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시에서 배운다
"밝고 밝은 후천운수를 각각 제 나름나름 밝혀내니 같고 같은 공부 맛이 공부하고 공부할수록 더욱 더 같아진다
(明明其運各各明 同同學味念念同)"
수운 선생의 이 시 두 구절을 인도자로 삼아 공부에 들어가기로 합시다.
김지하 모심
전번 (7월) 12일 강의에 비해 이번 강의 원고량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70~80매 가량 됩니다. 우선 오늘 강의는 원고를 읽는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원고를 완전 무시하겠습니다. 그 줄거리에서는 같거나 비슷하지만 그것은 문자고 강의는 말이므로 그 지향하는 바 내용이 거의 전혀 다릅니다. 더욱이 오늘 강의는 원고에는 없는 수운 선생 시 여러 편을 인용하면서 지난 두 번(오늘 원고 포함)에 대해 약간 비판적으로 대응하며 진행할 것입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것을 녹음해 풀어서 정리하면 세 번의 특강이 되는 셈입니다.
촛불에서 촉발된 새 시대의 후천 개벽에 대한 동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 사상의 몇 가지 원칙(12일), 그것을 실천하는 조직과 활동 역사의 법칙성(19일 원고), 그리고 문화적 표현을 통한 개벽의 예감과 그 실천에 대한 자기 비판(19일 오늘의 수운시 인용 강의)이 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육임제(六任制)의 원리로서 사상, 실천, 비판의 세 기능 분담에 따른 것입니다(19일 강의 녹음 푼 것을 보며 새롭게 생각한 것들을 8월 15일 전후한 며칠 만에 다시 씁니다).
촛불이 무엇입니까? 후천 개벽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동서 고급 일체의 선천 문명에서 이제껏 그저 한낱 보호대상에 불과했던 꼬래비, 천덕꾸러기, 욕을 밥 먹듯 하고 몽둥이나 회초리, 아니면 그보다 더 악질적인 교육이란 이름의 매질과 주리틀기로 경쟁력이니 몰입영어교육이니 하며 단 한순간도 가만 안 놔두고 밟혀온 어린이, 청소년들 그리고 부엌데기, 집지킴이, 설거지꾼, 성적 노리개이거나 세상에 나가도 남자에 비해 월급이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외 여성들이 오히려 세상일의 중심이요 전면인 정치전선에 앞장서 나와 그것도 하루 이틀 아닌 100일 가까이 몇 달을, 그러나 결코 폭력이 아닌, 그리고 증오의 선동전이 아닌 비폭력 평화와 유희와 축제와 미소로서 고대, 상고대의 저 이상정치인 화백 민주주의를 되살려내고, 실제로 사람이 그것 없이는 못 살면서도 저치에서는 내내 소외시켰던 먹거리와 물과 건강과 교육과 우리 곁에서 숨 쉬는 산과 물과 숲, 다시 말하면 생활과 생태와 생명을 정치 의제의 전면에 들고 나왔다는 것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후천 개벽입니다.
수운 선생 이후 20년 뒤인 1879년에서 1885년 사이 충청도 연산 사람 김일부(金一夫) 선생에 의해 공표된 '정역(正易)'에 따르면 후천개벽의 한 특징은 '기위친정(己位親政)'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꼬래비가 정치의 주가 된다'는 뜻입니다. '기위(己位)'는 "꼬래비'올시다. 그러면 이런 사태 전후에 지구와 우주의 변동은 없는 것인가?
후천 개벽은 인간과 더불어 자연 자체에 대변동, 대변환이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역은 바로 그것을 예언했습니다. 촛불은 오로지 2008년에 비로소 처음 켜진 것이 아니올시다. 언제부터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2002년 월드컵 축구 응원 때 어린이, 청소년, 여성이 절대 다수의 주체였던 이른바 붉은 악마 700만이 그 유월 한 달 내내 역동성과 균형, 투쟁의욕과 관용, 민족의식과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젓함으로 온 세계를 감동시킨 바로 그 때부터입니다.
정역에서는 '기위친정' 즉 꼬래비가 정치 주체로 등장할 바로 그 때에 선천 시대인 지난 수 천년간 서남쪽으로 내내 크게 기울었던 지구자전축(이 역시 우주적 '기위')이 북극 중심의 지구 중앙으로 자기 본래 친정(親政)의 위치를 회복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북극과 지구의 남반구를 비롯한 전 지구상에 온 우주에 큰 변동이 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수운 동학의 후천개벽 예언을 동아시아 나름의 전통우주과학인 역학(易學)으로 풀이한 것이 다름 아닌 정역입니다.
그럼 2002년 전후한 바로 그 무렵이 실제로 무슨 일이 지구에 일어났습니까? '쓰나미'올시다. 인도네시아에서 2004년 한꺼번에 26만 명이 몰살당한 대해일이 일어났습니다.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지구 구조의 대륙판과 해양판의 충돌로 보았고 그 중 일부는 그 충돌의 원인이 다름 아닌 지구 자전축의 이동 때문이라고 보고했습니다만 서구의 주류과학계는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묵살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그 사태는 라틴어 학명이 아닌 그저 그냥 일본말로 표시돼온 것입니다. 공식으로 해명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또 그 무렵 북극에 파천황의 대변동이 옵니다. 북극을 구성하는 두 개의 극, 지구 에너지 시스템 중심의 '지리극(geographic pole)'과 지구와 태양계 등 우주 에너지 시스템을 연결하는 '자기극(magnetic pole)'이 상호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신문 보도가 나기 시작한 것이 2004년 직후 무렵부터입니다.
북극은 물의 발생지요 생명의 탄생지입니다. 그 북극의 대빙산들이 이때부터 대대적으로 녹기 시작하고 남반구 해수면이 기후학자들, 해양학자들의 예측을 훨씬 초과하여 대대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시베리아 동토대 밑에 꽁꽁 얼어붙어 매장된 메탄 층이 대규모로 연쇄 폭발하여 북극과 시베리아 기온 자체가 따뜻해지기 시작합니다.
엄청나게 바빠진 대규모 산불, 토네이도, 지진, 해일, 화산, 지반침강 등과 함께 생물종의 변종과 멸종, 오염, 또는 반대로 완전 소멸위기 상황에서도 전혀 죽기 않는 기괴한 생명체들이 나타나고, 수천만 년 전 완전 퇴화되어 진화가 끝났다는 과학적인 합의를 끌어냈던 곤충 겨드랑이 날개가 다시 돋아나 '재진화(re-evolution)'설이 발표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지구 기후변화의 주범이 이산화탄소 과잉 배출에 의한 온실가스이기는 하나 지난 발리 회의 이후 온난화(warming)라는 단순한 일방주의적 표현 대신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포괄적 명칭을 앞세우기 시작한 것이 사실 온난화 사이사이에 앞으로 간빙기(間氷期), 즉 짧은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가 끼어들기 시작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인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석유 에너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 자전축 복귀나 북극 해체 같은 '기위친정'을 비롯한 후천개벽 그 자체의 우주적 진행으로 인식하고 연구하고 대책을 세워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미국사람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며 '촛불'을 애들 장난쯤으로, 여편네들 변덕쯤으로, 가난한 무직자들의 좌파 난동쯤으로 몰아가는 무식하고 무능하고 우주 공부 따위는 해본 일도 없는 속물 보수꼴통 따위들이 어쩌고저쩌고 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엔 어떤 광활한 우주적 경륜과 신의 계시에 토대한 인류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의 예감, 민중생활 하나하나의 구체적 생명심에 대한 깊고 섬세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그에 기초한 민족과 인류와 전 우주 중생 모두에 대한 아픈 모심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수운 선생 시 중에서 비교적 초기 것으로 보이는 다음의 네 구절이 생각납니다.
