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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과 일원상(一圓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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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마당과 일원상(一圓相)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다음 글은 필자가 지난 9월 9일 원불교 은덕문화원에서 행한 소태산 아카데미 제2기 개강 기념 특강 전문이다. 편집자
  
  소태산 아카데미에 관하여
  
  촛불에서 한 여름 이전까지 원불교 서울대 교구 은덕 문화원은 소태산 아카데미 연속 강좌를 열고 원불교 문화 운동을 펼쳐왔다.
  
  소태산 사상과 원불교 교리를 교회 바깥의 여러 층위의 학문들과 비교 검토해 그 접근점을 찾아내고 가능한 한 그 사이 사이의 협조· 연대 · 융합 등을 모색하는 전체적 방향성 아래 상당한 성과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9월부터 시작되는 2기 아카데미 역시 이 같은 방향성은 원칙적으로 계속 유지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6월, 7월, 8월에 이르도록 우리 사회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태풍에 비유될만한 대사태가 연속되었다. 이 사태는 종교계, 지식사회와 시민운동 일반, 그리고 정부와 여야 정당, 언론계와 문화계, 경제계 등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문제점들을 계속 던져주고 있고 그 파랑이 전 국민 속에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혁명에 가깝다기보다는 개벽에 가까운 것이다.
  
  비록 현 정부에 대한 항의나 비판을 중심으로 한 직접 민주주의 행태라는 점에서 과거에 흔히 있었던 시위나 파업의 한 계열로 보고 그냥 넘어가 버리기 십상이지만 전혀 그와는 다르다는 것이 안목 있는 깊은 성찰자들의 평가다.
  
  크게 보아 약 여덟 가지 특징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첫째, 대의 민주주의나 대통령제의 기존 체제를 압도하는 직접 민주주의 열풍을 타고 국회나 대통령 통치권 자체를 수정하려는 압력까지 보이고 있다.
  
  둘째, 이제껏 정치 일반에서 치지도외시되어 왔던 일상생활의 가치들, 먹을거리, 물, 건강, 생명, 교육, 그리고 주변 생태계 파괴 등의 생명성이 날카로운 아젠다로 등장했다.
  
  셋째, '생명과 평화'라는 최근 시민운동의 도덕·문화적 차원의 요구와 비폭력 행동양식이 웅변적으로 현실화되었다.
  
  넷째, 정치와 축제의 공존, 문화와 미디어에의 날카로운 관심, 차이와 다양성, 복잡성, 자발성, 우발성, 창발성, 철저한 개별성과 융합의 공존, 분권적 내부 공생(內部 共生)의 특징들, 끊임없는 토론과 상상력의 범람, 고대적인 집단 풍류인 춤과 노래, 그리고 독특하게는 솥을 걸고 밥을 해 먹거나 음식을 나누는 호혜 시장, 즉 신시의 가능성의 한 행태가 출현했다는 점.
  
  다섯째, 인터넷 소통과정 자체에서부터 일종의 '온라인 화백(和白)'이, 그리고 광장에서는 단상, 단하 사이의 이른바 '팔정사단(八政四檀)' 양식에 가까운 매우 시끄러운 '오프라인 화백'이 시도되었고 그 결과 전원 합의에 의한 집단지성의 방향성 아래 지도부도 조직도 동원체제도 책임자도 없는, 그러나 일사불란한 행동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점.
  
  여섯째, 동서양 전통 사회에선 공통되게 일종의 피보호 소외계층이었던 어린이, 청소년, 여성이 소수의 쓸쓸한 외톨이 대중과 함께 정치의 중앙 전면에 명실공한 주체로서 등장했다는 점. 이것은 19세기 남조 개벽 사상사에서 정역(正易)을 공포한 김일부에 의해 후천개벽기의 한 특징으로 지적된 바 있는 '기위친정(己位親政)' 즉 '이제까지 맨 꼬래비로 천대받던 소외 계층이 정치 중앙의 친정 주체(親政 主體)로 나타나는 현상'을 드러냈다는 점. 이것은 다시 이십대 미만의 어린이, 미성년층과 여성이 정치를 전담하는 '십일일언(十一一言)'과 이제까지의 전문가의 지배층이었던 지식인, 종교인, 기존 정치인은 한 발 물러나 문화와 교육, 제의, 그리고 보완적인 대의 정치의 조용한 감당 따위로 음성적 보필을 한다는 '십오일언(十五一言)'으로 나뉘고 다시 이 두 가지가 그 '일언(一言)'을 매개로 연결되는 고대 '무위정치(無爲政治)' 또는 '태양정치(太陽政治)'의 유사 행태가 나타난다는 점.
  
