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가 지난 8월말 '동아시아 시인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일본의 문학잡지 <社會文學>에 기고한 글이다. 필자는 지난 10월 8일 번역문학원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환태평양ㆍ아시아 회의에서 이 글의 내용을 바탕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편집자
현대세계의 실상은 한 마디로 대혼돈(大混沌)이다. 서구 탈근대 철학의 대표적 명제는 '혼돈 속에 빠져 들어가면서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 그 자체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매우 올바른 진단이고 탁월한 명제다.
대혼돈에 대한 가장 정확한 처방책은 탁월한 혼돈과학이겠는데 그런 과학의 발견을 촉발할 수 있는 유일한 아키타입과 패러다임은 수승(殊勝)한 생명 사상이나 차원 높은 시예술(詩藝術)밖엔 없다.
그런데 서구에는 지금 그것이 없다. 후기 구조주의는 혼돈으로부터 이제 막 생성 중에 있는 '카오이드(chaoid)'를 확인하는 정도이고 혼돈학은 기왕에 발견한 비평형산일구조(非平衡散散逸構造) 위에 이미 사멸한 지 오랜 헤겔의 합명제(合命題)를 끌어들여 그 혼돈의 불온한 생명성을 봉합하는 정도에서 끝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탈근대 모험들의 실패에 절망한 서구 지성계는 아예 근대의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규범적 관념론으로 퇴각하고 만다. 그렇다면 현실에 한해서 정당하게 제기된 혼돈적 질서(混沌的 秩序)에 대한 이 같은 요구에 응답할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서구가 이미 막연하게나마 기대하고 있듯이 바로 동아시아요, 더욱이 동아시아의 시인이다. 왜?
동아시아는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 혼돈기를 이미 현대와 같은 대혼돈이 시작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으로 파악하였다. 중국은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과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으로, 일본은 '에자나이까 운동'과 대본교(大本敎)로, 한국은 동학(東學)과 정역(正易)과 증산사상(甑山思想)의 '후천개벽운동'으로 이에 대답하였다.
동학은 태초의 혼돈적 질서의 양개벽(兩開闢)을 '지기(至氣)'로, 정역은 동양의 전통적 우주질서인 율여(律呂)를 전복한 '여율(呂律)'로, 증산은 여성과 혼돈에 우주대권을 이양하는 '천지에 의한 음개벽(陰開闢)'으로 이를 표현한다.
이후 동아시아의 한국시인은 세상에 가득찬 극도의 혼돈적 질서를 제 안에 불러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쪼각쪼각 흩날리고 흩날림이여
붉은 꽃들의 붉음이로다.
(片片飛飛兮) 紅花之紅耶)'
'모심(侍)'의 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을 모심인가?
'해체와 탈중심의 중심'인가?
'the integrated network'인가?
단, '혼돈적 질서'를 모심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극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질서'는 동시에 수억천만년 전 태고로부터 진화되어 온 그리고 지금도 진화되고 있는 우주진화사(宇宙進化史) 그 자체를 모심이다.
참다운 진화는 찰스 다윈의 그것이 아니고 '안으로 의식(意識)이 있고 밖으로 복잡화(複雜化)가 있으며 개체중심(個體中心)으로 융합한다. (inward consciousness, outward complexity, identity-fusion)' 떼이야르 드 샤르뎅 진화론과 에리히 얀치 이후의 자유의 진화론의 종합이다.
