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과정이 이처럼 단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북·미의 험구와 압박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의 해결은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핵문제가 풀릴 리 없는데, '다단계 보상극대화 전략'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북한의 협상 행태를 볼 때 핵폐기가 실로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의 핵심 협상 주체를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6자회담을 통해 단계적 해법이 진행되고 있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다. 크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쪼개서 푸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 이 점에서 북핵 문제의 유일한 해법은 단계적으로 비핵화 목표를 설정해 이행하는 가운데 비핵화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
핵검증 합의와 테러지원국 해제 발표
최근 비핵화라는 과제가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겼다. 지난 11일 미 국무부가 북한과 이룬 검증 합의와 더불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북한은 12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이를 환영한다며 핵시설 불능화를 재개하고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요원들의 임무 수행을 다시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4일부터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이 재개되어 모두 11개 조치 가운데 아직 완료되지 못한 폐연료봉 인출, 연료봉 구동장치 제거, 미사용연료봉 처리 등 3가지 조치가 더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를 두고 일부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검증합의문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북·미간 합의에 따라 검증 활동에는 한·일 등 비핵국을 포함한 6자회담 당사국 전문가들이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신고된 모든 시설에 접근할 수 있고 신고되지 않은 시설에 대해서는 상호 동의를 거쳐야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검증 대상에는 플루토늄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과 더불어 우라늄 농축 및 핵확산 활동 등이 모두 포함되고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시료 채취 등 과학적 절차도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6월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서에는 핵시설 가동과 플루토늄 생산에 관한 사항만 기재되어 있어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한 신고된 시설은 영변 핵시설에 국한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결국 2차 핵위기의 도화선이 된 우라늄 농축 활동에 대한 검증에는 북한의 추가적 동의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미신고 시설 사찰을 둘러싼 논란
이처럼 미신고시설에 대한 검증 부분에서 다소 미흡한 합의가 나왔지만, 그동안의 정황을 볼 때 이번 합의는 현 시점에서 가능한 최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들 기억하듯 지난 6월 26일 북한이 신고서를 제출하고 미국이 이에 대응해 적성국교역법 적용 배제 조치와 더불어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를 밟기 시작하면서 10.3합의에 따른 2단계 조치의 이행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 뒤 핵 신고서에 대한 검증체계 합의를 둘러싸고 북미간 이견이 심화되면서 어려워졌고, 절차상 테러지원국 해제가 가능한 첫날인 8월 11일에 미국 정부가 이를 유보한다고 함으로써 문제는 더욱 꼬여갔다.
북한은 8월 26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에서 미국이 테러지원국 삭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서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즉시 중단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9월 19일에는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핵시설을 원상복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그 달 24일에는 재처리 시설에 설치한 봉인과 감시장비 제거를 완료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의 접근 금지를 요구한 데 이어 1주일 뒤엔 재처리시설에 핵물질을 투입하겠다고 통보했다.
북·미간 논란의 핵심은 검증체계를 둘러싼 것이었다.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9월 22일 기자회견에서 "서류 작업, 인터뷰, 현장 방문 등 3가지 검증 요소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했지만 영변 이외의 시설을 확인하고 방문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면서 영변 이외 시설에 대한 추가 방문 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요구가 '검증의 표준'으로서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결코 부담되는 것이 아니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나 북한은 검증에 '국제적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듭 강조함으로써 입장 충돌이 빚어졌다. 8월 26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은 "미국이 말하는 '국제적 기준'이란 곧 1990년대에 국제원자력기구가 들고 나와 자주권을 침해하려다가 결과적으로 핵무기전파방지조약 탈퇴를 초래하였던 '특별사찰'"이라고 지적하면서 검증 자체를 거부하는 단호한 입장을 담았다. 결국 북한의 재처리시설 재가동 직전인 10월 1~3일에 힐 차관보가 방북하여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합의함으로써 입장 차이는 일단 해소되었다.
제네바 기본합의 보다 후퇴했나?