  일곱째. 평화, 비폭력을 앞세운 첫 촛불과 그들이 저미하게 되는 6월 하순의 좌우 양극단 사이의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마치 참선법이나 기도 명상에서의 단(斷)처럼) 나온 천주고, 불교와 일부 기독교 및 원불교 등 4대 종단 종교인들의 슬기로운 평화적 새 촛불 사이의 역동과 균형, 드러남과 숨음, 열림과 닫음 등 상호 보완성에 의해 인간 영성, 생태계, 문명 전체의 대혼돈에 대응하는 문명사 전체의 대전환과 생활ㆍ생명가치를 추구하는 일상 활동의 이중성을 실천하는 수준 높은 '생명 평화 운동'으로 고양될 가능성이 충분히 주어졌다는 점.
  
  어덟째. 김일부의 정역은 동서고금의 역사, 사회적 차원에서 제일 천대 받던 어린이, 청소년과 여성, 그리고 쓸쓸한 대중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이 문명사 전환인 '기위친정은 동시에 우주사에서도 개벽적 전환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즉 수천 년간 서남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던 (己位, 꼬래비 자리) 지구 자전축이 본래의 자리인 북극 중앙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 정치의 주역 자리를 되찾아 (親政) 임금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후천개벽이라는 것이다. 이때 북극이 해체되고 대 빙산이 녹으며 동토대가 풀리고 남반구 해수면이 상승하며 지진, 해일, 침강, 화산 활동이 강화된다는 주장이다.
  
  촛불이 처음 시작된 2002년 월드컵 때의 700만 붉은 악마의 주역이 사실상 어린이, 청소년, 여성 주부들인데 이 사태 직후인 2004년 지구 자천 축 이동에 의한 대륙판과 해양판 충돌로 인도네시아에서 26만 명이 한꺼번에 죽는 대해일 '쓰나미'가 발생했고 그 직후 북극을 행성하는 지리극(地理極)과 자기극(磁氣極)이 상호 이탈하면서 초과 상승하며 시베리아 동토대 밑의 메탄 층이 폭발해 극지대가 온난화되고 있다. 요컨대 지구 변화는 단순한 이산화탄소 과잉 배출에 의한 온실 가스 문제, 에너지 문제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서양 과학계는 전혀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당분간은 인정을 못하고 질질 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촛불은 사회적 공공 영역과 우주적 공공 영역 양방향의 이중적 문제로서 그야말로 원불교가 제기하는 '일원상 개벽(一圓相 開闢)' 자체의 지기의 숙제요 과제가 되는 셈이다.
  
  소태산 아카데미 제2기 연수의 과제 수행은 따라서 약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소태산 선생 자신의 평소의 소신과 가르침에 따른다 하더라도 이 점은 불가피하다.
  
  우선 제1기 아카데미의 정통적인 강의 흐름을 일부에서 유지하면서도 다음 3가지의 약간은 혼란스러울 정도의 새로운 문화 운동 양식이나 요소를 함게 배합할 수밖에 없다.
  
  여기엔 새삼스럽지만 소태산 사상 자체의 특징과의 필연적 연관을 다시 강조하므로서만 그에 대한 원불교 주최 측의 불필요한 소모적 반론을 미리 봉쇄할 수 있으리라는 기우와 배려가 불가피할 것 같다.
  
  소태산 선생은 그 인품 자체부터가 원만(圓滿)하고 그 사상의 특징 또한 바로 그 원만성(圓滿性)에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일원상 법선불' 자체가 이미 그렇지만 바로 이 '원만'은 요즈음 말로 하자면 생활과 생명 자체의 특징인 혼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그 어지러움을 굳세게 감내하면서도 동시에 서서히 그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혼돈 그 나름의 독특한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혼돈을 멸시하거나 외면해서 산 속이나 절간으로 도망가는 옛 구닥다리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더욱이 한 발 더 나아가 '일원상 법신불'이 비록 모든 세상의 혼돈과 삶의 어려움을 훨씬 뛰어넘어 아득한 초월의 세계에서만 계시되어오는 신비적 경지라고 하자.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경지를 획득하고자 소태산 선생 자신이 공표한 원불교 공공의 실천 방향이 다른 것도 아닌 '개벽'이고 그것마저 수양과 연구 이외에 오히려 가장 힘들여 원불교 나름으로 집중하는 방향인 취사, 즉 생활 생명 운동이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촛불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나타난 여러 어지럽고 대중적인 삶과 실천과 여러 현안 문제들의 혼돈성 자체를 문화라는 명분 아래 일부러 외면하고 의식적으로 정돈된 낡은 이론의 틀 속으로, 구닥다리 교실 강의 일변도로 도피하는 것은 전혀 올바르지 않다.
  