'황하의 물이 맑아지고 봉황이 울음 우는 뜻을 그 누가 알겠는가.
개벽의 운수가 스스로 어느 쪽으로부터 오시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 평생 천 년 운수의 천명을 이미 받았고
거룩한 덕이 있는 우리 집안의 백년 대업을 이미 물려받았으니
용담의 물이 흘러 세계 네 바다의 근원에까지 이르르고
구악의 봄이 돌아와 한 세상의 꽃이 활짝이 필 것이다.
(河淸鳳鳴孰能知 運自何方吾不知 平生受命千年運 聖德家承百世業 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回一世花)'
우주와 역사가 크게 바뀌고 성인이 나타날 때 황하의 물이 맑아지고 봉황이 나와 울음 운다는 그 대전환과 대개벽의 운수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지를 자기자신은 자세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 전 신라 적의 유불선 삼대 사상의 생명학적 종합의 거인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의 후예이고 선천 우주 사상의 드높은 봉우리 퇴계 영남학의 계승자인 부친 근암 최옥(近庵 崔沃) 선생의 자식으로서, 그 위에 한울의 후천계시를 받은 자기자신의 새로운 개벽사상, 즉 후천을 중심으로 선후천을 크게 종합한 동학의 진리는 반드시 차차 온 세계를 바꾸고 동학의 땅인 이 나라에 큰 운수가 찾아와 한 시대의 아름다운 성배(聖杯)의 꽃이 가득히 필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한 것입니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전라북도 전부 모악산 아래에서 후동학(後東學)을 내세우고 무장혁명이 아닌, 의술(醫術) 등에 의한 평화적 후천개벽을 추진하던 강증산(姜甑山)의 수운 비판이 있습니다.
'수운은 개벽을 위해 내가 먼저 보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유학(儒學)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내가 다시 왔다'
그리고 그가 내세운 것이 불교를 중심으로 한 유불선과 기독교의 종합입니다.
물론 수운은 퇴계 학파의 계승자인 그의 아버지 최옥의 유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동경대전의 서두에 강조된 논학문(論學文) 즉 철학적 기본 골격이 그렇고 자신의 가장 강렬한 메시지인 전통 선도(仙道), 풍류(風流)의 생명학 앞에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합법성을 전제한 것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 시대 전 인류 문명사 우주의 이 대전환의 과도기에 반드시 깊이 이해해 둬야 할 절실한 사안입니다. 우선 현실이 중요합니다. 수운은 감옥에서 해월에게 보낸 옥중시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등불이 물 위에 밝으니 의심을 낼 틈이 없으나 기둥이 다 낡은 것 같지만 아직은 힘이 남았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등불은 후천의 진리요 기둥은 선천의 전통사상입니다. 그리고 제가 현실이라고 부른 것은 사회 정치적 또는 학문적 실체 풍토만을 말한 것이 아니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우주적, 영적 변화의 단계까지 포함하는 말이올시다.
후천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선천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수운에게 내린 한울님의 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즉 부적과 주문 중 우선 부적의 모양이 바로 이 과도기적 이중성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그 모양이 '태극이고 또한 모양이 궁궁(其形太極 又形弓弓)'입니다. 태극은 중국문명 중심인 수천 년 선천시대 우주 음약의 상징이요 인의예지 사상(四象)으로 이루어진 세계 질서 자체입니다. 이것이 먼저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활궁 자 두 개인 '궁궁(弓弓)'이 이중적으로 주어집니다.
궁궁은 수운 이전에 이미 시작된 동아시아 전통 문명의 해체 시대,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 후천개벽이 시작되는 초기 혼란기에 민간에 유행하던 기괴한 생명의 땅, 태극이나 천지음약과 같은 거룩한 전통 우주철학으로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삶과 변화의 실체를 상징합니다. 이른바 '혼돈(混沌)'입니다.
민중 속에 숨겨진 채로 유행하던 비결류들, 정감록(鄭鑑錄)이나 격암유록(格菴遺錄) 등에 나타나는 피신처(避身處), 도망지(逃亡地) 같은 곳이겠는데 기이한 것은 바로 그 '궁궁'이 활산기의 명인이었던 고구려의 건국 영웅 고주몽의 상징이기도 하고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때의 국시(國是) 즉 국가목표였던 '다물(多勿)'-옛 민족의 땅 또한 옛 민족의 평화로웠던 낙원 시대의 회복-의 별명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전라도 서남해안이나 완도 등 도서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삼국 통일기 해상왕국의 신화를 창조했던 '장보고(張保皐)'의 본명이 '궁복(弓福)'으로서 민간에서는 역시 그가 '궁궁'이라는 별명으로 통용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백제 망국 이후 그 지방의 망국민들의 한(恨)과 해양으로의 희망이 결합된 상징어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 사상의 총괄인 태극에 대항하는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의 한 상징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 국기가 태극인 것과 같이 중국과 한민족 사이의 동아시아 전체 문명의 이중복합, 기우뚱한 균형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여하간 이조 말에는 계룡산과 십승지(十勝地)는 물론이고 심지어 서학(西學), 즉 천주교조차도 '궁궁'으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아 새 시대, 변혁, 새로운 삶, 해방 등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수운 동학에서 바로 이 '태극궁궁'의 부적에 해당하는 동일한 우주적 실체가 '지극한 기운(至氣)' 또는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渾元之一氣)'이니 바로 '혼돈적 질서(chaosmos)'입니다. '혼돈(渾元)'은 태고의 근원적 생명력이겠고 '일기(一氣)'는 곧 태극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강증산 자신이 후천 세상의 정치 주체가 곧 율려(律呂)라고 주장하면서 바로 그것을 수운 주문 중의 앞 주문인 강령 주문 즉 '지극한 기운이 이제 여기에 이르러(至氣今至)'를 항상 애호했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율려주문'이라고까지 언명했는데 사실은 '지극한 기운'은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이니 '율려'가 아닌 것입니다.
율려는 도리어 그와 반대로서 율(律) 즉 질서, 이성, 우주율, 남성성, 체계, 태극, 중심, 하늘, 군자, 임금, 중국, 황종(黃鐘)율 따위이고 여(呂) 즉 혼돈, 감성, 무질서, 여성성, 해체, 무극(無極), 탈중심, 땅, 소인(小人), 백성이나 짐승이나 물건, 오랑캐 따위 또는 협종(夾鐘)율 따위를 제압하고 지배하고 통제하는 태고 이래의 가장 아름다운 우주의 율법이니 주역(周易)의 기본구조인 '음을 누르고 양을 들어올리는 것(抑陰尊陽)'을 압축한 음악질서입니다.
그는 그 때 차라리 '여율(呂律)'이라고 뒤집어 말했어야 옳았습니다. 강증산이 김일부에게 배웠단 전설도 파다하니까요.
