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다음의 글을 봅시다.
"황후는 와니노쯔(和珥津)를 출발하였다. 바람의 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이 파도를 일으켜 범선은 파도를 따라 신라로 갔다. 신라왕은 두려워서 싸울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수습하여 '내가 듣기로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있어 천황이라고 한다. 필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내가 감히 군대를 일으켜 그에 대항할 수 있겠나?'라고 하더니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러면서 황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경주의 아리수가 역류하고 냇가의 자갈이 하늘의 별이 되지 않는 한 춘추로 조공을 거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군세를 엿보더니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황후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오늘 이후부터 우리 스스로 제후국으로 생각하고 조공을 바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직할지인 미야게(內官家屯倉)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삼한(三韓)이다."
위의 글은 『일본서기』에 나타난 일본의 한반도 정벌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황후는 바로 진구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입니다. 진구황후는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의 인물이자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 합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한반도 정벌 설화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초중고 교과서에도 널리 실려있어 대부분의 열도쥬신(일본인)들이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주요한 내용입니다.
진구황후가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기 위해 아래의 그림을 보시죠.
이 화폐는 1881년 일본정부가 발행한 지폐로 지폐 가운데서는 일본 최초로 사람의 모습이 들어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성이 들어가 있군요. 바로 이 사람이 진구황후입니다. 그 만큼 중요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일본에서는 개국 시조 여신에 해당하는 분입니다. 비유하자면 『몽골비사』의 알랑고아나 고주몽의 어머님이신 민족시조모 유화부인에 해당합니다.
진구 황후는 제14대 쥬아이(仲哀) 천황의 비(妃)이고 제15대 오우진(應神)천황의 어머니입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진구황후는 천황이 아니면서도 이상하게 천황과 동일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진구황후는 해산달에 아이를 밴 여자의 몸으로 돌을 집어 허리에 차고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하면서 한반도를 정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분이 바로 근초고왕(346~375)이라면 어떻겠습니까?
(1) 진구황후, 고구려·신라를 정벌하다
열도(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입니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열도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열도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열도에서 창조된 인물입니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이 같은 내용은 천관우 교수가 가야사를 검토하면서 특히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근거가 되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백제의 역사가 일본 야마토 왕조의 역사로 개변된 것이라고 지적한 점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1)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토(大和) 왕국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인정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록은 오직 『일본서기』뿐인데 이 기록들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반도쥬신의 사학계에서 말하듯이 완전한 허구(虛構)라고 말하기엔 매우 정교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 사건·사고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있는 사건들을 당시 일본의 사정과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 서술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지요.
4세기에 대두한 야마토 왕조의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노우에 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합니다.2) 그런데 오우진 천황의 어머니가 앞에서 본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정벌한 진구황후라는 것이죠. 이제 이 부분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일본서기』진구황후 9년조에는 신라가 항복하였고 고구려 백제왕도 와서 진구황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부터는 영원히 서번(西蕃)을 칭하여 조공을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백제 명장 모쿠라곤시[목라근자(木羅斤資)]와 일본에서 온 장군 아라다와께(荒田別) 등을 보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이에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땅들을 백제왕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진구황후 9년에 이미 정복하여 복속한 신라를 49년에 왜 다시 또 정벌하는지 알 수 없군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군요. 4세기경 진구황후가 일본의 장수들을 보내어 한반도 중남부를 정벌하여 당시 백제왕인 근초고왕에게 주자 백제왕은 "영원무궁토록 일본에 조공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는 기록을 다시 봅시다. 무엇보다도 기록에도 없는 열도의 나라에서 그 많은 군대를 보내어 신라와 가야를 정벌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렵게 이긴 전쟁의 결과물을 고스란히 남의 나라(백제)에 조건없이 넘겨 주는 것도 이상합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해산달에 아이를 밴 여자의 몸으로 아이가 나오지 않게 돌을 집어 허리에 차기까지 하면서 정벌군을 이끈 사건만큼이나 이해가 안되는군요.
이 당시만 해도 역사의 기록체제가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지』에도 한반도의 시시콜콜한 나라들이 수십개나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군대를 보낸 나라에 대한 어떤 기록도 다른 사서에는 없습니다.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왜왕(倭王)으로 기록된 히미코(卑彌呼)가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진구황후편에는 히미코가 등장합니다.
즉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읽는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역사상 실존인물인 히미코를 「진구황후편」에다 끌어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진구황후가 히미코라는 말이 되지요.
『일본서기』진구황후 40년에 "『위지(魏志)』에는 정시(正始) 원년(240) 조서(詔書)와 인수(印綬)를 가지고 왜국에 가게 했다."고 하고 진구황후 43년에 "정시 4년(243) 왜왕이 다시 사자 8인을 보내어 헌상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지』「제왕기(齊帝紀)」에는 "정시 4년(243년) 겨울 왜왕 히미코가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있고 이 내용이 다시 『삼국지』「동이전」왜국 부분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구황후는 마땅히 히미코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참고로 이 시기 반도부여는 고이왕대(234~286)에 해당됩니다.