이것이 동학진화론의 맨 처음의 원칙(原則)인 모심(侍)의 내용이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 者也) 시인은 이 모심의 지화점(至化点),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만년 생명나무에 천 떨기 꽃이 피어남이여
네 바다 구름 속에 달 하나 비침이로다
(萬年枝上花千朶 四海雲中月一鑑)'
떼이야르 드 샤르뎅 진화론의 마지막 오메가 포인트의 시적 상징(詩的 象徵)은 '단 한 송이의 거대한 흰 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묵시록(默示錄)에 제시된 선택된 사람들, '12만 몇 천 명인 그들만의 상징이다. 전지구 신경망의 Digital Network의 수렴적(收歛的), 질적 비약인 영적 행성(靈的 行星)이 허공에 두둥실 예루살렘처럼 떠오를 때 거기에 탄 사람들이 바로 12만 몇 천 명의 거대한 흰 꽃 송이 하나이고 나머지 인간들, 민족들, 생명과 물질들은 엔트로피(Entropy) 증대의 최고 순간에 지구붕괴와 함께 예외 없이 모두 다 해체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구의 대혼돈에 대한 전망이다. 혼돈적 질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도피이론(逃避理論)이다. 스티븐 호킹의 지구탈출설(地球脫出說)도 예외가 아니며 제임스 러브럭의 가이아 복수설(復讐說)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 대비한 동아시아 시인의 시적 이미지.
'만년 생명나무에 천 떨기 꽃이 피어남이여'
그것은 평균적 해체인가?
거기에 함께 대답하는 것이 다름 아닌 '혼돈 그 나름의 질서'다.
'네 바다 구름 속에 달 하나 비침이로다'
바로 대혼돈과 후천개벽 시대의 화엄경(華嚴經)이다.
찰스 다윈의 귀신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생명개체들의 혼돈의 지리멸렬을 통제하는 질서, 복수(復讐)하고 징벌(懲罰)하고 구원(救願)하고 저주(詛呪)하는 야훼 하나님처럼 무서운 '통섭(統攝)'의 빅 브라더 생물학에 의해 온갖 '낱생명'을 주재하고 지휘한다는 '온생명'의 망상적(妄想的) 생명학이 동아시아에서 새 시대의 '에코 파시즘'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중심의 융합'이나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 등은 슬기롭지만 불충분하다.
'탈중심적 중심'이나 'the integrated network'에 훌륭한 대로 의문구가 붙는 까닭이다.
동아세아의 한국 시인은 노래한다.
'밝고 밝은 후천운동을 각자 각자 제 나름 나름 밝히고 밝히거라.
같고 같은 진리의 맛이 공부하고 공부할수록 더욱 더 같아진다.
(明明其運各各明 同同學味念念同)'
무언가 '잘은 모르지만 그것이 그것 아니냐'는 희미한 의문이 떠돌 수 있다. 원효선사(元曉禪師)는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다르다(似然非然)'라고 했고 이것을 더 명확히 해서 동학의 수운선생은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라는 논리를 제시했으며 이런 경우를 '흥비가(興比歌)'에서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하여 우연의 일치에 의해 혐의를 받는 막대한 피해를 지적한다.
이것은 혼돈적 질서와 그것을 모심, 그리고 그 모심의 侍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사안인데 그 근본은 그 혼돈적 질서의 인식과 표현방법에 있다. '비흥(比興)'이라는 개념이 문제다.
당대에 통용되는 논리나 질서를 들어서 그 새로운 시대의 혼돈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 극단의 길은 새로운 시대의 혼돈을 먼저 전제하고 거기에 알맞는 새로운 논리나 그 나름의 질서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옛 시대의 질서나 논리를 의무적으로 참고하는 '흥비법(興比法)'을 바로 세울 때 비로소 참다운 개벽과 치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동학진화론의 맨 첫째 명제인 '모심(侍)'의 세 번째 원칙 '각지불이(各知不移)'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그 해결안이다.
'불이(不移)'는 송대(宋代) 주자(朱子)에 의해 성리학(性理學)으로 탈바꿈한 '화엄 사상(華嚴 思想)'이다. 고로 그것은 '통섭(統攝)'이나 '온생명'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니 '작은 먼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있다'이고 '월인천강(月印千江)'이니 '그 우주인 달이 천 개의 강물 위에 모두 다 다른 모습으로 비침'이다. 그럼에도 서로 서로 네트워킹하는 큰 그물망(網)인 것이다.