여율은 도리어 '양을 다스리고 음을 춤추게 하는 것(調陽律陰)'이기 때문이지요. 여율은 19세기에 김일부가 '정역'에서 개념화한 것으로 아득한 옛날 1만 4000년 전 파미르 고원에 있었다는 우리 민족의 조상인 마고(麻姑) 시대의 우주와 세상의 질서인 '팔여사율(八呂四律)' 그야말로 태고적인 '혼돈적 질서'의 부활이었으니 수운동학에로 이를 확대한다면 '태극궁궁'을 전복한 '궁궁태극'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부터의 후천개벽, 이제부터의 생명평화운동, 이제부터의 '에코피스(eco-peace)', 이제부터의 '생명의 평화(pax vitae)'는 '여율', '혼돈적 질서', '궁궁태극'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다운 생명은 그 자체가 이미 혼돈이며 참다운 평화는 그 자체가 반드시 그 혼돈한 생명의 본성에 입각해야만 비로소 참다운 산 질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하간 수운이 그 부친인 최옥의 유학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요 공자의 태극우주와 인의예지 사단(四端)을 인정한 것이 사실이지만 가문의 전승 즉 '연원(淵源)'으로 따진다면 그 최초의 샘물은 역시 고운 최치원으로서 간략히 압축한다면 고운의 언표 중 풍류에 관한 말, '포함삼교 접화군생(包含三敎 接化群生) 즉 '풍류도는 이미 제 안에 유불도 세 가지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뭇 생명을 가까이 하여 감동시키고 조화시키고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풍류 생명학의 원리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강증산의 오판처럼 일방적인 유학 중독에 빠진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풍류도의 핵심은 '접화군생'에 있으니 바로 이 생명학을 중심으로 유도, 불교, 노장학을 통합한 고운의 흐름 위에 천주학의 충격을 흡수하여 한민족 전통의 한울님 사상, 한울님 신앙을 후천 시대에 대한 개벽적 대답으로서 창조적으로 부활시킨 것입니다.
물론 부적에서 태극을 궁궁에 앞세운 것은 수운의 당대적 시국관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지금에 있어서까지도 선후천 통합적 사유를 중요시할 때 필히 고려해야 될 사안이지만 동시에 부적 못지않게 중요한 상제(上帝)와의 대화에서 밝혔듯이
상제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이 천지(태극)는 잘 알지만 귀신(궁궁)은 모른다. 바로 그 귀신이라는 것도 나(상제 자신)다'
란 구절 또한 매우 중요하며 역시 강령 주문의 '지기금지(至氣今至)'가 중요한 것과 같은 이유로 본 주문 바로 뒤에 붙는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 공덕을 밝히고 밝히는 실천을 하면서 동시에 생각하고 생각하여 공부하기를 잊지 않으면 드디어 극에 이르러 지극한 기운으로 변화하고 또한 극에 이르러 지극한 거룩함에 도달할 것이다(明明其德 念念不忘 則 至化至氣 至於至聖)'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나온 '극에 이르러 지극한 기운으로 변화'함이 곧 '궁궁'이라 할 때 뒤에 나온 '극에 이르러 지극한 거룩함에 도달할 것'이 '태극'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선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경우의 '지극한 거룩함' 즉 <至聖>은 이미 '보통의 거룩함' 곧 '聖' 또는 '태극'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 한학(漢學) 일반의 견해입니다. 그 '넘어섬'의 과격할 정도의 강조가 곧 '극(至)'이 네 번이나 겹쳐 있는 점이올시다.
지와 같은 공자 유학의 사덕(四德) 사단(四端) 사상(四象)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니 유학사상에서 근원적 혼돈질서라 할 '무극(無極)' 노장학에서의 '무궁(無窮)' 또는 불교에서의 '대화엄(大華嚴)' 그리고 일상 정신치료에서 강조되는 인도사상과 카를 융의 태장경(胎藏經) 등과 연관된 살아 있는 '만다라(mandara)'의 경지가 아닌가 합니다.
결국 수운은 한울님의 계시의 형태로 '태극궁궁'을 '악질만세(惡疾滿世)의 시대' 즉 '악한 질병이 세상에 가득한 시대의 선약(仙藥)'으로 그것을 불살라 탄복하면 만병이 다 낳는다고 했지만 결국 그 문제는 오늘날 도리어 '궁궁태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약 이 사상이 중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면 어찌될까요? 금번 북경 올림픽에서 물론 중국 당국의 조직적 지시에 의한 것이겠지만 중국 관객은 저 할 일은 안하고 한국 선수들 야유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경주하는 정도입니다만 공자, 그 인의예지의 사상과 태국을 앞세우는 공자의 선천 전통조화사상을 지금 세계통일의 비전으로 밀고 나오고 있는 중국에 바로 이 궁궁태극이 촛불을 켜고 건너간다면?
해월은 '우리 부적이 중국에 상륙할 때가 바로 후천개벽이 본격화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 때 바로 그 촛불 네트워크의 브랜드는 역시 '궁궁태극'이 아닌 '태극궁궁'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토인비를 참고합시다. 여기에 수운 지혜의 깊은 비밀이 있다고 생각되어서입니다. 이번 올림픽, 2002년 월드컵 때의 중국인의 한국 야유와 유학생 왕따를 기억하십시오. 왜요? 지금 이 시절에 150년 전의 수운 지혜가 다시 한 번 중요해지는 동북아시아 미래문명운동에서 그 후천개벽운동에서 촛불네트워크의 참 지혜로 되살아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곧 숨은 차원인 '궁궁태극'이 드러난 차원인 '태극궁궁'과의 사이에서 미묘한 '닫고여는' 이중성의 '아니다, 그렇다'와 개벽운동, '至化至氣 至於至聖' 운동을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암시적인 이야기 하나 합니다. 오늘 비가 오는데 비 오는 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그랬는데 멋진 모시옷을 입고 나왔는데 말이지요. 그만 비를 맞아가지고 새 새끼처럼 후줄근하게 되어 버렸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요? 무슨 암시인지요? 오늘 얘기와 완전히 무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일까요? 촛불 이야기 같습니다. 무엇일까요?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15일 100회째를 맞는 촛불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7월 19일 모시옷에 비 맞는 이야기의 숨은 뜻이 8월 15일 근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내게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숨은 뜻의 시작은 이미 7월 19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촛불도 촛불일까요? 7월 19일의 촛불도 촛불일까요? 이미 그 때 시작된 것입니다만 아직은 숨겨져 있었지요. 현 정부는 이미 그 무렵부터 촛불은 꺼졌다고 본 것입니다. 그 뒤의 촛불은 촛불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잘 되었다고 마구 지지 밟고 잡아가고 송장에 칼질하고 토막 내면서 저 잘났다고 발광하기 시작합니다.
촛불은 이미 촛불이 아닙니다. 이름이 촛불일 뿐, 우리가 그리도 상찬하던 그 '기위친정'의 촛불이 이미 아닙니다. 한 달 전에 이미 시작된 현상입니다. 촛불은 이미 광장에는 없습니다. 어디 있는가?
조그마한 지역들, 소도시들, 동네 수퍼 근처나 그네터 등에서 조그맣게 타고 있을 뿐 광장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모시옷에 비 젖어드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럼 지금 광장에 켜진 촛불은 무엇입니까? 후천개벽과는 아무 관계없다고 했는데 무엇입니까?
댓글 알바들이나 6월 29일 밤에 봤던 까쇠들(마타도어, 사꾸라, 프락치들, 파괴와 난동꾼들)과도 조금 다릅니다. 나는 직감으로 압니다. 냄새도 표정도 다릅니다. 못 속입니다.
이른바 '맑스 촛불'이랍니다. 웃기지요. 맑스가 촛불하고 무슨 상관일까요? 촛불이 한창일 때 어떤 자들이 신문에 나와 광장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스승은 레닌이라고 우겨대는 것을 봤습니다. 웃기려면 무슨 짓을 못합니까?