  정면으로 이 문제에 부딪쳐야 할 것이다.
  
  더욱이 소태산 선생 자신이 후천개벽을 배웠다고 공언한 수운 최제우 선생과 강증산 선생은 이와 관련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던가!
  
  최제우 선생의 시구절이다.
  
  '남쪽 별자리 원만해야 북쪽 은하수가 제 자리에 돌아온다.' (南辰圓滿 北河回)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되돌아온다'가 무슨 뜻일까? 김일부가 정역에서 말한 '기위친정'과 같은 말이다. 북극은 우주정치의 중심이다. 그래서 물도 생명도 거기서 발생한다. (스티븐 호킹) 왜 돌아온다고 한 것인가?
  
  지구 자전축과 마찬가지로 북쪽 은하수는 이제껏 수천 년 이상을 기울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주체의 위치에서 주변부로 기울었었다는 말이다. 북극성과 북두칠성, 북극의 은하수, 북쪽 성운권 모두가 지구 자전축 경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바로 이 북극 중앙의 우주적 친정위상의 회복이 다름 아닌 후천개벽인 것이다.
  
  우리는 개벽을 이제껏 마치 저희 집 똥깐 치우는 일쯤으로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주로 눈을 돌려야 하고 정역(正易)과 주역(周易)과 복희역 및 천문 역서(曆書) 등을 통해 우주사를 조금은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바로 수운 선생이 개벽을 하려면 별자리가 원만해야 한다고 했다.
  
  지구 자전축 이동이 해양판과 대륙판 충돌로 대 해일을 일으켜 26만 명이 몰살케 했다. 개벽은 혼돈스러운 것이고 시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혼돈의 와중에서 그것을 견인하므로서만 마음과 몸속의 푸른 별이 제대로 떠오르고 제대로 떠오르는 과정에서만 참다운 원만이 체득되고 참아온 원만이 제 주관적인 기도와 희망사항만이 아닌, 몸과 마음이라는 참으로 어려운 관성과 중력의 혼돈 속에서 비로소 터득될 때에만 후천개벽이 성취되어 일원상 법신불이 비로소 깨달아진다는 이야기다.
  
  내가 대종경과 선외록을 통해 알게된 소태산 사상의 대강이다.
  
  그렇다면 촛불과 함께 그로 인해 발생한 문화, 사상, 시민운동 일반의 혼돈 양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다시금 정립해야 할 것인가?
  
  선생이 영향 받았다고 고백한 또 한분의 개벽사상가가 다름 아닌 강증산 선생이겠다.
  
  강증산 선생은 후천음개벽(蔭開闢)의 혼돈 세상을 다스릴 정치 주체를 율려(律呂)라고 언명하고 수운 동학의 강령 주문 앞머리 부분인 '지극한 기운이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至氣今至)'를 율려 주문이라고 명명하여 자주 암송, 현송하였다 한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율려는 질서다. 남성성이며 이성이며 체계요 율법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율려 주문이라 불렀던 '지극한 기운(至氣)'은 수운 선생 해설에 의하면 '극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이니 바로 혼돈이다. 또는 '혼돈의 질서'다. 따라서 김일부 정역에 따르면 그것은 '율려'가 아니라 거꾸로 '呂律'이다. 즉 질서나 남성성, 체계, 이성 앞에 도리어 혼돈이나 여성성, 해체, 감성 등이 높여져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증산 선생의 무식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종교가들의 용어사용안에 들어있는 흔한 이중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선생은 음악적 질서로 보아선 농민들의 풍물 가락조차도 못 쫓아가는 걸뱅이 각설이 타령의 그 혼돈한 지리멸렬성을 가리켜 후천 세상을 다스릴 율려라고 높이 칭송하며 그걸 듣고 웃는 놈은 그 자리에서 직사하리라고 엄포를 놓았다.
  
  자기 아내 고판례에게 제자들 다 보는 앞에서 천지인 삼계 대권을 몽땅 넘겨준 자칭 옥황상제 아닌가! 그 혼돈 자체에 우주 전체 권력을!
  
  소태산 선생은 이것을 어찌 해석했을까?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영향 받은 것일까?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처음 주제로 돌아간다.
  
  촛불을 주목해야 한다.
  
  아카데미 제2기 커리큘럼의 거의 절반에서 촛불의 경험적 고백들과 내면의 소리를 솔직히 열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래서 소태산 선생의 체계와 교리의 엄정성에 날카롭게 대비시켜야 하며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섬광으로부터 오히려 참으로 현실적으로 사회개벽과 우주 개벽 상관의 참다운 일원상 정신 개벽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방향이다.
  
  그리고 난상 토론을 자주 열어 원불교 이론가 이외의 이론 체계와도 과감하게 충동시켜서 개벽 문화 운동, 생명 평화 운동의 생생한 새 방향과 방법들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누가 아는가?
  
