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백제의 근거지, 요서 지역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백제의 근거지, 요서 지역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16> 안개속의 그 이름, 백제와 '구다라' ②

(3) 백제의 근거지, 요서 지역

이제 베일에 쌓여있는 '백제'라는 명칭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보좌를 받았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 후에 백제(百濟)라고 고쳤다."라고 합니다. 이병도 박사는 그 위치를 현재의 경기도 광주와 남한산성 일대라고 합니다.11) 즉 백제를 처음에는 십제로 부르다가 성장하면서 백제로 부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나라 태종 당시(636년) 편찬된『수서(隋書)』에는 "백제는 처음 백가(百家)가 모여 바다를 건넜다. 그로 인해 백제(百濟)라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12) 그러니까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줄여서 백제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백제가 멸망(660)하기 전이니만큼 아마 백제 사신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들은 말을 기록했을 수도 있겠군요.

이 기록에 대해서 이병도 박사는 후대 백제인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단정하였습니다.13) 즉 이병도 박사는 흔히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변모해갔다는 일부의 사서의 기록은 후대 백제인들의 조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병도 박사는 백제 초기의 나라이름이 '위례'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14) 여기에는 국어학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십(十)이나 백(百)이나 우리 고유의 고대음은 모두 '온'이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십(十)이나 백(百)이나 모두 같은 말('온')인데 사서(史書)에서처럼 마치 십제(十濟)가 백제(百濟)로 진화한 듯이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백제의 국호는 신라나 고구려와는 달리 백제(伯濟), 백제(百濟), 위례국[慰禮(忽)國], 남부여(南夫餘), 응준(鷹準), 라투(羅鬪) 등으로 변모하는데 이 국호들은 일관성이 없고 어떤 계통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백제는 그 시조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은데다 국호도 여러 번 바꾼 것도 특이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 백제인들이 틈만나면, 자신들은 부여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왕 이후 나타나는 남부여라는 국호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이지요.

고구려나 가야, 신라는 모두 그 탄생설화를 남기면서 그 이름의 유래도 밝혀져 있지만 백제의 경우 온조15), 비류, 구이(구태) 등으로 시조가 복잡한데다, 부여의 시조와 겹치기도 하는 등 혼란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시조의 휘(諱 : 임금님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없습니다. 특히 다른 고대 시조들과는 달리 온조나 비류는 성(姓)이 없다는 것도 온조가 과연 역사적인 실체로서 개인(個人)인가를 의심스럽게 합니다. 오히려 부족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제 즉 반도부여의 시조는 부여왕 울구태임을 충분히 고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백제의 국호가 여러모로 혼란한 것에 비하여 신라나 고구려는 시대에 따라 표기하는 방법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 근본적인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신라(新羅)는 사로국(斯盧國) - 徐羅伐 - 新羅 - 始林(시벌) - 계림(鷄林 : 새벌) - 尸羅 등으로 바뀌었지만 그 중심되는 내용은 서울(Seoul) 즉 새로운 벌(도읍)이라는 큰 의미는 그대로 간직하였습니다. 이 말은 일본의 토쿄(東京)과 완전히 같은 의미입니다. 고구려(까오리)의 경우도 고리국(藁離國), 고려(高麗), 고례(古禮), 구리(句麗) 등으로 혼용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의미나 발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려(麗)는 나라이름으로 읽을 때는 '리[li]'로 읽히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하셔야 할 것은 실제로 '고구려(Goguryo)'라는 말 자체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민족의 원류인 '까오리'를 '高句麗' 또는 '高麗'로 표기한 것으로 현대 한국어의 한자읽기로 읽다보니 Goguryo(고구려) 또는 Goryo(고려)가 된 것이죠. 高句麗라고하면, 그저 '까오리' 또는 '코리(하홀리 또는 ㅋ홀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포괄적으로 '까오리'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지요. 636년 완성된『양서(梁書)』에서는 고구려, 구려, 고려를 혼용하고 있습니다.16)

이병도 박사는 구리(句麗)는 고구려어에서 도읍[국읍(國邑)]을 의미하는 구루(溝漊), 홀(忽)과 같은 말로 만주어의 '구루니(國)'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그리고 고(高)는 '최고 또는 신성(上·高·頂·神)' 등을 의미하는 말로 '수리', '술', '솟' 등을 한자로 표기한 말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까오리는 결국 도읍지(Capital)를 의미하는 말이 됩니다.17)

다시 백제로 돌아갑시다. 3세기말 4세기 초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백제(百濟)는 없고 아주 작은 나라인 백제(伯濟)가 있습니다. 이 백제(伯濟)와 후에 나타난 대국 백제(百濟)가 어떤 관계인지를 밝혀내기란 매우 어려운 상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동안 반도 사학계는 이 작은 나라 백제(伯濟)가 국제정세를 교묘히 타면서 대국 백제(百濟)로 성장했다는 것을 한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견해는 언어학자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즉 다른 나라의 이름이나 고유명사를 한자로 옮길 때에는 현지의 발음을 존중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작은 나라 백제(伯濟)와 큰나라 백제(百濟)는 글자가 유사할 뿐만 아니라 그 발음도 거의 동일하다고 합니다. 즉 한국 고대어 전문가인 도수희 교수는 이 두 말을 중고음(中古音)으로 미루어 읽으면 '밝지에'[paktsiei]라고 하여 거의 동일한 발음으로 추정합니다. 통상적으로 나라 이름을 나타내는 두 개의 글자가 있으면 앞의 것은 음으로 읽고 뒤의 것은 훈으로 읽는다고 합니다.18) 그러니까 백제(百濟)의 백(百)은 밝(shining), 제(濟)는 잣(성을 의미)으로 읽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은 바로 양주동 선생입니다. 양주동 선생은 백제를 밝잣(光明城)으로 풀이하였습니다.19)