우리말에선 단 한 가지 지식만 갖고 단 한 방향만 보고 미친 듯이 달리는 자를 '토시목'이라고 한답니다. 말머리에다 옆을 못 보도록 가리개를 씌어 놓은 거지요. 맑스 아니면 밥도 못 먹고 어떤 의미에서는 맑스 짝퉁 노릇을 하는 질 들뢰즈만 찾는 이들이 그래도 좌파랍시고 촛불 뒷장단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석좌로 있는 대학에서 '줕탁을 생각한다'는 나의 첫 촛불 이야기를 쟁점토론의 발제로 제기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지식인이 그 전 여러 차례 내가 어불성설이라고 만류했음에도 터무니 없는 상호연결고리를 걸어 견강부회 일변도로 질 들뢰즈의 68년 프랑스 5월 혁명론에 가져다 붙이는 걸 쓴 웃음으로 뒷날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논평을 뒤에 읽었다는 말입니다.
순수한 억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떤 대학에서는 '맑시즘-촛불'이라는 공개적 행사까지 기획하더군요. 왜 이럴까요? 그런 억지들하고 지난 5월 그리고 7월 초의 그 촛불은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맑스는 물론이고 들뢰즈와 무슨 관계입니까? 레닌과 어떻게 비교를 합니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압니다. 새로운 생각, 제 민족 속에서 시작된 후천개벽 '기위친정'의 '십일일언' '십오일언'과 '화백'과 '풍류' '신시'의 새로운 르네상스에는 다른 한 치도 생각이 못 미치고 낡아빠진 남의 이야기로 견강부회하는 이 따위 집단지성 왜곡사태를 똑같지는 않지만 이미 수운 선생 당시에 경험한 바 있어 '흥비가(興比歌)' 안에서 누누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수운은 거기에서 그 원인을 '비흥(比興)'에서 찾습니다. '비흥'은 예컨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후천개벽 이야기나 아득한 옛 개벽의 새로운 부활이야기를 당대의 통용화폐인 공자맹자를 들어 설명하려 들 때에 '오비이락(烏飛梨落)' 즉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격으로 우연한 일치로 인해 남의 혐의를 받게 되는 결과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촛불만 켜면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비흥(比興). 예컨대 맑시즘이나 들뢰즈를 들어 촛불을 설명하려들 경우, 듣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첫째는 '아! 촛불은 정권탈취가 목적이구나!' 라고 판단한 뒤 '아니, 우리가 왜 이렇게 늦게 만났지요? 이젠 쉬세요. 내가 뒷감당 다 할게요!' 그리고는 자기가 촛불을 계속 켜고는 제 나팔만 부는 경우!
둘째는 속으로 '으흠!' 저 놈을 정부에 고발하면 상금도 받고 출세도 하겠구나!' 하고 슬그머니 경찰서나 백골단이나 청와대로 직행하는 경우! 그래서 수운은 이 때 그 방법을 '비흥'에서 '흥비(興比)'로 뒤집어 버립니다.
비록 얼른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개벽의 일이나 희망, 그리고 아득한 고대의 신시 즉 호혜사랑이나 화백, 즉 이상적인 직접 중심의 대의 민주주의 무위정치(無爲政治) 그리고 풍류, 즉 생명과 평화의 촛불문화, 네트워크 소통문화를 '흥(興)' 즉 그야말로 서정 중심의 춤과 노래와 시로서 설명해 나가는 새로운 비유법, 새로운 논리, 새로운 철학을 찾아내가는 창조적 과정을 감히 시작할 때 비로소 참다운 '기위친정' 즉 '나로 무궁 울도 무궁'의 인간도 개벽하고 우주도 개벽하는 참다운 전환이 도래한다고 했습니다. 우선 지금의 촛불을 비판하고 국면전환을 시도해야합니다. 그 대안은? 수운시를 읽어봅시다.
'맑은 바람이 늦고 늦음이여
도연명이 지난 잘못을 뉘우치네.
푸른 강물이 드넓고 드넓음이여
소동파가 나그네들과 생명노래를 부른다네
(淸風之徐徐兮 五柳先生·覺非 淸江之浩浩兮 蘇子與客風流)'
맑은 바람은 후천개벽이니 참다운 문명전환이 자꾸만 늦어지는 까닭을 그 개벽과 전환의 주인인 도연명 즉 촛불자신이 발견하고 크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맑시즘-촛불'따위들입니다.
그 대안은 그럼 무엇일까요?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제 자신이 새 시대의 포접(包接)으로 생명운동(風流)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했으니 '소쿠리 메고 품앗이 간다'로 압축한 바로 그 이야기였습니다. 촛불의 주인공인 어린이, 청소년, 여성과 쓸쓸한 대중인 소동파가 후천개벽운동이라는 그 넓고 넓은 새 적벽강의 미지의 영역 위에서 나그네(客) 즉, 새 촛불을 켰던 여러 종교계, 지성계의 양심적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연대-包含三敎의 소쿠리-포) 생활, 생명운동(풍류는 생명운동 - 接化群生, 품앗이, 접)을 통한 문명전환을 시도해야 한다는 이야기올시다.
이것이 다름 아닌 '흥비'입니다. 그럼 '비(比)'가 가진 가치는 무엇일까요? 아예 없습니까? 쉬어빠진 떡입니까? 내버려야 할까요?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태극처럼 전통적 고전의 품위를 지닌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근대는 완전히 가진 않았으니 약간은 필요한 참고사항 정도겠지요.
후천개벽. 네오 르네상스와 전세계 문화대혁명의 쌍방향 통행, 신시, 화백, 풍류로 가는 촛불의 길, 좌우협동의 생명평화의 길에 필요한 만큼 '인마이 포켓(in my pocket)'하면 되는 거겠지요 뭘!
허나 그 정도가 넘치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동학 천도교의 현대사의 굴곡 속에 이런 경험은 많고 많습니다. '아니다, 그렇다'와 포접, 육임제, 1894년 전주 화약 이후의 집강소 중심의 닫힘과 열림의 역사, 신구파 투쟁,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나는' 격동의 의미망과 법칙성을 한 번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동학이 거대한 교류 문명사 전체의 대전환과 함께 생활, 생태, 생명의 구체적 일상적 활동이었다는 점. 이 양 측면의 상호 협동 운동이었다는 점. 이제부터의 참 촛불이 지향해야 할 바로 그 방향성을 자기 본질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배운 게 있다는 점 같은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역시 중요한 것은 바로 동학과 촛불의 바로 그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새 시대 개벽의 '흥(興)'을 좀더 자기 공부, 자기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수운 선생의 시에서 개벽진리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길 정도를 찾는 공부입니다. 동학공부의 원칙은 '스승이 내 안에 계신다(自在淵源)'올시다. 만해 스님의 시 구절 '가슴에 만권의 책이 있다(胞中万卷書)'와 비슷합니다.
자기 공부는 중요합니다. 현대인은 이것을 잊었습니다. 가까운 스승 놔두고 자꾸만 먼 데서 찾습니다. 현대 한국 역사는 미쳤습니다. 완전히 극좌로 가울든가 완전히 극우로 기울어 역사가 근본에서 무엇인지를 잊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하물며 후천개벽사 같은 것을 생각하는 자조차 없습니다.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 부르고 4월 19일은 학생운동에 불과하며 5.16 군사정변은 위대한 혁명이라고 풍을 칩니다. 북한의 김일성사 역시 조라방정 풍치는 선무당 굿판임엔 다름이 없습니다. 4.19가 무엇입니까? 나는 바로 4.19 세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촛불과 가장 가까운 변혁 사태는 4.19 혁명 같습니다.