  이 과정에서 유수한 이론가, 과학자, 교수들로부터 이 벌거벗은 새 세대 '기위친정' 젊은이와 여성들의 새로운 낯선 길에 도움이 되는 옛 세대의 그윽한 오래된 새 길의 지혜들, 도움말들, 그리고 따뜻한 보호와 애정이 쏟아질런지 모르지 않는가!
  
  이것이 둘째 방향이다.
  
  셋째는 마당굿이다. 그리고 마당굿을 비롯한 판소리, 민요, 민화, 생명 평화 예술 및 개벽 문화, 촛불 문화 등등, 이론과 교리와 고담준론 아닌 대중 신세대, 청소년, 어린이, 여성과 쓸슬한 소외 대중을 위한 그야말로 개벽 문화 예술을 그야말로 <개벽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문화원 마당이든, 마고 살롱이든, 창덕궁이든, 또는 어디든 간에 활용하는 기민한 <모바일 시스템>과 <인터넷 개벽 프로그램>을 대담하게 창설하는 원불교 나름의 천의무봉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원불교는 이제 와서 그 창립 배경과 교리, 소태산 자신의 가르침이 가진 '조용한 영성의 시끄러운 생명성'을 다 잊어버린 듯하다.
  
  이 방면에서 가장 중심은 역시 '마당굿'이다.
  
  마당굿은 마당극과는 달리 종교적 연주, 즉 '신령한 리얼리즘'이다. 그것은 '모심'과 '개벽'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마당'과 '판'으로 구성된다.
  
  마당은 텅 비어있어야 하고 판은 가득하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둥글고 텅빈 '마당'은 곧 일원상이요, 그 빈터에서만 성립되는 '판'은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의 사상(四象)이 이리저리 얽히고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이 동서남북으로 좌충우돌 마구 설키며 '천지, 부모, 동포, 법률' 때론 상극하고, 때론 상생하며, 삼학팔조를 동반하기도 하면서 숨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면서, 밖으로 사방팔방 시방(十方)의 상하로, 신명(神明)의 밝은 하늘과 한(恨)의 어두운 지옥에까지도 사방 뿌려지고 사방 치고, 사방 뻗어나가면서, 반대로는 안으로, 사람 속으로 수렴하면서 끊임없이 카를 융이나 이제마(李濟馬)처럼 확충법(擴充法)으로 움직여 관객의 정신, 생명, 물질성 모두를 치유하고 개벽시킨다.
  
  본디 탈춤은 치유와 오리엔테이션의 굿판이었다. 앞으로 오는 개벽은 우선 수운 말처럼 악질만세(惡疾萬世)의 때요, 증산 말처럼 대병겁(大病劫)의 때다. 치유는 평화적 후천개벽(後天開闢)의 가장 중요한 무기다. 소태산 선생이 제생의세(濟生醫世)를 활인(活人)의 부처 활동으로 강조하는 것과 같다.
  
  개벽기의 참된 예술은 정치적 선동 선전 따위가 아니라 생명 치유가 그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평화의 영성, 이성, 감성을 길러주는 기능이다.
  
  나는 원불교가 일원상의 마당(광장)에서 부처의 활동 판(촛불 모심)으로 중생을 치유, 교육(개벽)하는 마당굿의 대중적 문화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는 내 나름의 아이디어를 7월 3일 원불교의 새벽기도회와 7월 4일 조계종의 시국 법회 바로 뒤에 떠올렸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 글의 뒷부분에서 다시 생명미학의 원칙들과 함께 부연하겠거니와 마당굿 관계의 전문적 미학 개진은 이미 '운하에서 바다로! 횃불에서 촛불로! 마당극에서 마당 굿으로!'라는 목포 전국 마당극 페스티벌 7월 26일 특강 원고에서 25매 분량으로 정리해 놓았다. 필요하다면 참고하시라.
  
  이 부분이 나의 원불교 관계 최근 생각 가운데 사실상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특강 제목도 '마당과 일원상'으로 했다. 물론 교수들, 이론가, 과학자들의 정통적인 고담준론도 중요하다. 그것을 폐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보조적 위치로 파악되어야 한다.
  
  개벽을 목표로 하는 문화 운동의 중심 흐름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살아 생동하는 '사은'의 '판'이 이미 그 판을 모시는 자리로서 성화(聖化)된 '둥글고 빈 마당' 즉 '일원상' 안에서 참으로 감동적이게 뛰어 노는 것.
  
