 시각에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형수와 같이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유목민들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형수와 같이 산다고 해서 누가 나무랄 사람도 주변에는 없겠지요. 더구나 '없는 살림'에 만약 형이 죽어서 형수가 형의 재산을 가지고 다른 지역으로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목민이 가진 재산은 주로 가축인데 이것을 따로 나눠 가지는 것은 가는 사람이나 남아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어려운 상황이 오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형사취수혼과 같은 습속은 보다 경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형이 죽어서 그 형수와 가족들이 분가(分家)해 가버린다면 노동력의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재산도 분할되어 모두 다 생존이 어려운 상태가 될 수도 있죠. 또 그만큼의 방목지도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농경민이 보기에는 넓은 초원이 무한대로 펼쳐진 것으로 보이지만, 유목민들에게 초원은 무한의 대지는 아닙니다. 다 나름대로 경계가 있습니다. 한 가구당 일정한 유목지를 가지고서 일정한 간격으로 전체적으로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것이 유목민들의 생활입니다.
도덕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수치심이나 도덕성도 문화와 환경의 산물입니다. 날씨가 더운 적도 지방에서 의복(衣服)을 기반으로 한 지나친 예절을 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유목민들은 각자 서로 떨어져 살고 있으니 형수와 같이 산다고 해도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습속들은 농경사회로 전환되어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반도쥬신(한국인)들은 형이 죽으면 그 형의 가족을 동생이 돌보는 경우도 흔히 있으며, 형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입양해서 키우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신라시대에 화랑들이나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의해 성행한 마복자(摩腹子) 풍습입니다. 마복자란 글자 그대로는 '배를 문지른 아이' 인데, 지위가 낮은 남자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상관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을 말합니다. 이 내용은 최근에 발견되어 화제가 된 필사본『화랑세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라 남자들이 부하나 후배의 임신한 아내들과 성관계를 즐긴 풍속으로 이해가 되는군요. 이미 자기의 아이를 임신했으므로 시앗은 바뀔 리가 없으니 자기의 상관에게 아내를 상납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기는 아버지가 여러 명이 될 수도 있겠군요. 아무래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그 어머니와 성관계를 했던 사람들이 자기 자식처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이용하는 경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과거 유럽의 군주들도 흔히 신하의 아내들을 자기의 애인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마복자 습속은 여자들이 귀한 유목민들의 습속입니다. 여자가 흔하면 이 같은 습속이 나올 리가 없죠. 유목민들은 농경민처럼 안정적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잦은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또 여자는 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습속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죽은 상관의 부탁으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가 그 상관의 아내와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을 봅니다. 처음 이런 얘기를 듣고나니 참으로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성(性)이라는 문제를 떠나서 차원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행위는 사랑하는 아내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배려일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신의 씨[種]가 가장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맡기는 것이죠.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자기의 동생이 되었으니 그것이 형사취수혼이었던 것이죠. 어쨌든 이 같은 행태가 오랫동안 전승되어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쥬신의 고대 습속은 일본에서 더 많이 살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개로왕 - 곤지왕의 관계는 이런 식의 논리만으로도 해명이 잘 안됩니다. 다시 여러 가지 사료를 이용하여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필자 주
(1)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17쪽.
(2) "布使秦宜祿行求救, 乞娶其妻, 公許之"(『三國志』「蜀書」, 關羽傳 )
(3) 텡그리고두를 한족들은 선우(單于)라는 말로 번역하여 사용하는데 이 말은 단군 또는 단간(單干)을 오독(誤讀)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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