오늘날 사방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민주화, 산업화가 그 때 시작된 것입니다. 5.16 산업화의 기본골격이 이미 4.19 직후 세워졌고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길을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4월과 5월 그 이후에 있습니다.
'잘살아보자'를 외치며 군인들이 총과 장갑차를 앞세우고 대학 캠퍼스를 점령했을 때 그 대학에서 거의 전면 서구화돼 있는 커리큘럼을 배우고 있던 내 또래 친구들이 깊이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잘 살건 살아야 하지만 저건 아니다! 저거 말고 지난 4월에 우리가 한 건 무엇이었을까?'
즉 우리 세대 자신이 해낸 4.19 혁명의 잠재적인 역사적 의미에 대한 참다운 자기 공부의 시작입니다. 서울 문리대, 법대, 상대에서 소 써클의 4월 공부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창조, 민족문화운동, 다수 민중을 위한 사회개혁 세 가지였습니다.
4.19 혁명의 참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까지도 지속된 60년 현대사의 진짜 출발이었으니까요. 최근 산업화, 민주화 다음의 국가목표는 선진화라고 떠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그것은 거의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고 참으로 범박한 구미 역사 짝퉁의 삼진법(혹은 좌파의 변증법) 늘어놓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역사 이야기 자세히 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이런 주장하는 사람들, 참 세계사, 참 한국사 전혀 공부 제대로 안한 사람들입니다. 역사, 더 정확하게는 일체 생성은 삼진법이나 변증법이 아니올시다. 그것은 외삽법(外揷法)에 불과하고 진짜는 '생극(生克-상생, 상극)'과 숨은 차원에서 드러나 올라오는 복승(複勝)의 교차관계, 이것이 생명사입니다.
조국이 가져야 할 참다운 힘은 높은 문화력이라는 눈물겨운 말씀을 남긴 저 소박한 백범의 비전만도 못합니다. 선진화란 결국 또 하나의 짝퉁(가짜 만들기)이나 '캐치 업(catch-up-서양 따라잡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탈근대, 대혼돈, 문명의 중심이동, 동풍(East Turning)의 시점에 '캐치 업'이라니!
누구 말마따나 북한은 '주체중독(이것도 틀린 말입니다만)'에 걸리고 남한은 '타자중독(이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인지요? 4.19 경험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4.19 혁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참 역사의 높은 대전환의 수준, 그래서 내가 감히 '개벽'이라고 이름 붙인 '촛불'은 '촛불자신 공부'를 이제 정말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이고 무엇을 고민했고 어떤 대화를 통해 합의에 도달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했으며 세상은 여러분에게 어찌했고 또 앞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희망하고 어찌할 것인지요? 세상은 어찌 어찌 변해야 하는 건지요? 인간의 속마음과 목숨이나 소통, 생활, 가정과 사회요 민족만 아니라 인류 나아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를 포함한 소지구와 우주, 그리고그 영과 생명과 존재는 어찌해야 하는지? 또 무엇무엇을 극복해야 할 것이고 누구와 누구가 더욱 친해져야 할 것인지? 어떻게 창조하며 어떻게 명상하며 어떻게 즐길 것인지? 참으로 그 누구를 사랑할 것인지? 그 누가 당신 마음의 가장 큰 아픔인지? 세상의 그 어떤 어둠이 제일 큰 불행인지?
수운시로부터 지금 나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7월 19일 원고 이외에 나의 강의 녹취본을 놓고 발단은 거기 있습니다만 시와 함께 나도 내 마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공부를 하십시오. 다만 내 말과 글이 수운시와 함께 약간의 불쏘시개 노릇을 한다면 그것으로 대만족이겠습니다. 나는 나대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 평소에 하기 힘든 독특한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요.
촛불에 대한 세계인, 단순한 외국인이 아닌 글로벌한 인류의 삶과 인권에 관한 전세계 차원의 객관적 관찰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의 촛불관은 여러분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앰네스티 조사관 '노마 강 무이코'란 사람의 말을 들어봅시다.
'명백한 지도자는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하게 자발적으로, 그럼에도 서로 유기적으로 점차 성장 확대되는 새로운 민중의 힘의 폭발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나 조직의 통제 없이 자발적으로 다양하게 점차 성장하는 민중의 힘이었다는 점이올시다. 지도자가 없다면 무엇이 그 방향성을 결정하는가? 이미 2002년 붉은 악마 때 셔츠의 패션이 천태만상으로 제 각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한 가지 붉은빛이었던 아주 쉬운 예가 생각납니다.
수운시에
'쪼각쪼각 흩날리고 흩날림이여
붉은 꽃들의 붉음이로다'
(片片飛飛兮 紅花之紅耶)
현대 진화론의 저 유명한 생활 생명진화원리인 '개체-융합(identity-fusion)'이 떠오릅니다. 여러분 세대는, 여성들은 개체를 무시하는 전체니 공동체니 협동단결을 말하면 바로 달아나버립니다. 필연적입니다. 이젠 개체를 중심으로 한 융합만이 먹힙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신의 세대를 '방콕의 네트워크'니 '밀실의 연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희망의 눈동자였던 몬드래곤, 기브츠, 야마기씨 공동체들이 다 끝났고 개체의 차별성을 전제한 '모샤브' 같은 협동만이 잘 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이기도 한데 옛 다윈주의 진화론의 집체중심의 조직화와는 완전 반대입니다. 동학에서는 이것을 '각지불이(各知不移)'라고 하여 '서로 다르면서 그 전체적 융합성을 각자각자 개체 나름나름으로 인식하고 실현함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이 글 서두에 제시했던 수운시 '밝고 밝은 이 후천개벽, 대문명사전환의 운수를 각각 자기 나름나름으로 밝혀라(明明其運 各各明)'에 그대로 연속됩니다.
동학당은 아닙니다만 같은 시대의 출중한 기철학(氣哲學)의 명인이었던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는 이 경우 인간 개체의 우주 공부 즉 일신운화(一身運化) 다음엔 주변 사람과의 자기조직화(運化))에 의한 소그룹 소통망 구성을 강조했는데(물론 이것은 사회적 공공성 즉 천하공심(天下公心)에 따른 새로운 사랑의 정치인 인정(仁政)의 통민운화(統民運化)와 우주적 공공성 즉 천지공심(天地公心)에 입각한 근본적인 생태 정치인 대기운화(大氣運化)로 확장됩니다만) 바로 이 소그룹 소통망이 아까 현대진화론에서 말하는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의 그 '분권'이겠습니다.
이것이 현대 생물학적 원리가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내부공생(內部共生, endo-symbiosis)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경제 사회적으로는 호혜(互惠, reciprocity)'올시다. 또 이 호혜가 바로 우리 사회적 삶의 전통에서는 '계(契)'나 '품앗이'이고 동학에서는 '접(接-接化群生)'이지요. 그리고 이 생활연관을 중심으로 교환과 획기적 재분배망으로 발전한 것이 고대의 '신시(神市)'올시다.
