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적 규모의 경제충격은 예외없이 국가간 권력 이동과 재편을 가져오고, 또 이것이 반영된 새로운 경제질서가 마련된다. 그리고 이 질서는 단순히 국가(국민경제)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제사회가 바람직한가를 둘러싼 규범과 제도의 표준을 제정하는 차원을 담고 있다.
과거 50년을 보더라도 1970년대 두차례의 오일쇼크가 가져다준 지구적 규모의 경제위기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던 미국의 상대적 퇴조와 함께 일본과 독일이란 두 승자를 등장시켰다. 세계 경제질서 역시 시장 중심의 미국형 자본주의에 대해 시장과 사회적 가치의 조화를 꾀하는 일본형과 독일형 자본주의가 또다른 표준으로 경합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후 1990년대말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휩쓸고 러시아, 브라질 등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소방수로 등장하여 위기를 진화하고 글로벌 리더십을 단단히 되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미국은 이른바 '워싱턴 컨쎈서스'라는 신자유주의 모델을 단일 세계표준으로 확산시켰고, 패자로 전락한 일본과 동아시아 신흥시장, 나아가 독일 등은 새로운 표준에 스스로를 맞추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위기 후 승자와 패자
아시아 금융위기로부터 10년 뒤인 오늘날 미국의 금융위기는 이제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 끝에 등장할 권력질서는 어떠할 것이며 이를 반영하는 경제질서는 어떤 모습일까? 미국의 리더십과 그간 패권적 지위를 점해온 신자유주의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어떤 대안이 가능한가?
현재의 위기국면에서 볼 때 미국의 후퇴는 당연해 보인다. 리먼브러더스, AIG, 메릴린치가 줄지어 무너지면서 월스트리트는 단기적으로 파탄상태이다. 금융산업이 미국 GDP에서 20%란 비중을 차지하는만큼, 또한 산업의 혈맥인 금융이 막히면서 메인스트리트(실물경제)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든만큼, 세계 경제질서를 조정, 관리하는 데에서 미국의 위상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되자, 마치 10년 전 동아시아국가들이 절감했던 것처럼 세계 각국은 자국경제가 국경을 넘어 얼마나 넓고 깊게 네트워크화되어 다른 나라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상호의존의 네트워크 속에서 국가간의 민감도와 취약도는 불균형해지고 특히 덩치 큰 국가보다 작은 국가가 더 변화에 민감하고 취약해졌다. 그런 까닭에 EU를 비롯한 주요국들은 덩치 큰, 실패하기엔 너무 큰 미국경제 구하기에 유례없는 국제공조를 연출하는 모양새이다. 한편 오일 머니를 무기로 미국 패권에 도전해온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등은 오히려 원유가의 급격한 하락으로 스스로를 추스르기에도 바쁜 형국이 되어버렸다.
미국의 장래는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질서를 주도하는 데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분명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미국을 대체할 세력의 부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목 대상인 중국은 확산되는 금융위기로부터 비교적 영향을 덜 받은 가운데, 분명 1조 9천억달러를 상회하는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고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매력공세(charm offensive)를 펼칠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 소득수준으로는 여전히 개도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미국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중국이 가까운 장래에 이른바 '뻬이징 컨쎈서스'로 '워싱턴 컨쎈서스'를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목도할 세상은 '리더십의 교체'라기보다는 '리더십의 변화'이다. 오바마의 미국이 어떠한 자본주의를 지향해나갈 것인가, 국제적으로 어떠한 리더십을 보일 것인가가 관건이다.