  나는 바로 이 유비(類比) 즉 '마당과 일원상', 그리고 '판과 살아있는 모심의 개벽 행위로서의 사은' 사이의 기막힌 상관관계를 깨달은 놀라움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오직 일원상 법신불과 소태산 선생과 내가 참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원불교의 여성 교무들, 그리고 원광대의 존경하는 박명수 교수에게 깊이 감사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원불교의 참으로 독특한 포교 방식, 세계에 그 유례가 없는 문화 운동의 대중적 감동과 함께 한국 마당 굿 운동의 새로운 출구를 열 것이라는 참으로 기이한 예감이 내 안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정한 모심과 개벽의 예술, 그 예술을 통한 진정한 치유의 부처와 해방의 문화가 두렷이 나타나리라는 그 큰 예감 말이다.
  
  기획 주체측이 곤혹과 어려움을 느낄런지도 모르겠다. 강요는 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이관대 강요까지 하겠는가? 다만 개벽은 실제로 가까운데 개벽의 문화적 모심이 아직껏 살아 있지 못해서 드리는 제안일 뿐이다.
  
  나는 최근 대종경과 선외록을 읽으며 원불교 개벽론과 소태산 아카데미 문화 운동의 내용 및 활동 구조에 대한 내 나름의 악센트를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인물, 사상과 실천, 마당과 일원상, 여성 전위 등이다.
  
  인물
  
  촛불에서 중요한 문제점이 나타났다.
  
  '온라인 화백'(나는 그들의 쌍방향 통행이 합의에 도달하는 아고라의 포털 전체를 이제부터 희랍말 아고라가 아니라 우리말 '화백(和白)'으로 부르기로 했다)과 광장에서 밤 새우는 그 '오프라인 화백' 전체 과정에서 지도자도 조직도 책임자도 동원 체제도 없이 불꽃 튀는 '팔정사단·(八政四壇: 유교 至治主義 정치의 논의 구조를 지칭하는 말로서 이것의 본디 유래는 1만 4천 년 전 파미르 고원 마고(麻姑) 시대의 우주율인 八呂四律, 혼돈과 여성성이 8, 질서와 남성성이 4의 비율로 이루어진 呂律, 즉 혼돈적 질서에 따라 壇下의 시끄러운 대규모 군중의 직접성과 壇上의 고요한 소수지도부의 대의성 사이의 논의 구조로서 몇날 며칠을 끄는 불꽃 튀는 논쟁 결과 도달한 전원일치의 정치 이성적 합의 위에 다시금 八風四維의 우주 음악 구조를 지닌 대풍류(大風流)가 일어나 전원이 영성적이고 감성적인 만장일치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화백 민주주의 정치를 가리키는 古代 개념이라 한다)' 유사 형태가 나타난 점이다.
  
  즉 인물이 아니라 집단지성이 그 방향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함이 없음으로서 아니함이 없음' 즉 '無爲無不爲'의 경지로서 구체적으로는 노자의 이른바 '성인은 아무것도 함이 없는데 백성 스스로 모든 것을 아니함이 없음(我無爲而民自化)의 이미지가 희미하게나마 드러난 점이겠다.
  
  이것은 분명 비록 인터넷 매체, 디지털 문명이라는 도구적 편리성에 의해 우선 가능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명백한 하나의 고대 회복이며, 탁원할 네오 르네상스이고 이른바 후천개벽의 뚜렷한 실례가 된다.
  
  우리는 이 현상의 의미망을 잊지 말고 계속 추적해야 할 것이다.
  
  후천개벽이란 해월 최시형 선생 말씀처럼 선천 문명을 다 때려 부셔 버리고 오직 후천 새 문명만을 달랑 유일 가치로 내세우는 그런 혐착한 단위 문명 전화 따위가 아닌 것이다. 후천을 중심으로 하되 선천의 수승한 가치를 개백 기준에서 해체 재구성해 탁월하게 배합하는 '기우뚱한 균형' 이 곧 개벽이다. 때문에 후천개벽은 크게 보아 '다시 개벽'이게 된다(수운). 그래서 '원시반본(原始返本)'(증산)일 수밖에 없으니 '옛 속으로 들어가 새로움으로 나옴(入古出新)'이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로부터 개벽의 새 길을 발견하고 실천한 소태산 선생의 '오래된 새길'이야말로 그 대표격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묻겠다.
  
  지도자도, 인물도, 조직도, 책임자와 동원체제도 없는, 그야말로 '지도자는 함이 없는데 군중이 알아서 모든 것을 아니함이 없는' 고대의 무위정치(無爲政治)가 바로 지금 현실의 가장 현실적인 생명 평화 정치 현실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비록 우주적 대변동이 '기위친정'의 형태로 이미 왔다 하더라도 역시 아직 그것은 역사의 초과 달성으로서의 집단적 예언 차원이요 예감 속의 미래 정치였던 것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계속 추적하고 논의하고 미래에 그것을 현실화할 것을 희망하며 그 희망에 투신해야 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우선 촛불의 집단지성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서는 그것은 현재적으로 잘못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이용물이 되거나 앞으로는 생태 위기의 시대, 에코-파시즘으로 왜곡될 수 있다.
  