아시다시피 '계'는 한 사람의 목돈 마련을 위해 여럿이 전반적으로 돌아가며 공동저축을 하는 개체-융합의 경제생활이고 '품앗이'는 한 집의 농사를 온 동네가 달려들어 한꺼번에 마쳐주면서 돌아가는 일 방식으로서 개체성과 다양성과 융합성이 전제된 상호혜택의 사랑의 경제인 것입니다.
무이코는 촛불에서 바로 그런 생명원리를 본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하게 자발적으로 그러면서도 유기적으로'란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수천만 가지 개성이 서로 다른 패션들에도 불구하고 붉은색 한 가지 셔츠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온갖 대화, 잦은 논쟁, 다양한 쌍방향 소통에 의해 합의되는 이른바 '집단지성' 아닐런지요?
이야기가 쉬워졌지요? 이것이 파씨즘의 획일성과 같은 건가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도 아니어야만 합니다. 인간끼리, 누리꾼끼리, 촛불들끼리만 그리하고 산천이나 골짜기나 소나무 잣나무, 가지가지 잎새잎새들은 마치 여러분이 그처럼 반대했던 대운하 토목공사에서처럼 그 다양한 생명, 생명의 그 나름나름의 빛을 모조리 깔아뭉개는 것을 모른 체하고 용납, 묵언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우리는 여러분은 인간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의 생명의 본성 역시 그 다양성과 그 순환성과 그 관계성과 그 영성을 하늘같이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 풍류 생명의 '접화군생'입니다. 모시기 위해선 우리는 친해져야 합니다. 수운시올시다.
'모퉁이 모퉁이 골짜기 골짜기 걷고 걷고 또 걷는다. 물과 물, 산과 산 하나하나 낱개낱개 다 마음에 깨닫는다. 소나무 소나무 참나무 참나무 푸르게 새푸르게 우뚝우뚝 솟았고, 가지가지 잎새잎새 만 가지 수만 가지 매듭매듭이 빛이 난다.
(坊坊曲曲行行進 水水山山箇箇知 松松栢栢靑靑立 枝枝葉葉萬萬節)
이런 숱한 다양성이 이런 상호 순환성과 가지가지 관계성으로 서로서로 얽히고 빛과 빛을 발하며 음기성으로 연결되고 영성을 드러내는 대장관, 이른바 불교의 '대화엄', 기독교의 '만물해방', 그리고 동학의 '만사지(万事知)'의 체험을 여러분도 평소에 축적을 해야합니다.
여행. 자연 속의 걷기 여행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때 그 다양성, 자발성, 순환성과 관계성의 유기성과 영성으로부터 점차 질적으로 성장하고 그 정신적 차원이 높아지는 새로운 민중의 힘의 폭발이 나타난다고 앰네스티, 그 세계인권관찰의 날카로운 눈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수운시 올시다.
'만 개의 골짜기 천 개의 봉우리 높고도 드높음이여
한 번 오르고 두 번 오르며 조금씩 조금씩 시를 읖조리노라
(萬壑千峰高高兮 一登二登小小吟)
현 정부는 그러나 무이코 씨를 무식하게도 괄시하고 박해했습니다. 미국과 서방세계 온 동네에서 찬밥 먹는 부시에게 별 개똥같은 아첨을 다 떨며 마치 저희 상전처럼 떠받는 자들이, 만약 이 땅이 미국의 식민지가 아닌 바에야 저희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 오직 '글로발리제이션' '세계화'뿐일 터인데 유엔 기구나 별 다름 없는 글로벌 기관을 그렇게 괄시 박해함은 참으로 얼빠진 촌놈 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박정희 시절 내내 박해 밑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앰네스티 사람들을 잘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지금 정부는 박정희 정부 따라가려면 족탈불급입니다. 국제 관행에 있어서 진보는 못해도 최소한 퇴보는 안 해야지요. 세계화 시대라면서요? 자유주의 뉴라이트, 기독교라면서요? 뭐하는 인사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앰네스티 조사관을 무슨 외국 삼류 언론사의 그 흔한 기자쯤으로 취급하는 자칭 좌파 운동권 인사들이 있습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역시 순 촌놈들이올시다. 모셔야 합니다. 깍듯이!
나는 잘 압니다. 한국 민주주의운동에 관한 그들의 보고서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전 세계를 보는 광활한 안목 위에 그들 전문가 나름의 날카로운 가치평가가 있어 그들이 진화하고 있는 전 세계 나름의 복합적인 진보성, 문명사적 참신성에 대한 강렬한 칭송과 존경심이 보고서 저변에 배어있었음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어서 그들의 평가가 결코 허랑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무이코 한 개인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보는 세계의 눈이올시다.
'다양하고 자발적인 평화적인 신 개념의 집회다. 신 개념의 군중행동이다'
그들은 이런 평가의 어사를 잘 안 씁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깍쟁이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할 것입니까? 아마추어 감각 가지고 열광 가지고 실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이 세계에 모든 국가와 국가들 안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냉혹한 세계이고 따라서 그들도 냉정합니다. 그 냉정한 프로페셔널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개념' 이것입니다. 그들은 범박한 사회혁명이 아닌 자기들은 아직 잘 모르는 그것도 신비 속에 감추어진 그렇지만 서양을 잘 알면서도 서양과는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는 동아시아의 바로 그것.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오리라고 막연히 예감하고는 있는, 우리가 지금 개벽이나 후천개벽이라고 부르고 있는 생명, 평화에 의한 생활개혁과 전문명사 대전환의 경건한 모심의 행동, 촛불 나름의 독특한 신령한 리얼리즘의 정치적 상상력 앞에서 저윽히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바로 이 신개념의 집단행동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가요? 무이코 등 세계인들, 그것도 인권 및 행동의 전문가들 눈에 가슴에 나타난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 촛불은 그들이 사는 곳, 그들이 생각하고 그들이 관찰하고 그들이 보고해야 하는 세계와 지구와 인간들의 모든 고통과 희망과 모순과 외침이, 그리고 춤과 노래와 풍자와 자발성, 다양성과 비폭력 정치 항의가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미래의 도시와 미래의 농촌들 속에로 서서히 퍼져 나가 그들 나름나름으로 손에손에 켜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첫 포괄적 인식이 바로 이 같은 신개념 행동의 이미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설은 그 다음이지요. 수운시입니다.
'누각에 오른 사람 모습이 학을 탄 신선 같고
배에 탄 말 모습이 하늘 위의 용과 같다'
(登樓人如鶴背仙 泛舟馬若天上龍)
나는 여러 차례 이런 이미지를 '신령한 리얼리즘'이나 '초월적 중력'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분명 사회적 문화혁명인데도 오히려 혁명같지 않고 우주적 개벽같은 것. 먹거리, 생활, 생태, 생명, 건강, 교육, 생계 등 가장 기초적인 일상성의 사회적 공공성의 영역인데도 영과 심층 무의식과 지구생태계와 신화적 세계와 우주적 상상력에 연속되는 초월성의 우주적 공공성의 차원이 함께 전개되는 그런 파천황의 행동세계를 압축한 이미지인 것입니다.
바로 이 이미지가 오늘 이후 세계인들의 뇌리에 미래세계의 포괄적 희망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들이여! 동학도 천교도도 후천개벽운동도 김지하도 어떤 걸림돌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해 숨었고 때가 분명 왔음에도 다시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촛불들이여!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제 화안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다 똑똑히 보다 깊이까지 철저히 인식하기 위해 다음의 수운시를 조용히 묵상하고 또 가능하면 외워서 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수운시올시다.
