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세계의 한국학, 국내 지원이 필수적이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세계의 한국학, 국내 지원이 필수적이죠"

[권은정의 WHO] 베를린자유대학 첫 한국학 교수 이은정

이은정 박사는 지난 8월 말 독일에서 그 나라 헌법을 앞에 두고 공무원 선서를 했다(그의 국적은 한국이다). 베를린자유대학의 한국학과 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자유대학은 오는 10월 첫 강의를 시작하는 한국학과의 문을 열면서 한국학 연구소 초대소장으로 이 박사를 선택했다.

"공무원이 되는 것이니 헌법 앞에서 선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공무원으로서의 임무를 지키겠다는 내용인데, 기독교인이라면 '신이 나를 지켜주는 한 그렇게 하겠다'는 선서를 덧붙일수 있어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 내용은 안하는 것이고요."

그는 별스럽지 않게 말하는데 갑자기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도를 넘어선 종교편향적인 발언과 시각은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인지 새삼 궁금해진다.
▲ 이은정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 교수. ⓒ프레시안

자유대학으로부터 한국학과 교수로 초빙 받은 (독일에선 교수를 임용한다고 하지 않고 초빙한다고 한단다) 이박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총장과 대면하여 협상에 사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딜'? 신성한 상아탑 안에서 협상이라니?

"연구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기금이나 인력지원 등 제반 조건들을 제가 제시하면 학교 측에서 어떻게 얼마만큼 수용할지 결정하는 것이지요. 이번 협상은 사실 한 두 달 만에 빨리 끝났어요."

학교 측은 이교수가 제시한 조건들- 연구원과 조교 강사 사무직원등 열 명 정도의 인력운영경비와 도서비 연구소 건물지원 등등-을 전적으로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대 이상으로 많은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건 이교수 조차도 놀란 일이다. 학교 측이 이렇게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학연구소가 가동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학이 한국학과를 키우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협상도 쉬웠지요. 6월 말에 시작되어 8월에 임명장이 나온 것은 엄청나게 빨리 진행된 것이에요."
▲ 이은정 박사는 '활동적인 공부벌레'다. ⓒ프레시안

정치사상 분야에서 그 어려운 교수자격시험을 거쳐 2001년에 교수자격(하빌리타찌온)을 받은 이 교수는 자신이 좋은 조건으로 초빙 받은 것은 오로지 이러한 학교 분위기 덕분이란다. 그 배경은 이렇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베를린 시내에 대학이 2개가 되었다. 동베를린에 있던 훔볼트 대학과 서베를린의 자유대학이다. 두 대학 모두 그동안 각각 지역 연구센터가 강세를 이뤘는데 통일이 되었으니 지역학과를 특정지역으로 분산해서 키우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데 합의를 봤다. 90년대 중반부터 훔볼트 대학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이슬람을 맡고, 자유대학이 동아시아를 맡기로 했다. 베를린자유대학이 한국학과를 설치해야할 당위성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유대학 동아시아 센터 내에서 중국학과 일본학연구소는 이미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학은 좀 뒤늦게 출발하는 셈이다.

현재 독일내 한국학 연구소가 있는 대학은 함부르크, 보훔, 베를린자유대학 등 세 곳이다. 튀빙겐이나 프랑크푸르트, 레겐스부르흐 대학에서도 한국어나 한국학을 배울 수 있지만 독일에서 말하는 '정교수'가 없으면 학생이 한국학을 전공으로 삼을 수 없다. 함부르크와 보훔대학 한국학과 교수들은 각각 18세기 한국문학과 불교전공자로 이름나 있다.

"제가 주제로 삼는 부분이 현대이니 그분들의 고전과 함께 호흡을 맞추면 좋겠지요." 그는 독일내 한국학 전공자들과 함께 한국학을 만개시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는 대학 3학년이던 1984년 서독으로 유학 갔다. 당시로서는 조기 유학생인 셈이다. 총명한 재원이었던 그는 이미 대학 1학년 때 막스베버 전기를 읽고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괴팅겐대학에서 신입생으로 시작하여 정치사상사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원 없이 공부했던 것 같다. 공부하러 유학을 갔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냐면서, 그래도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우긴다. 학교일에도 앞장섰고 학생회 활동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며 공부벌레로 여겨질까 봐 질색을 한다. 그렇다면 활동적인 공부벌레 정도로 해두면 되겠다.
▲ 권은정 인터뷰어와 이은정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 교수. ⓒ프레시안

그가 독일에 갔을 때는 아직 '서독'이던 시절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한국은 잘 모르지만 한국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많은 분들은 하나같이 한국인은 참 친절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어요. 근면하고 성실하고 친절한 간호사가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인이었어요."

