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신의 여명기에 있어서 부여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하나의 나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부여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정한 형태의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여로부터 쥬신사의 주요 근간의 하나인 고구려와 남부여(백제), 열도부여(일본)가 성립되었습니다. 부여의 거시적인 변화과정(원부여, 동부여, 요동부여, 반도부여, 열도부여 등)에 대해서는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충분히 검토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부여는 까우리(코리), 쥬신(주선, 조선)과 더불어 한국인들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호수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부여나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부여는 북방의 고리(槀離 : 까우리 또는 까오리)라는 나라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고리국의 왕의 시녀가 하늘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동명(東明)이었죠. 부여는 바로 이 분에서 시작된 나라입니다. 물론 이 동명이라는 말은 구체적인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쥬신의 건국의 표상과 같은 존재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고리(槀離)의 현대 발음은 까오리인데 이 말은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는 고려를 분명히 '까우리(Cauli)'로 불렀던 것으로 봐서 아마도 까우리(또는 까오리)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도 태국에서는 한국을 까우리라고 합니다. 몽골에서는 나라나 마을(고을)을 뜻하는 말로 ㅋ홀리 라고 불렀고 일본에서도 '고오리(こおり : 郡)'라고 하면 나라나 마을을 의미하는 말로 살아있습니다. 결국 현대 한국을 의미하는 'Korea'는 이 말에서 나온 것이죠. 그런데 고리국을 탈출한 동명이 건국한 부여가 현재의 아무르강 지류인 송화강 즉 하얼삔 지역이므로 고리국은 내몽골 또는 바이칼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이미 상세히 해설해드렸다시피 까오리는 고구려, 고려, 코리아, 고려족, 고려인 등으로 끝없이 재생되고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까오리에서 바로 부여국이 나온 것입니다. 이후 부여는 까오리(코리)의 일부가 남하하여 형성되었고, 부여로부터 고구려[까오리]가 성립되고 다시 백제(반도부여)가 성립되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일본 열도로 이동하여 열도부여를 건설하게 됩니다.
이 같은 부여 - 고구려 - 백제(반도부여)의 친연성을 고증하는 많은 기록들이 보입니다. 백제 전문가 이도학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적 기원에 대한 시기적인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15)
① 3세기 후반 :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別種 : 『三國志』)"
② 5세기 초(414) : "옛적에 시조 추무왕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추무왕께서는 북부여에서 오셨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광개토왕릉비문』)"
③ 5세기 전반 : "추모성왕께서는 원래 북부여에서 오셨다(鄒牟聖王 元出北夫餘 : 『모두루 묘지』)"
④ 5세기 후반 :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別種 : 『後漢書』)"
⑤ 6세기 중엽 :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이라고 한다(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 『魏書』)"
⑥ 7세기 중엽(630년대) : "고구려는 본래 그 선조가 동명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동명은 본래 북방오랑캐인 고리국의 왕자였다(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 :『梁書』)"
⑦ 618~628년 : 고구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왔고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이라고 한다(其先出於夫餘 自言始祖曰朱蒙 : 『周書』)"
⑧ 627~659년 : "고구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其先出夫餘 : 『北史』)"
⑨ 629~636년 :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出自夫餘 :『隋書』)"
⑩ 10세기 중엽(945) :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에서 나왔다(出自扶餘之別種也 : 『舊唐書』)"
⑪ 11세기 중엽(1044) :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本扶餘別種也 : 『新唐書』)"
이상을 보면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은 남부여(백제)의 경우를 보도록 합시다.16)
① 5세기 후반(472) :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저희는 근원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魏書』卷100 百濟傳)."