바로 그런 융합(融合)을 각자각자 제 나름나름으로 인식해서 실천한다는 것이 곧 '각지불이(各知不移)'의 참 뜻이다.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다.(似然非然) 그러면 '아니다, 그렇다'는 이 경우 무엇인가?(不然其然)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생성관계(生成關係)와 관련이 있다. '개체-융합(個體-融合)' 등이 드러난 차원이고 그 나름으로 '아니다, 그렇다'라면 그 밑에 숨어서 드러난 차원의 상극(相克)이나 상생(相生)을 자극하고 유도(誘導)하고 비판하고 수정(修正)하다가 그 차원의 드러난 생극관계나 현실에 알맞지 않고 그 영향력을 잃을 때 숨은 차원이 드러난 차원으로 개시(開示), 현현(顯現)하는 생명 생성관계를 한국전통 경락학, 기혈학(氣穴學), 단전학(丹田學) 등 생명학에서는 '복승(復勝)'이라 부른다.
변증법(辨證法)이 전혀 아니다. 바로 이 때 그 밑에 숨은 차원의 내용이 곧 '각지불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숨음'이 '드러남'으로 바뀔 때 그 양자 사이에는 다시금 '아니다, 그렇다'의 또 다른 생극(生克)이 시작된다.
'생극(生克)'과 '복승(復勝)'이 후천개벽 시대 동아시아 혼돈적 질서의 생성논리요, 그것을 모시는 시인(詩人)들의 기본 시학이겠다. '아니다, 그렇다'의 모순어법과 개폐(開閉), 표리(表裏), 내외(內外), 음양(陰陽), 일월(日月), 다시 말하면 혼돈적 질서 자체인 '여율(呂律)'과 '공(空) 무(無), 허(虛)'의 텍스트 개입이 동아시아 시학의 가장 중요한 미학원리다.
모심(侍)은 한울님(天主)을 모심이다. '모심'에 관해서 우리는 길게 이야기했다. '한울님'은 어떤가? '한울'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나아가 동아시아 전 정신사(全 精神史)에, 또한 서구와 전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다.
중앙아시아 공통의 신의 이름은 '한'으로 그 뜻은 '영원한 푸른 하늘'이다. 유일신이다. 그것은 '온'이요 '낱'이요 '중간'이다. 그 한울님을 동학에서는 어떻게 모시는가?
'님이라 불러 높이며 부모와 같이 친구(同事) 사귄다'
'거리두기'와 '하나되기'다 그것이 모시는 그 '님'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있다.
'한울' 즉, '천'을 전혀 설명도 해석도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無'요 '空'이요 '虛'다.
우주와 인간의 진화사에서 애당초부터 물질 안에 유기질이, 유기질 안에 생명이, 생명 안에 의식이, 의식 안에 영(靈)이, 영 안에 신(神)이, 신 안에 무(無)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내면이 외면을 미화 즉, 복잡화, 조직화함으로써 진화한 것이다. 창조적 진화론이다. 바로 이것이 동아시아 시학에서 '無의 텍스트 개입'의 원리인 것이다.
동아시아의 혼돈적 질서와 그에 대한 모심, 그리고 그 모심의 시학은 지난 상반기의 '촛불'로, '생명과 평화 운동'으로 수천 년 서남방으로 경사(傾斜)했던 '지구 자전축 이동과 북극 복귀, 북극해체에 연속된 후천개벽의 '기위친정(己位親政)'(천시받던 꼬래비가 정치주체로 등장하는 대변동)으로, 아시아 네오 르네상스와 세계 문화대혁명으로, 그리고는 마침내 '화엄개벽(華嚴開闢)'으로 나아갈 것이다.
문화의 시대, 혼돈과 감성과 감각과 육체와 동시에 영혼과 생명의 시대에 그에 따른 주체는 시인일 수밖에 없다.
그의 시는 당연하게도 생태(生態), 즉 자연 생명에로 향한다. 그냥 몰아쳐 한꺼번에 아름답거나 그저 오염, 부패되어 불쌍한 환경이요 자연일 뿐일까?