이병도 박사도 백제가 『삼국지』에 나타난 백제(伯濟)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4장에서 말씀 드린 대로 이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사서가 바로 『양서(梁書)』입니다. 『양서』에서는 백제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하나로 점차 강성해져서 작은 나라들을 정벌하였다고 합니다.20) 이 기록만을 본다면 반도사학계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책에 연이어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다가 진(晋)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점거하자 백제도 역시 요서 지역에 근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21) 진나라 시대는 극도로 혼란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쥬신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강 유역에서 있던 작은 나라가 요서(요하의 서쪽) 지역을 경략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상태에서 작은 나라가 고구려의 영역을 넘어서 현재의 요하 서쪽 지역을 경략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 [그림 ④] 요하 유역 주요 지명

그래서 제가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해 드린 말씀은 백제의 건국 주체는 만주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부여왕 울구태(蔚仇台)로 추정되고, 이 분이 공손씨(公孫氏)와 연합하여 만주지역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 한 목소리로 "동명의 후손 가운데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공손도의 사위가 되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공손도의 세력이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에 의해 궤멸되자 이들이 남하하여 간 곳이 이전 부여계가 정착했던 한강유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이미 한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계를 정벌 또는 연합하여 새로운 큰 나라 백제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보았듯이 이 백제라는 말이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것이 4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백제라는 말이 얼마나 사용되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이 지역은 여러 세력들의 각축이 극심했던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가운데 백제의 성왕(523~554)은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왕은 부여계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강국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중요한 국가이데올로기로 설정한 것이죠. 여기에 불교를 도입하여 문화강국으로 거듭 태어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백제라는 말보다는 반도부여가 더욱 적당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죠.

백제의 국호가 나온 김에 또 하나의 특이한 것을 지적한다면, 백제의 다른 이름으로 응준(鷹準)이나 라투(羅鬪)라는 것도 있습니다. 응준(鷹準)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나오는 말로 "백제는 후대에 이르러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거나 응준 혹은 나투라고 칭하기도 하였다"라고 합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알기 어렵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응준이나 라투는 '매'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유목민들에게 매사냥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 그것과 관련이 있을 법합니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응준의 발음이 온조(온조왕)와 유사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만 지나친 주장으로 보입니다. 다만 응준과 라투는 정식 국호라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한 일종의 별명인 듯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가 선덕왕(善德王) 14년(645)에 건립한 황룡사(皇龍寺) 9층탑에 신라가 경계해야 할 적대국으로서 응유(鷹遊)를 적어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삼국유사』에는 "신라 27대에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하였다. 대궐 남쪽에 있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억누를 수가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을 억누른다."라고 되어있습니다.22)

이 기록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응유(鷹遊)·말갈(靺鞨)·예맥(穢貊)입니다. 현실적으로 신라의 가장 큰 적은 일본, 백제, 고구려 등입니다. 그런데 일본을 제외하고 고구려나 백제에 대한 말이 없지요. 그러니까 말갈(靺鞨)·예맥(穢貊)은 고구려를 지칭하고 응유(鷹遊)는 백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예맥이라는 말은 사서(史書)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도 이 말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지방민들을 '말갈'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23), 예맥은 고구려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말갈, 예맥은 비칭(卑稱) 즉 욕설로 사용하는 말인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응유 즉 응준이라는 것도 아마 백제에 대한 비칭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 주

(11) 이병도.『譯註 三國史記 下』(을유문화사 : 2003) 10쪽.
(12)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隋書』「東夷傳」百濟)
(13) 이병도. 앞의 책, 11쪽.
(14) 이병도 『譯註 三國史記』(을유문화사 : 1980) 353쪽.
(15) 온조는 만주어로는 寬·大·宏·廣 즉 '큰', '광대한'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慰禮·阿利水·郁里 등을 승계한 지명들이 漢水, 廣州, 廣津 등인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도수희, 앞의 책, 34~40쪽.
(16) 특히 句麗라는 명칭이 많아 모두 9번을 사용하고 있다.
(17) 이병도. 앞의 책, 217∼219쪽.
(18) 도수희. 앞의 책, 31쪽.
(19) 양주동 「國史 語彙 借字原義考」『명지대 논문집 1집』(명지대 : 1968) 64∼65쪽.
(20)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即其一也. 後漸強大, 兼諸小國." (『梁書』卷54 列傳第48 東夷)
(21)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既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梁書』卷54 列傳第48 東夷)
(22)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罹>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黃)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眞), 第九層穢貊."(『三國遺事』3卷 皇龍寺九層塔03)
(23)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한민족의 기원과 대쥬신」『2007상고사토론회』(국사편찬위원회 : 2007) 91~163쪽 참고.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