분명한 것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창조한 진구황후에 대해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히미코의 모습을 투영해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히미코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달리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후한서(後漢書)』를 보면, "한나라 환제와 영제 연간(132~189)에 왜국(倭國)에 대란이 일어나 다시 서로 싸워서 주인도 없게 되었다. 히미코(卑彌呼)라는 한 사람의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귀신도(鬼神道)를 숭상하고 요술로 능히 대중을 현혹할 수 있었다. 그래서 히미코는 왕이 되었는데 시비는 1천 명이요. 음식을 시중드는 남자 1인이 있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히미코 여왕의 나라로부터 동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구로국(拘奴國)에 이르는데 이들은 모두 왜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히미코 여왕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히미코 여왕은 일종의 샤먼(巫女)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열도(일본)에서는 이 히미코와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들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아마테라스는 열도(일본)의 신들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는 신으로 다카마노하라(高天原)의 지배자이며 유명한 이세신궁에 모셔져 있습니다. 열도에서는 아마테라스가 처음에는 오히루메노무치(大日靈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 靈를 분해해보면 무녀(巫女)가 되어 결국 오히루메노무치가 오히미코(大日巫女)가 됩니다. 즉 아마테라스는 태양신이고 히미코는 그 태양신을 제사지내는 무녀입니다. 태양신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존재가 히미코지요. 그래서 이 히미코가 바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이 같은 생각은 일본에 널리 퍼져있습니다.3)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테라스 = 히미코 = 진구황후'의 공식이 성립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테라스는 앞에서 보신 대로 가야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이런 식으로 조작을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 히미코나 아마테라스가 사실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국모(國母)와 같은 이미지로 열도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에 덧칠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일 고대어 전문가에 따르면, 히미코는 '히(해의 한국 고대어) + 미코(님 또는 무녀) = 해님이(해의 무녀)'로 분석되고 야마토는 '야마(한국 고대어로 '하늘', '산', 또는 '신성한 마을') + 토(터 또는 밑)'가 되어 '해 뜨는 하늘 밑 마을' 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합니다. 특히 야마토(日本)라는 말은 고령 지역의 우가야(上伽倻)의 다른 이름인 미오야마(彌烏邪馬 : 신성한 하늘 마을이라는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에 가면 가야 김수로(金首露)왕의 일곱 왕자가 일본으로 와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일본에서는 니니기노미코토('일곱 임금님의 것' 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4) 초기 일본 건국은 가야계(伽倻系)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열도(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는 히미코의 야마타이국을 야마토(大和)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도시대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 1730~1801)는 규슈(九州)의 여자 추장이 위나라에 조공하면서 "우리가 왜국을 대표하는 야마토"라고 참칭(僭稱 : 거짓으로 칭함)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도시대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5)
이 부분을 좀더 살펴봅시다.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견해는 전체적으로 옳은 지적이지만 그 실상은 다릅니다. 히미코가 일본열도 전체를 대표할 수 없으면서도 마치 대표자인 양 했다는 지적인데 히미코는 단지 열도내에서 비교적 체제를 갖추고 있던 자신의 나라를 대표했을 뿐이고 당시에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천황의) 대국 야마토 왕조는 없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칭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단지 후일 부여계가 선주민들(즉 먼저 정착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명칭들을 그대로 이어간 것으로 봐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야마토 왕조의 주체는 가야계에서 부여계로 바뀌어 갔는데 그 나라 이름은 그대로 야마토로 사용을 했다는 말입니다. 다만 초기의 야마토라는 말과 후기에 나타나는 야마토라는 말은 의미상으로는 차이가 있죠. 후기에 올수록 야마토는 일본(日本)이라는 의미와 동일하게 쓰이게 된 것이죠.
이 과정은 부여계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소국 백제(伯濟)의 이름을 그대로 준용하여 백제(百濟)를 칭한 과정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즉 가야계의 야마토 또는 야마타이 등의 이전에 있었던 나라이름을 부여계(가야계의 주요 세력들로부터 지원을 받음)가 이 지역을 점령·지배하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히미코의 야마타이국에 대한 위치는 『삼국지』에 매우 소상히 기록되어있지만 그 경로를 따라가봐도 말들이 애매해서 현재로서는 위치나 지역을 비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야마타이국이 규슈(九州)에 있다는 설(토쿄대학)과 기나이(畿內)에 있다는 설(쿄토대학)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어떤 기록에도 히미코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면 진구황후는 히미코와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나아가 진구황후를 그 이름 자체로는 실존인물이라고 볼 근거가 없습니다. 더구나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는 31세에서 100세까지 섭정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진구황후의 시기에는 천황을 세우지도 않고 여자의 몸으로 무려 70여년을 섭정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 황태자(오우진 천황)가 고희의 나이(69세)에 이르러서 즉위하는 볼썽 사나운 일이 벌어집니다. 말이 안되지요.