  현실은 무엇인가?
  
  바로 그 후천을 위해 선천을 건너가는 개벽이라는 이름의 과도기인 것이다. 이 '물 건너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백성' 자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시 뛰어난 '성인'의 존재요 지도력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다만 조건은 그 성인이 마치 그 백성 모두의 희망과 삶과 실천의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압축할 것과 같은 '원만'을 체현(體現)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다.
  
  즉, '중심적 전체(中心的 全體)'의 실현으로서 바로 '인물(人物)'의 문제다.
  
  백성의 미래와 성인의 과거를 함께 함축한 과도적 현실의 '인물됨'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만, 독재나 전제의 마키아벨리적 강조 또는 고전적 성인 대망론과는 또 다른 이 어두운 현대사의 전환기적 갈망에 대한 대답의 한 형태라는 원천적 한계만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민중 자신의 태양 정치, 무위정치, 생명 정치의 시대는 성인의 훈습(薰習)을 받은 영적 생명의 혁명가들에 의해 비로소 떨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중심적 전체'의 본질이 다름 아닌 '활동하는 무(無)' 그 자체여야 한다는 절대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36년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 신민 통치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가?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 물질문명의 세계 지배에 대해 동양의 고색창연한 도덕이 힘을 잃고 남방 해양 세력인 일본이 그 서양 물질문명의 힘을 업고 대륙적인 북방 중국 등의 낡은 도덕을 제치고 동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해 자기들의 참다운 도덕과 문명의 발원지였던 해륙(海陸) 통합적 새 문명사의 잠재적 태반(胎盤), 정신과 물질 양대 문명의 탁월한 이중 복합, 도시와 농촌, 이동 유목과 정착 농업의 눈부신 통합의 예감의 땅인 바로 이 한반도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캄캄한 시절이다.
  
  한반도의 현실은 한 마디로 절망과 분열이었고 자기 망각이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 상태, 몸과 마음 양쪽의 극심한 가난이었다.
  
  해체냐 왕조적 독재권이냐?
  
  인물이 없었다.
  
  사상이나 실천 이전에 그 모든 것을 자기 마음과 몸과 삶에 압축한 구체적 인물의 존재가 내뿜는 성성(聖性)이 요구되고 있었다.
  
  여기에 대답이 온 것이다. 소태산의 출현이 그것이다.
  
  '선외록'에서 한 번 인용한다.
  
  어성(語聲)은 금성(金聲)에 약간 목성(木聲)이 섞였고, 평상시에는 목성 같으시나 설법하실 때에는 금성이 많이 되셔서 시방 삼계 일체 중생에게 다 고루 듣게 하시는 것 같았으며, 말씀은 드물게 하시되 한 마디라도 하시는 말씀은 전부 법설이시었다.
  
  전면 상궁(上宮)에는 뚜렷한 원일훈(圓日暈)의 백호(白毫) 광명이 상조(常照)하시어 범상한 사람이라도 한 번 뵈오면 믿음을 발하게 하시었으며 얼굴은 보름달 같으시어 그 원만하심과 광명하심을 누가 따를 수 없었고, 빛은 자금색(紫金色)이시었으며 얼굴뿐 아니라 전신에서 항상 광명을 비춰주시었다.
  
  두상은 사방이 방 고르시나 원(圓)으로 판을 짜놓으시고 안광(眼光)은 맑고 자식을 가지시되 궁글리시면서 혹 노기(怒氣)를 띠시면 감히 그 안전에 설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남녀노소가 다 그 자비안(慈悲眼)에서 위안을 받고 살게 해 주시었다. 운운

  
  선외록의 이 기록만 보면 혹 추종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제 멘토며 아이콘을 상투적으로 미화하는 그렇고 그런 과장으로 보기 십상인 글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런 글을 인용까지 하는 까닭이 있다.
  
  나는 기인 옥살이에서 풀려난 직 후 어떤 인연으로였는지는 잊었으나 어느 날 우연히 원불교 특별 사진전을 구경하게 되었다.
  
  거의 30년 가까운 옛 일이다. 그 전시회에서 한 사진 앞에 문득 멈춰선 나는 몇 십 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뜰 수 없는 이상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소태산 선생의 젊은 날의 한 흑백 사진이었다.
  
  '아, 원만!'
  
  그것이다.
  