1970년대 파독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심어놓은 한국의 이미지는 그 뒤 광주항쟁, 올림픽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전쟁, 독일과 같은 분단국가의 이미지가 강했다.
▲ "한국의 이미지를 다원화시켜야 해요."ⓒ프레시안

"한국의 이미지를 다원화 시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박사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세대별로 다르다고 지적한다. 지금 독일 신세대에게 코리아는 삼성과 엘지, 현대와 대우…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의 이미지 위에 김기덕의 영화로 중첩된다. 또는 생산 쪽에서는 독일의 경쟁자로서 부각되기도 한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부분별로 다원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독일 사람들은 현재 한국이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하는 기업과 김기덕 같은 멋진 감독(독일의 작은 마을 비디오 가게에서도 그의 작품집이 따로 있을 정도로 김기덕의 독일 팬들이 많다.)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 기반을 잘 연결시키지 못한다. 여전히 독재국가라는 강한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다. 그런 것을 교정하는 일이 한국학을 담당하는 이들의 과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국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막중함을 느낀다. 현대한국을 독일에 알리고 서로 이해시키는 일이 그의 몫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국학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그는 한국 국내와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학교뿐만 아니라 한국 내 모든 기관들과 협조관계를 잘 이뤄야한다고 믿습니다. 자주 오가며 한국에서의 연구결과뿐만 아니라 한국과 독일, 유럽간의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싶어요. 독일에 있는 한국학 박사과정 친구들이 아주 유능해요. 더욱 잘 훈련시켜서 지성사, 문화사쪽에서 한국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는 자유대학 내에서는 중국학 일본학 한국학이 서로 긴밀한 협조를 이뤄 동아시아 내에서 한국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는 이미 그 실험을 지난 5년간 해왔다. 유럽에 있는 동아시아 학자들과 아시아에 있는 한국·중국·일본 학자들과 연속해서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동아시아 내의 자기주장 '이라는 시리즈를 냈다.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협력하면서 연구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 장을 많이 만들어 공동으로 연구하수 있는 틀을 만들 겁니다. 한국과 함께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중장기적인 연구를 추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럽사회 내 한국학 연구결과가 축적될 것이고 그런 게 교재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 기업가, 정치가들이 한국을 알고 싶어 할 때 학문적 검증을 통한 연구결과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을 알리는 작업을 기초에서부터 차곡차곡 진행해 나가겠다는 각오가 그의 표정에서 읽힌다.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는 한국에서의 지원은 전혀 없이 자유대학의 재원으로만 만들어 졌다. 외국대학에 생기는 한국학 연구소에 대한 국내의 지원은 물질적인 지원 이상이다. 앞으로 이 연구소에 대한 국내지원이 있다면 연구소는 더 크게 중심센터로 커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벌써 그는 큰 도움을 받고 있는 듯하다. 신영복 선생은 한국학 연구소 건물 정면에 걸릴 글씨를 흔쾌히 써주셨다.
▲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 연구소에 국내 지원이 있다면 더 크게 중심센터로 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얘기 도중에 이교수는 자주 서독, 동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사실 그는 20여년 독일생활 동안 양쪽 독일을 모두 경험했다. 처음에 괴팅겐에서 공부하면서 서독을 알았고, 후에 할레대학에서 훔볼트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동독을 알았다. 서독에 살 때는 대학에 워낙 동화가 되어서인지 이질감을 전혀 못 느끼고 살았는데 할레에 처음 갔을 때는 겁을 먹었단다. 원래 화학공업이 성해 부자였던 할레는 보수적인 곳이었는데 그 당시는 경기침체로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았다.

" 혼자 걸어 다닐 수가 없었어요. 외국인이나 서독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심했어요. 사람들이 "꺼져!"라고 소리치면서 몸을 막 부딪치며 지나가곤 했어요."