'만리에 흰 눈이 펄펄 내림이여
천 개의 산 돌아가는 새들 날고 날다가 끊어졌구나
동쪽산이 오르고 싶은 마음 밝고도 밝음이여
서쪽 봉우리는 어찌하여 길을 막고 또 막는고'
萬里白雪紛紛兮
千山歸鳥飛飛絶
東山欲登明明兮
西峰何事遮遮路
동쪽산이 무엇이며 서쪽 봉우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편견 없이 드넓은 마음으로 그러나 현대적인 세계 문명사 변동을 날카롭게 인식하는 현실주의자답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 느낌인데 촛불 여러분은 지금의 인터넷, 그 디지털 네트워크 시스템에 대한 상당한 만족감에 젖어 있는 듯합니다.
물론 훌륭한 문명의 이기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소통에서 꽃이 핀다면 그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또는 동서에 이루어져야 할 내면의 깨달음에도 별이 떠야하지 않는지요? 그 별은 언제 뜰 것인가요? 신경 컴퓨터가 이미 나왔으니 이제 신령 컴퓨터만 나오면 만사 해결인가요? 참으로 그런가요? 신령 컴퓨터는 참으로 가능한가요?
나 역시 그리 과문한 사람은 아닙니다. 신경 컴퓨터 문제에서도 역시 어려움이 따랐지만 신령 컴퓨터의 실제 개척으로 나아갈 때는 아주 심오한 뇌과학적 발견이 토대를 이루어야 할 것이라는데 그 발견은 사실 누리꾼 여러분 자신의 소통과정 자체에서 내면에 푸른별이 무수히 무수히 떠올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내내 듣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진화과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현단계 오메가 포인트에 근접한 우주진화사는 뇌를 통과하는 화살이라고 표현하고 사이버네틱스의 놀라운 발달과 컴퓨터 발명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오늘의 촛불은 그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뇌과학 관련 전 과정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불교의 참선법(參禪法)의 원리, 유식학(唯識學), 중관론(中觀論)의 마음과 깨달음에 관한 이론들을 어찌할 건가요?
뇌생리학, 생태학, 생물학 심지어 최근에는 물리학에서까지 나타나는 마음의 극이동(極移動) 즉 '아니다, 그렇다(no-yes)'라는 생명논리와 숨고 드러나는 영성의 동양적 인식 방법 사이의 놀라운 접근과 일치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실제로 그럴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현 수준의 컴퓨터 기능에 만세 부르는 것, 그것, 문제 없을까요? 한술 더 떠서 어떤 젊은이들은 바로 이 같은 컴퓨터 기능을 미래정치의 이념으로까지 부풀리는 것은 보았습니다. 그것은 옳을까요? 그것을 잊지 맙시다. 도구올시다 도구.
물론 여러 번 애는 써봤지만 난 아직도 컴맹입니다. 컴맹이지만 싸이버 맹인은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 내 스타일로 네트워킹에 애는 씁니다만 컴맹이라서만 그게 가능한 걸까요?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다만. 이것. 바로 이러한 문제제기 근처에 동쪽 산과 서쪽 봉우리 사이의 막힌 관계를 전향적으로 풀 수 있는 한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그러나 끊임없는 격렬한 쌍방향 통행, 일본과 유럽, 심지어 미국에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한국인 특유의 그 창의적인 적극 소통을 감행하여 드디어는 그야말로 어느 누구가 아닌 집단지성에 의해 광장의 어느 누구가 아닌 집단지성에 의해 광장의 화백 민주주의 그 아름다운 촛불 문화 혁명으로까지 확장된 여러분의 영적(靈的), 기적(氣的)인 큰 가능성을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땅에서 대망의 후천개벽, 그 놀라운 문명, 문화의 대차원 변화가 오리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수운시올시다.
'연꽃이 거꾸로 물에 비취면 고기가 나비되고 고기가 변하여 용을 이루어야 할 때 연못 속에 바로 그 고기가 있다네'
(蓮花倒水魚爲蝶 魚變成龍潭有魚)
자부심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공부합시다. 무슨 공부? 자기 공부! 자기가 해온 이 몇 달간의 확인! 우선 그것부터 하시고 불교나 동양공부, 동서양 종합하는 동학 공부로 나아가야겠지요.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수운시올시다.
'하루에 한 꽃 피고
이틀에 두 꽃 피고
삼백육십일 삼백육십 꽃 피어
만년 생명 진화 나무에 천 떨기 꽃이 피네'
(一日一花開 二日二花開 三百六十日 三百六十開 萬年枝上花千朶)
저 유명한 진화 과학자 떼이야르 가라사대 지금 우주생명의 진화는 최종점. 오메가 포인트에 이르렀는데 그 오메가 포인트는 바로 전지구 신경망 즉 영권(靈圈, noosphere)이 정신적 행성으로 질적 비약을 일으켜 마치 묵시록 마지막의 예루살렘 하강처럼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는 것으로 그 오메가 포인트의 상징이 지난 수억 천만 우주 진화의 기본 패턴이 되어온 배흘림(entasis)이라는 수렴적 종말의 귀결인 단 한 송이의 거대한 흰 꽃이라고 표현합니다. 단 한 송이의 흰 꽃.
그 꽃이 곧 예루살렘인데 그것이 바로 묵시록에 나타난 선택된 사람들 12만 몇 천 명이라는 겁니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나무도 흙이고 물이고 간에 그 나머지는 모두 엔트로피 최고 증대로 인해 지구 물질의 대붕괴와 함께 해체돼 버린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러브릭의 가이아 복수설이나 스티븐 호킹의 지구탈출설이 생각납니다. 아름다우세요? 수운시에 나왔던 서쪽 봉우리가 자꾸만 가로막는다는 말의 참뜻이 이것입니다. 서구 문명사 비전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여기에 비해 수운시의 꽃, 그 만년 생명진화 나무에 피는 천 떨기 꽃은 어떤가요? 온갖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 쓸쓸한 대중같은 소외된 사람들과 못난 민족들, 못난 짐들승과 못나 나무들, 풀들, 물, 흙, 바람과 공기를 포함한 수많은 꽃들이 다 함께 피어나는 그 오메가 포이트, 동학 진화론에서는 '지화점(至化点)'입니다만 어떻습니까? 흉합니까?
못난 것들과 함께 가기 싫어요? 이것이 동쪽 산 오르기(東山欲登)입니다. 진화의 비전이 이렇게 차이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 미워하자는 얘기가 아니지요? 배울 건 배우고 모실 건 모시고 존중할 건 존중해야지요 그러나 선택된 사람만 아니라 다 함께 가자는 거 아닌가요? 틀렸나요?
이것이 다름 아닌 불교 최고 최대의 우주 대해방의 비전입니다. 화엄경(華嚴經)입니다. '화엄'은 꽃피는 이야기올시다. 우주는 그물망, 똑 디지털네트워크 같은 거대한 그물망 안에 그 그물코마다 수만 수십 수백만 수천만만의 보살들이 다 저마다 다 개성이 다른, 그러나 똑같은 우주의 근본질서의 꽃들을 피어올리는 이야기올시다.
만년 생명 진화 나무에 천 떨기 꽃이 핀다는 말이 다름 아닌 '대화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지극한 거룩함' '至聖'이니 '무극(無極)'이요 '무궁(無窮)'이며 성경에도 나와 있는 '만물해방'이자 동학의 '만사지(萬事知)의 대개벽'입니다.