'모퉁이 모퉁이 골짜기 골짜기 가고 가고 또 간다
물과 물 산과 산 하나하나 다 깨닫는다
솔과 솔 잣과 잣 푸르고 푸르게 우뚝 섰다
가지 가지 잎새 잎새 만 가지 만 가지 서로 다른 매듭일세
(方方曲曲行行盡 水水山山個個知
松松栢栢靑靑立 枝枝葉葉萬萬節)'
동학의 '만사지(萬事知)'는 '만사'즉 '수지다(數之多)', 온 세계의 무수한 무수한 영과 생명과 존재와 물질과 사건과 생각들 그 모든 것을 내가 아는 동시에 그 만사가 만사 자신을 아는 것이다. 어떻게 아는가?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아는 것인 동시에 그 앎을 계시받는 것이다.(知其道 而 受其知)
이른바 세계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사지'가 '대화엄'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물해방'이게 되는 것이다. 물질 내부에서 영적 해방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알면서 그 앎을 계시받는다는 것'. 여기에 인간의 우주적 깨달음의 촉매로서의 중요성이 있는 것. 여기에 대화엄에 이르는 길에서의 시인의 큰 공적이 있다는 것.
'모퉁이 모퉁이 골짜기 골짜기 가고 가고 또 간다. 물과 물 산과 산 하나하나 다 깨닫는다.'
죽은 물건들에 불과하다는 환경 따위 하나 하나에 애를 써서 가고 가고 또 가고. 한갓 생명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는 물과 산 하나 하나를 다 깨달아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물질 내부의 신령한 앎이 내 앎이 되는 순간이고 솔나무 잣나무가 푸르게 푸르게 우뚝 서는 그 생명과 가지와 잎새의 만 가지 서로 다른 매듭매듭은 그 생명의 불타는 집중점일 것이다.
이것은 시인에게 무엇일까? 시인은 동아시아의 시인은 시어(詩語) 하나 하나에서, 그 길고 긴 언어사용의 속되고 통상적이고 때 묻고 짙은 그늘과 어둠 속에서, 그 한복판으로부터 숨은, 숨어 내내 숨죽인 채 기다리던 흰 영성의 빛이 배어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애쓰고 또 애쓴다.
말 하나 하나 안에, 말 하나 하나 사이 사이에 틈이 벌어져야 비로소 빛이 배어나온다. 그것은 때로 멍청하고 못나고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리하여 텅비는 틈! 이것이다.
장자(莊子)의 말이다.
'빈 방에 흰 빛 난다(虛室生白)'
빈 방이 고통으로 어둡게 그늘졌을 때 흰 빛은 더욱 소슬한 법. 시인의 시심(詩心) 속에서 '모심'이 더욱 강렬할수록 '흰 그늘'은 더욱 강렬한 법. 숭고하고 심오한 법. 그것이 바로 '중력으로부터의 초월'이고 그것이 바로 '천민이 가장 성인답다'는 말의 뜻이고 그것이 바로 '기위친정' '후천개벽' '대화엄'의 숨은 뜻이고 그것이 바로 촛불의 가장 촛불다운 뜻이겠다.
나무, 나무, 잎새, 잎새, 산과 물, 가지 가지. 그 모든 물질이 물질의 부처로서의 본질을 깨달아 해탈하는 만사지의 하나 하나 밖으로 퍼지며 나아가고 한 생각 한 생각 안으로 모이며 들어오는 혼돈적 질서의 확충의 미학. 그 '흰 그늘'이 동아시아 시인의 가장 숭고한 미학일 것이다. 그리하여
'서리 서리 휘날리고 눈보라 눈보라 흩날림이여
희디 흰 눈의 그 흰 빛이로다.
(霏霏紛紛兮 白雪之白耶)'
이제 흰 눈의 시절이 가깝다. 이 시 한 구절이 우리를 위로하리라. 이른바 '天地公心.' 인간의 마음과 우주의 마음의 합일이니 우리에게, 현대 사회에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우주적 공공성의 발현이다. '촛불'의 화엄적 집단지성, 그 '월인천강'의 예감이다. 다름 아닌 동아시아 시(詩)의 가장 큰 축복인 것이다.
2008년 8월 24일
한국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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