한참동안 오시(서독사람), 베시(동독사람)라고 하며 서로 구분해서 불렀다.

그는 살아보니 분위기는 다르지만 사람 사는 데는 다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할레를 이야기할 때는 "우리 할레에서는…" 한다며 웃는다.

그의 마음에서 서독과 동독은 정말 하나가 되었다. 그는 독일이 통일되던 그날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괴팅겐은 국경에서 50킬로였거든요. 매 주말 시내에서 장이 열렸어요. 그날은 동독 자동차 트라비가 막 행렬을 지어서 왔는데 서독사람들이 동독주민들이 오니까 박수를 치면서 바나나를 갖다 주는 거예요. 그때 동독에서는 바나나가 수입금지여서 최고급 음식이었거든요. 바나나를 주면서 서로 붙잡고 막 울어요.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드러내놓고 우는 일은 없는데… 할아버지들이 바나나를 들고 우시는데… 저도 그 중간에 서서 울었지요. 누구든 울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누구든 자신의 눈에 맺히는 눈물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 "통일을 장기적인 국가 전략으로 다룬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프레시안

내년이면 독일 통일이 20주년을 맞이한다. 독일통일은 우리의 이야기와 언제나 연결된다. 그들의 통일이야기는 우리의 것과 연결된다.

"많은 이들이 독일통일이 준비된 것이 아니었느냐,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에요. 동독사람들이 체코 대사관으로 탈출하기 시작했을 때도 통일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요. 동독에서 체제 개혁운동 하던 사람들도 체제 붕괴를 하려한 것은 아니었어요. "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89년 9월말에서 10월초에 매주 월요일마다 동독 주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지요. 라이프찌히에서 처음 촛불행진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촛불의 시초가 그때였네요. 그때 동독사람들이 내건 슬로건이 처음엔 '우리가 주인이다.'였는데 그다음에 '우리는 한민족이다'로 변했어요. 그게 10월이었어요. 11월 장벽이 무너지기 바로 전이라고 보면 맞아요."

이 지구상에서 불쌍하게도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에게 독일의 통일은 하나의 교과서로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에게 독일 통일이 어떤 레슨을 주고 있는지 물었다.

"통일정책은 선거공약과는 분명 달라야 해요. 89년 11월에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3월에 동독에서 민주적인 의회선거가 있었고 곧장 서독에서도 선거가 있었어요. 통일 이후 문제에 대한 정책결정이 장기적인 국가비전으로 이뤄진 게 아니고 공약으로서 통일정책이 마련된 것이지요. 엄청난 실책이 범해진 것이지요. 지금 독일 연금이 위기에 빠져 있어요. 그건 콜정부가 사회보장 정책기금으로 통일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산업부분에서 1,2년 사이에 동독의 산업시설이 전부 올스톱 되고 말았어요. 그 붕괴과정을 좀 더 천천히 했었어야했는데 거기에는 서독에 있는 특정 기업들이 압력집단으로 큰 역할을 했지요. 동독의 농업생산만 해도 경쟁력이 있었는데 서독의 대규모 농업회사들이 압력을 가해서 협동농장을 전부 문 닫게 했잖아요. 선거 공약화되었기 때문에 통일정책에 실책이 범해진 것이지요.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강행했던 점이 강해요."

그는 조심스러워하면서 우리의 통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반도를 생각해볼 때, 통일문제를 단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국가전략으로 다룬다면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지금 모두 통일비용을 생각하면서, 독일도 잘 못했는데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데 독일이 잘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못하란 법은 없지요. 우리는 국가가주도하는 경제개발을 해본 경험이 있는 국가잖아요. 그 당시에는 권위주의적인 국가였지만 지금은 민주적인 정치체제하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게 사실이 아니란 것을 우리가 지금 너무 잘 보고 있잖아요? 통일문제도 우리는 절대 안 돼! 하고 도망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목소리는 나직한데 그의 표정이 여간 당차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그가 독일에서 보여줄 한국은 보다 다이내믹하고 건강하고 신세대적인 모습일 것 같다. 오랜 슬픔의 그늘을 벗어던진 활기찬 한국의 모습이 유럽 저 너머로 알려질 게 분명해 보인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