② 6세기 중엽 : "백제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其先出自夫餘 :『魏書』)"
③ 7세기 중엽(630년대) :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족이며 삼한국에 있었다(其先東夷有三韓國 :『梁書』)
④ 618~628년 :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부여의 별종이다. 구이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 <중략> : 『周書』)
⑤ 627~649년 :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족이며 삼한국에 있었다(其先東夷有三韓國 : 『南史』)
⑥ 627~659년 :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고리국에서 나왔다(蓋馬韓之屬國 出自索離國 :『北史』)"
⑦ 629~636년 : "백제의 선조들은 고구려로부터 나왔다(百濟之先 出自高麗國 : 『隋書』)"
⑧ 10세기 중엽(945)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之別種 : 『舊唐書』)"
⑨ 11세기 중엽(1044)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夫餘別種 :『新唐書』)"
이상을 보면 백제(남부여)도 분명하게 부여의 별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와는 주체 세력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즉 백제 왕성인 부여씨는 그 내력을 "그(백제)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扶餘)로써 그 씨(氏)를 삼았다"고 합니다.17) 이것은 왕성이 국호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왕실의 경우도 고구려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남부여(백제 또는 반도부여)는 부여의 후예들이며 4세기 중후반 백제 왕성이 부여씨(扶餘氏)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의 건국에는 고씨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부여족이라고 할지라도 부여와 고구려는 중심 세력이 좀 다르고 고구려 건국의 중심 세력인 고씨가 부여의 주된 세력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기록들 가운데는 남부여왕(백제왕)인 위덕왕(夫餘昌 : 554~598)이 대적 중이던 고구려 장수와 통성명하는 가운데 "서로 성이 같다."라고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18) 그 말은 결국 고구려나 부여나 지배계층이 서로 비슷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물론 중심 세력들은 차이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고구려나 남부여(백제 또는 반도부여)는 하나같이 동명묘(東明廟)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19) 고구려와 백제(남부여)는 그 나라를 실제로 세운 시조와는 달리 동명왕을 시조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부여의 시조인 동명묘를 고구려와 남부여(백제) 모두 세우고 있으며 이에 두 나라의 왕들은 정기적으로 참배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대무신왕 3년 동명왕묘를 건립한 기록이 보이는데 고구려가 시조묘를 건립한 기록은 없지만 시조묘에 가서 참배한 기록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대 고구려왕들이 참배한 곳은 바로 동명묘로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20)
신뢰하기는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의 온조왕편을 보면, 도읍을 정할 때 신하들이 동서남북의 사방의 입지조건을 들어서 왕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즉 지배영역을 사방사비(四方四至)로 표현하는데 이 같은 사분관적(四分觀的) 의식은 부여인들의 공통된 특성이라고 합니다. 오바야시타로오(大林太郞) 교수는 이 같은 사분관(四分觀)이 부여국의 독특한 우주론적 신성왕권의 구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21)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여나 고구려나 모두 이동성이 강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5부 조직으로 보는 관점도 강합니다. 즉 중앙과 4방을 합하여 5부로 족제조직이나 행정조직을 편성한다는 것이죠.
만약 이와 같이 고구려와 남부여가 공통의 근원에서 나왔다면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는 바로 정통성 시비일 것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양국간의 집안싸움으로 발전할 것이고 실제로도 이들은 천년의 숙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백제 관련 기록에서 매우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고리국에서 나왔다(蓋馬韓之屬國 出自索離國)"는 『주서(周書)』나 『북사(北史)』기록들입니다. 이 기록은 백제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들이기 때문에 어떤 기록보다도 믿을만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백제가 부여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한의 속국이라는 점입니다. 마한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에서 터전을 잡은 국가입니다. 따라서 부여계의 극히 일부가 한강 유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마한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삼국지(三國志)』의 기록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에서는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일체 없습니다. 3세기 후반까지 백제는 "사실상 없는 나라"이거나 고려할만한 국가 수준이 안 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삼국지』는 마한(馬韓)에는 여러 소국이 있다고 하면서 54개국들을 나열하였는데 이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마한의 맹주는 목지국(目支國)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한반도에 소재한 소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백제국(伯濟國)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3세기 이전, 더 정확하게는 고이왕 이전에 한반도 안에 존재했던 백제(伯濟)는 고려할 만한 수준이 못 되는 소국(小國)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이 백제가 부여계라는 것을 여러 사서들이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강유역의 마한연맹 지배하의 소국 백제가 있는데 이들은 부여계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부여계의 극히 일부가 한강 유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마한의 영역에 들어가고 이로부터 성장하여 마한을 정복해 가는 과정은 『삼국사기』에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 온조왕의 기록들은 시기적으로 볼 때,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들입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온조왕의 시대는 BC 1세기 후반이었고, 마한이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245년경으로 이 때, 위나라의 군현이 마한 지역을 군사적으로 크게 압도한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22) 시기적으로 무려 260년도 더 지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국 백제는 부여계 가운데 극히 일부가 한강유역에서 정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삼국사기』기록의 일부를 인정한다면, 이들이 온조계나 비류계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제외하면, 온조나 비류에 대해 알 수 있는 신뢰할만한 정사의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백제라는 나라의 실체를 다시한번 제대로 살펴봅시다.
필자 주
15) 이도학 『고구려와 백제의 출계 인식검토』(고구려 연구재단 게재논문).
16) 이도학, 앞의 논문.
17) 부여씨는 줄여서 여씨로 주로 기록되어 있다(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 『三國史記』卷 23, 溫祚王 卽位年)
18) "今欲早知與吾可 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二十九矣"(『日本書紀』卷 19, 欽明 14年)
19)『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대무신왕 3년, 신대왕 3년, 고국천왕 2년, 동천왕 2년, 중천왕 13년, 고국원왕 2년, 안장왕 3년, 평원왕 2년, 영류왕 2년 에 시조묘(始祖廟 : 시조를 모신 사당)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백제의 경우에도 온조왕 원년, 다루왕 2년, 분서왕 2년, 아신왕 2년, 전지왕 2년 등에 동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 이도학, 앞의 논문.
21) 大林太郞『邪馬臺國』(中央公論社 : 1977) 143~145쪽.
22) 『三國志』魏書 「東夷傳」韓.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