『일본서기』「진구황후」부분에서 실존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람은 백제의 초고왕(肖古王) 즉 근초고왕입니다. 그런데 근초고왕은 재위기간이 346~375년입니다. 따라서 진구황후는 4세기 중반 이후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일본서기』는 진구황후가 마치 히미코의 시기와 일치하는 듯 묘사합니다만, 진구황후는 히미코가 아니며 히미코의 시대(240년대)와 근초고왕의 시대는 거의 1백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아마도 그래서 진구황후의 나이가 1백세가 된 것 같군요.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진구황후는 4세기 중반의 사람이고 그녀는 고구려, 신라, 가야를 정벌합니다. 그러면 이 진구황후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4세기 중반이후 고구려, 신라, 가야를 정벌한 인물을 찾으면 됩니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인 기록상으로만 보면, 4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경략하고 고구려, 신라, 가야를 정벌한 인물은 근초고왕·근구수왕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근초고왕의 업적이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둔갑해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앞에서 제시한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정벌과정은 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이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일부에서는 이 탁순이 과연 현재의 대구인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기는 합니다. 탁순을 스에마쯔 야스까즈(末松保和)는 대구(Daegu)로 비정했고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창원(경상남도)으로 비정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대구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일본에는 야마토 왕조와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대군(大軍)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를 정벌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항해술도 문제지만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하면 행정체계가 그 만큼 견고히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기록이 남게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서에도 그런 종류의 기록은 없습니다.
당시 일본 열도는 가야계를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건너간 수많은 복잡한 세력들이 공존하는 상태인데 누가 강력한 군대를 한반도로 보내어 정벌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진구황후 부분의 기록은 현재의 한강 - 충청도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반도부여(백제)의 군대가 경주 지역을 공략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창원에서 경주를 공격하기보다는 대구에서 경주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즉 대구는 반도부여(백제)가 신라를 평정하는 집결지가 될 수 있지만, 열도의 왜군이 신라를 정벌하는 집결지가 되기에는 지리적으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라다와께(荒田別) 등이 이끈 신라정벌군의 진군로를 본다면, 이들이 만약 일본열도에서 왔다면 신라 정벌을 하기 전에 먼저 가야지역을 정벌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신라지역은 북서쪽으로는 백제 및 여러 소국들과 남으로는 가야 및 여러 소국들로 둘러싸여 있는 상태인데 비행기를 타고 오듯이 바로 경주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죠.
『일본서기』를 통해 보면 두 가지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제주도 지역을 가리켜 남만(南蠻)이라고 부르고 있고 또 하나는 "군대를 돌려 서쪽으로 강진과 제주도를 공략했다."는 기록입니다. 즉 『일본서기』에는 "남만(南蠻)인 치미다례(忱彌多禮 : 제주도)"라는 표현이 나타난 것으로 봐서 공격 주체가 한반도의 중남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마토 지역에서 제주도를 남만으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야 정벌을 마친 후 군대를 남해안을 따라 서진하여 강진으로 진격했다는 것인데 창원을 중심으로 경산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창원으로 내려와 강진 쪽으로 갔다는 것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공격로를 보면 대구 → 경산 → 창녕 → 합천 → 함안 → 김해 지역을 경략한 후, 남해안을 따라서 전남의 강진쪽으로 침공해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실제적인 군사전략이라는 측면에서도 본다면 일본 열도의 중부지역에서 신라를 공략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대구 - 경주 등에 이르는 지역을 경략하는 거점을 대구 인근 지역으로 할 수 있는 주체 세력은 남부여계 즉 백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 같이 조직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경략했다면 당시에는 실체도 없는 야마토 왕조의 누가 이 일을 주도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남부여계의 역사적 종적과 근초고왕에 대한 기록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반하여 야마토 왕조는 이 때까지도 실체도 없고 기록도 없어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록상으로 본다면, 이 시기 즉 4세기에 고구려와 신라, 가야를 모두 경략한 왕은 근초고왕 이외에는 없지요.
(다음 글은 31일에 게재됩니다.)
필자 주
(1) 천관우 『復元 伽耶史 上中下』(문학과 지성 : 1977-1978)
(2) 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3) 關裕二『古代史(일본의 뿌리는 한국)』(관정교육재단 : 2008) 119쪽.
(4) 부지영『일본, 또 하나의 한국』(한송 : 1997) 73쪽, 105~110쪽.
(5) 關裕二. 앞의 책, 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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