미국은 여전히 신자유주의 체제로 남을 것이다. 당장 정부가 금융기관을 국유화하고 부실채권 처리기구를 설립하고 심지어 일부 민간기업에도 자금을 투입하고 있지만, 이를 신자유주의의 전면적 수정이라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위기시 정부개입이 반드시 위기 후까지 지속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환란 때 한국은 정부의 강력한 개입하에 위기를 극복했지만 이후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어온 바 있다.) 금융부문에서 미국은 지구 수준에서의 규제기구 강화에 미온적일 것이며, 국내규제 역시 민간의 활력을 저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설정하는 조심성을 보일 것이다. 실물경제 부문에서 오바마는 복지(건강보험)와 교육에 더 많이 투자할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클린턴을 연상시키는 '공정무역 투쟁'(fight for fair trade)을 벌여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이 작은 정부와 자유무역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기 후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부분적 수정 정도로 갈 것이다. 다만 향후 미국은 신자유주의적 표준을 강제할 능력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세계는 좀더 다양한 자본주의를 모색할 공간을 부여받을 것이다. 즉, 미국형 신자유주의와 함께 또다른 자본주의가 복수의 표준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위기 이후 일본 자본주의의 복합모델
여기서 주목할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 역시 세계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월스트리트 파탄 전에 1만 2천엔대였던 닛께이 평균주가가 9천엔대로 추락했고, 토요따, 소니 등 간판기업들이 해외시장 침체로 실적을 하향조정하고 있으며, 주가하락으로 금융기관은 경영에 압박을 받고 있다. 비록 금융기관들이 상대적으로 써브프라임 위기에 덜 연루되어 있긴 하지만, 이는 그들의 혜안이라기보다 장기불황의 터널을 나오면서 보수적으로 경영한 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엔화는 1달러당 90엔대로 가파르게 평가절상되면서 국제자금의 피난처가 되고 있고, 그 기저에는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서 견실한 제조업부문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 특히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매년 40조엔 상당의 신규 부실채권을 양산하고 국가 재정적자는 위험 수준에 육박하는 침체를 겪으며, 국운 추락을 맛보아야 했다. 한때 경제기적의 열쇠로 찬사를 받아온 일본형 자본주의는 위기의 주범으로 비판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추락의 십년은 다른 한편으로 실험의 시기였다. 일본의 주요 기업과 이해당사자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양한 제도적 실험을 추진해왔다.
본래 일본자본주의는 주주뿐만 아니라 종업원, 하청기업, 채권은행, 정부 등 이해당사자의 이해를 함께 반영하는 관계지향적 기업지배구조의 전형이었다. 이는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미국의 시장지향적 자본주의와 대조된다. 그런데 1997년 이래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이 자본주의는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낙인찍혔고, 미국식 세계표준으로 수렴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러한 수렴 압력 속에서 일본은 사회적 관계와 시장적 효율을 복합화(hybridization)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예컨대 토요따, 캐논 등 주요 대기업들은 장기고용, 내부자 중심 이사회라는 기존의 관계지향적 제도요소들과 직접금융 같은 시장지향적 제도요소를 결합하여 새로운 지배구조모델을 등장시켰고, 유통부문과 벤처부문 기업들은 반대로 은행 중심의 전통적 간접금융제도와 시장지향적 고용과 이사회제도를 결합하여 또다른 복합모델을 내놓았다. 일본이 장기불황 이후 회복과 성장을 지속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두가지 제도실험이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성과를 내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데에서 일본의 사례는 몇가지 측면에서 시사적이다. 첫째,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대 조정시장경제 혹은 미국식 대 일본/독일식이란 이항대립적 사고의 극복이다. 일본이 운영하는 제도는 어느 한쪽이 아닌 양자의 복합모델이다. 둘째, 복합화는 서로 다른 제도의 다양한 조합을 의미하므로 '다양성'이란 가치가 존중되는 것이다. 일본에는 복수의 복합모델이 존재하며, 이런 점에서 국가경제가 반드시 하나의 모델을 가질 필요는 없다. 끝으로, 신자유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과거 모델로의 회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도변화는 경로의존적이기 때문에, 기존의 일정한 미국화(혹은 신자유주의 제도화)를 전면 배격하는 작업은 대단히 커다란 조정비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기존의 변화를 인정하면서 그 위에 좀더 창의적인 실험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도전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최강국 지위를 유지하는 한 세계표준은 결코 하나의 또다른 자본주의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이후'가 공존하는, 즉 복수의 표준이 공존하는 세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표준 제정력이 약화되는 환경에서 일본, 중국, EU 등 주요국들은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삶의 조건에 맞는 복합모델을 찾아내는 동시에, 자신의 것을 세계표준으로 만들려는 치열한 경쟁에 돌입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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