최근에 제가 적이 놀란 일이 하나 있어요. 촛불 세대의 인터넷 도사 한 사람이 화엄경을 서점에서 열심히 찾고 있었던 광경입니다. 촛불과 인터넷과 화엄경. 인류는, 세계는 분명 문명사의 대차원 변화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화엄개벽'입니다.
수운은 이 비전을 가르쳐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에 이르르고 구악의 봄이 돌아와 한 세상이 꽃이로구나(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回一世花)'라고 했습니다.
역시 또 '꽃 이야기' '화엄'입니다. '화엄개벽'은 그 무수한 무수한 각양각색 '꽃 세상의 열림'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소통과 과학에서는 신경컴퓨터에 이어 신령컴퓨터 단계이겠지요? 여러분이 이젠 도리어 그 차원변화를 촉발하고 스스로 시작해야 되겠지요? 미국에서 신경 컴퓨터를 개발한 두 젊은 과학자 모두 한국 청년들인 것 맞지요? 이런 얘기 한다고 천박한 국수주의 꼴통되는 것 아니지요?
자! 민족문제 나왔습니다. 꽃 얘기 많이 했으니 별 얘기 할 때도 되었군요. 민족 통일 어떻게 할 건가요? 촛불은 민족통일에 관심없나요? 촛불은 극우 극좌를 다 좋아 안하는 중도(中道)라는 걸 난 압니다. 일제 강점 이후, 해방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좌우익 갈등 사이에서 참다운 생명회복과 평화통일 무장하던 중도론자들 다 깨졌습니다. 그것도 참혹하게. 무자비하게 피투성이로 남북좌우 양족 사이에서!
그러나 중도야 말로 참다운 생명과 평화의 길이요 참다운 원만(圓滿), 참다운 '대화엄'의 길이랍니다. 그 길의 제 1 기초 조건이니까요.
수운의 마지막 시 한 번 봅시다.
'남쪽 별자리 원만해야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
(南辰圓滿 北河回)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은 이제까지 제자리가 아닌 자리에 기울어져 있다가 제 본래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돌아옴도 되겠지만 우주 진화사 전체의 천문 변화에서 볼 때 이 글 앞부분에 제기한 개벽적 대변동에 따른 '기위친정(己位親政)'과 바로 관계됩니다. 북극은 우주 정치의 중심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꼭 북한이나 북조선 당국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큰 차원에서 보면 북한과 북방을 포괄적으로 가리키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그 들어올 제자리가 맑시즘 같은 덧없는 시대경륜이나 주체 같은 한시적 자기 보호주장이 아닌 그야말로 전 우주적 문명사 대전환 후천개벽의 길이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북(北)이 무엇입니까? 스티븐 호킹은 지구의 북극이 물과 생명의 탄생지라고 합니다. 동양의 역(曆)과 역(易)에서는 지구만이 아닌 우주 중앙이고 혼돈이고 여성성, 모성이고 검은 구명이며 그늘입니다. 그 북쪽 은하수(北河)는 곧 우주정치의 중심입니다. 그 밖엔 나는 모릅니다.
문제는 그 조건을 남쪽에서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남쪽은 무엇입니까? 역시 역(易)에서는 빛입니다. 그 빛이 그늘을? 어떻게? 별. 그 별이 문제입니다. 별은 눈부신 흰 빛입니다. 남쪽 별의 원만 성취가 조건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것이 촛불 여러분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 글 전체의 문맥과의 관계에서 한 번 검토하시길 바랍니다.
하긴 분명한 것은 북미 관계나 육자 회담, 동북아 집단 안보평화회의 추진 문제나 동아시아, 태평양 신문명 성립의 대세, 세계 중심이 대서양 로테르담 허브로부터 동아시아 태평양의 동로테르담인 한반도 허브로 대이동하는 현실, 더욱이 우주사, 지구사, 세계사 초유의 기위친정 움직임인 촛불의 등장으로 보아 이 시구절의 메시지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진실입니다.
나의 미학 클리셰로서는 '흰 그늘'입니다만 우주와 지구와 역사의 대변동이 하필 미학이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봐서는 남쪽 이니시어티브는 불문가지(不問可知), 묻지 않아도 뻔한 상식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조금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미안하게도 묻는 나는 잘 모릅니다. 공부합시다. 자기공부부터. 그리고 실천합시다. 여러 가지 생활적 실천. 이미 자기 공부 제안도 했고 수운시 여러 편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민족적 우주개벽사상사 전통 안에 있는 촛불의 역사적, 신비적 의미를 이야기했으며 그리하여 개벽운동이 머지않은 날 불교의 가장 광활하고 심오하며 거대한 우주적 해방사상인 화엄경과 결합하여 마침내는 '화엄개벽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상과 확신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심', '한울님 모심'이라는 동학 최고의 윤리와 실천 강령이 곧 현대 세계 대혼돈에 대한 최적의 선공부(禪工夫)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미 예상하시겠지만 사이버네틱스의 성큼성큼한 발전은 컴퓨터 기능의 눈부신 차원 변화와 함께 필연적으로 우리의 화염개벽과 결합하게 됩니다. 올해 10월 말 LA에서 헐리웃의 몇몇 메이저 영화사와 UCLA 엔터테인먼트 아트학과는 합동으로 헐리웃 기술 및 생산체계의 디지털 매체 혁명을 촉발하는 자리에서 한국 컨퍼런스를 개최합니다.
동서융합에 의한 새로운 문화, 문명사 창조 모색의 한 길일 것입니다만 한국이 IT 강국이란 점과 동아시아 신화망을 비롯한 콘텐츠 왕국이란 점 때문이겠습니다. 헐리웃의 최근 불황 타개와 포스트 한류의 충격력을 결합하려는 것인데 제 생각엔 한국 쪽에서 촛불과 화엄개벽의 테마를 들고 갔으면 합니다. 이 회의의 기조연설을 불초 본인이 하게 됩니다.
또 하나. 생명 평화의 화엄개벽은 구체적으로 먹거리와 생활, 생태, 생명가치의 개혁운동으로부터 호혜, 교환, 재분배를 현대적으로 재결합하는 호혜 경제운동, 즉 '신시(神市)'라는 '아시아 호혜 시장 운동'으로 확대 연결되어야 합니다.
물론 유기농 먹거리는 일차적으로 교역 품목이 아니지만 그 밖의 수많은 물류와 그에 관련된 아시아와 전 세계 민중 및 시민의 생명운동 호혜망(互惠網) 구축은 사실 현대에 있어 전 인류의 요청입니다 역시 올해 11월 초 일본 후 일본 후꾸오까에서 그 아시아 및 세계 대회가 열리는데 또한 불초 본인이 그 기조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미 촛불에서 제기된 쇠고기를 비롯한 물, 대운하 등 생태, 건강, 교육 관련의 생명운동 아젠다를 국제적으로 확대연결시키는 문제영역일 것입니다. 화엄 개벽의 실천과 모심 공부가 다름 아닌 촛불의 연속이고 그 영적, 우주적 확장임을 여러분 스스로 차차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처음 이 글과 말의 제목 밑에 내세웠던 실천 원리 '밝고 밝은 후천개벽의 운수를 각자 각자 제 나름나름으로 밝혀 실천할 것(明明其運 各各明)'과 함께 그 공부방법으로서 '같고 같은 진리의 맛이 공부하고 공부할수록 더욱 더 똑같아진다(同同學味念念同)'의 원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면서 여러분 앞에 삼가 나의 조그만 촛불 하나를 켜 정중히 모시는 바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8년 8월 16일
일산 노루목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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