  나는 이제껏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 세계인 가운데 이렇게 원만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부처님이니 뭐니 그런 생각은 스쳐간 적이 없었고 다만 그 얼굴 안에 조국의 슬픈 산천과 그 산천으로부터 이제 막 솟아 올라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한 빛나는 드넓은 세게가 가득히 담겨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슬픔 위에 서린 원만한 빛!
  
  나는 탐미주의자 따위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서 오래도록 미학을 전공했다. 내가 전공한 미학의 여러 학설 안에 모든 미의 범주 가운데서 최고의 아름다움이 존재미(存在美, Ontische Schönheit)라는 정설이 뚜렷이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한다.
  
  아름다움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움은 존재미. 그것도 숭고와 심오의 존재미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의 경우 그 구조가 텅 빈 무심(無心)에 서린 슬픔, 존재의 슬픔, 그리고 그 위에 희미한 미소로부터 퍼져 나가는 거의 우주적인 차원의 원융(圓融)과 꼭 잡을 수 없는 사색의 심오함이 만들어 내는 숭고의 존재미다.
  
  그것은 시대정신마저도 넘어선다.
  
  흔히 그것은 서양보다 동양, 그것도 불교 미술, 보살이나 관음이나 석가보다 특히 미륵반가사유상 등에서 드러나는 슬픔, 희망, 깨달음과 원융의 세계다.
  
  초월 같지만 초월이 아니요 중력 같지만 중력이 아닌 그곳에 그 아름다움이 서린다.
  
  바로 그것이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갈증과 희망의 정체이기도 하다.
  
  서투른 영웅 대망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바로 그 인물이 그 어두운 시절에 한반도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한국, 아시아, 세계만이 아니다.
  
  지구와 우주, 인격-비 인격, 생명-무생명을 포함한 일체의 우주 존재가 오염되고 부패해 가는 물질의 굴레에 갇혀 극도로 나빠지는 기후 혼돈 속에서 해방의 그날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다.
  
  새 시대의 개벽 불교는 거기에 대답해야 하며 그 대답은 교리와 이치, 그리고 수양과 신적(神的) 결단이 전에 그 영을 한 차원 높은 앙양에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어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제 안에 담아야 한다.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갈증에 대한 불가피한 대답이겠다.
  
  그것이 어떤 경우, 불가피하게 한 인물로 나타난다.
  
  쟈끄 마리뗑은 이것을 두고 '비극적 필연'이라고 부른다.
  
  히틀러, 레닌, 스탈린, 모택동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간디, 만델라, 달라이 라마조차도 아니다.
  
  현대가 참으로 갈망하는 그 인물은 전혀 예감하기 힘든, 전례가 없는 인물일 것 같다.
  
  그는 누구일까?
  
  말씀으로 한 번 가려 보자.
  
  헌대를 사는 인간에게 진정한 멘토는 어떤 말씀을 하는 사람인가?
  
  부처나 자비는 물론이지만, 모심이나 개벽까지도 그렇게 되어가지만, 생명이나 평화마저도 이제는 흔한 말로 느껴지기 시작하지만, 또 그것이 당연하지만,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찢어지고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인터넷과 생태학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인간 공부와 돈 버는 사업 사이에서 여지없이 분열되어 끊임없는 이동 유목의 현실과 하염없는 정착 농업에의 항수를 새 차원으로 함께 들어 올리지 못하는 새로운 괴로움, 그리고 개체성과 융합을 현실의 실용 속에서 연결시킬 수 없는 외도토리의 쓸쓸함에 대해서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사상 이전에 그 인문 자신의 평소의 낙천성과 타고난 따뜻함이었다.
  
  선외록 10장이다.
  
  한 제자가 여쭈었다.
  
  '앞으로 우리 회상의 인재가 어디서 많이 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공부 방면의 인재는 농촌에서 많이 나올 것이요, 사업 방면의 인재는 도시에서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인물을 농촌에서 도시로 풀어쓰게 하고 사업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풀어쓰게 될 것이다.'

  
  한 시절의 인물이 방황하는 민중에게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은 무엇일까?
  
  자상한 지도력이요 사랑의 단호함일 것이다.
  
  '그대들이 나를 만난 것은 마치 봉사가 문고리를 잡은 것과 같은 것이다. 기왕 잡았거든 단단히 잡아야 할 것이요 만일 방심하여 놓치고 보면 다시 잡기가 쉽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소태산이 이 시절에 다시금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인물을 종교의 경우에, 그리고 후천개벽적 과도기에 한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의 수령론 따위의 세습독재의 합리화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인물은 이미 왔고 이미 다녀갔고 그리고 그 빛을, 그 원만함을 두렷이 남겼다. 지금은 그것이 참으로 촛불과 같은 새 시대의 새 민중들이 '함이 없는 함'으로 나아가는 길에 은은한 빛으로서 깨닫게 되도록 그 공부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그 인물을 기억하고 숭배나 흉내보다는 오히려 그 인물 안에 들어있는 논리와 교리와 가르침 이전의 다함없는 모심과 개벽의 인간성 그 자체, 다시 말하면 그 '원만성으로부터 마음의 빛을 옮겨 받는 기쁨의 은은함을 기억하는 단계요 차원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재되어가는 현실이 그런 것 같다.
  