실제로 군사시설을 포함한 모든 장소에 대한 완전한 접근, 곧 특별사찰에 관한 논란은 1990년대 초에 북핵 문제가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았던 직접적 이유였다. 1992년 북한은 IAEA에 핵 신고서를 제출하면서 미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했으나, '사실 불일치'를 확인한 IAEA가 1993년 2월 특별사찰 실시를 결정하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고 우여곡절 끝에 3차에 걸친 북·미간 협상으로 제네바 기본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제네바 합의에서는 특별사찰 문제에 대해 시간을 두고 해결하되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장소에 대한 추가 접근을 허용하는 방법으로 일단 해결했다. 합의문에는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은 북한내 모든 핵물질에 관한 최초 보고(92년 핵 신고서를 말함 - 필자)의 정확성과 안전성 검증과 관련하여 IAEA와의 협의를 거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을 포함하여 IAEA 안전조치협정을 완전히 이행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함께 채택된 비공개 양해각서에는 "북한은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추가적인 장소와 정보에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을 포함해 안전조치협정을 전면 이행한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번 핵검증 합의에서 미신고 시설은 상호 동의하에 접근하도록 되어 있어 외견상 제네바기본합의 당시보다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월 12일자 외무성 대변인 답변을 통해 밝힌 것처럼 북한은 "10.3합의의 완전한 이행을 전제로 하여 핵시설 불능화 대상에 대한 검증에 협력한다"는 입장이다. 장래의 조치가 아니라 당장 2단계 합의 이행과 맞물려 일단 시료 채취를 포함한 신고 시설 사찰이 실시되고 그 결과에 따라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을 위한 추가 협의도 가능한 것이다.
남은 과제들
이번 북·미 합의를 둘러싸고 우리 정부가 그동안 요구해 온 '정확하고 완전한 검증'의 원칙이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소외되고 한·미 공조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정부 고위관계자는 14일 검증 합의 및 테러지원국 해제 결정이 힐 차관보의 방북 협상과 그 직후 한국 정부와의 협의, 중·일 등 6자회담 참가국들에 대한 통보를 거쳐 공식 발표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합의 이후 일본 정부 일각의 반발 등으로 향후 이행과 관련해 우려가 없지 않았는데, 이런 경로로 진행된 합의라면 향후 6자회담을 통해 추인되고 이행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북핵 관계자들은 대체로 10월 25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을 전후해 6자회담이 열려 이번 검증합의가 정식 의정서로 채택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불능화 조치는 이미 재개되었고 의정서가 채택되면 신고 시설 사찰도 조만간 이루어질 것이다.
북한이 10.3합의 이행을 전제로 한 검증 협력을 천명한 만큼 중유 95만 톤 상당의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가운데 아직 제공되지 않은 50만톤 상당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며, 납치 문제를 이유로 대북 지원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 일본의 지원분 20만 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북한의 핵폐기를 합의·이행하게 될 3단계 협상은 이런 문제들이 제대로 풀려가는 가운데 내년에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당장 핵시설 불능화 재개 조치 중 하나인 폐연료봉 인출에도 40여 일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한 검증의정서 채택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신고 시설 사찰과 그 이후 미신고 시설 관련 협의,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완료 등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11월 4일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느냐가 향후 핵문제 해결 과정의 중대 관건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지극히 타당하다. 현재 선거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이번 합의를 진전으로 평가한 반면,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는 "북한의 핵폐기 합의가 진정으로 이행되기 전까지는 이번 합의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결국 북핵 문제는 6자회담 참가국간 협력과 북한 핵시설 현장에서의 검증, 미국 대선 등 세 가지 변수가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단계적 해결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북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여전히 우리 외교·안보의 근본 과제인 현실에서 6자회담 참가국간 협력을 보다 주도적으로 도출해내고 핵 검증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책적 노력이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청된다. 미국 대선의 국외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두 가지에서라도 핵폐기를 위한 소기의 진전을 이룩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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