  인물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었다(人中天地一)는 옛 천부경의 한마디는 결코 틀린 말도 낡은 말도 아니다.
  
  오늘 이 생명의 시대, 평화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한 개체 생명 안에서 원만한 우주가 화안히 살아나 드높여져야 할 때다.
  
  인물이 곧 사상이다. 촛불과 원불교의 영원한 멘토요 표양일 것이다.
  
  사상과 실천
  
  원불교의 교리와 소태산 사상의 대강과 세목을 아는 사람은 아무나 많다.
  
  동어 반복은 소태산 아카데미에서는 의미가 없다.
  
  현대의 세계와 삶에 대해 가진 소태산 사상의 변함없는 생활력과 날카로운 영향력 평가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오늘 그것을 촛불에 두는 것이 옳다.
  
  촛불의 특징은 이 강의의 도입부에서 여덟 가지로 분석한 바 있다.
  
  우선 크게는 전 인류 문명사 대전환의 시대에 불교가 가진 큰 의미 영역인 화엄경과 디지털 네트워크 문명 사이의 친연성에 연계된 일원상 법신불 사상의 적극적 가치.
  
  그리고는 후천개벽기의 주역인 어린이, 청소년과 여성, 쓸쓸한 대중의 생활 및 생명 가치를 위한 일상적 개선 운동과 원불교 시초부터의 저축조합, 방언공사, 간척사업, 교육사업의 역사가 갖는 상사성(相似性)의 현실적 의미, 광범위한 지구 신경망 정보 하이웨이의 디지털 컴퓨팅에 연결되는 물질과 정신 양면의 개벽 운동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은 매우 크다.
  
  신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구인회상(九人會相)의 백지혈인(白指血印) 직후 일상생활 개선 운동의 압권이라고 해야 할 저축조합 사업을 추진하는 소태산은 현실 신비주의가 이 후천개벽 시대에 갖는 의의는 매우 중차대하다.
  
  원불교 사상과 역사는 불교와 남조선 개벽 사상사 그리고 기독교의 현실 선교 조직 활동 원리의 결합을 중요한 특징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은 앞으로의 도리어 현실적 적합성으로 크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도덕과 물질 사이의 대립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대한 소태산의 끊임없는 주목과 지속적인 가르침은 바로 그것이 극에 달한 현실 및 미래의 양 측면의 대분열에 대해 필경 유력한 처방을 마련할 것이다.
  
  일원상 법신불 신앙과 생명 평화 모심의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사은(四恩)의 보은(報恩) 운동'이 갖는 이 시대, 극에 달한 무정한 자본주의 세상의 황량한 삶에 그 근원적 해방과 따뜻한 인간애 회복의 길을 결정적으로 가르쳐 준다.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일원상 법신불의 심인(心印)을 거듭 강조하는 소태산의 만인 불교 사상은 그야말로 대중적인 신적(神的) 결단으로서 높이 평가해야 할 근현대성을 가진다.
  
  우주 개벽이면서 역사 대변혁인 촛불의 비폭력과 생명 평화의 길은 소태산 사상의 모든 방면, 모든 세목들 속에서 다 발견되는 일반 원칙이다. 이것이 원불교 쪽의 체계적 작업에 의해 낱낱이 현실 문제들과의 실천적 연관성 위에서 밝혀질 필요가 있다. 후천개벽적 문화 운동의 구체성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확보되는 것이고 이때 확보된 구체성을 통해서만 신앙의 생활성, 현실적 열정, 교회에 대한 살아있는 사랑이 보장되는 법이다. 또한 이웃과 시민 대중에 대한 부처다운 자비와 의생제세(醫生濟世)의 치유기적이 가능해진다.
  
  원불교 최대의 아름다운 교리의 기념비는 '사사불공(事事佛共) 처처불상(處處佛像)'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주지의 사실이겠지만 이것이 깨달음의 일상성 한 가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한 톨 먼지 안에 우주가 들어 있음(一微塵中含十方)'과 하나의 달이 천 개의 다른 강물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침(月印千江)'의 이치를 함축한다.
  
  내부공생(Endosymbiosis), 개체-융합(identity-fusion), 자기 조직화(self-srganization), 우발성, 우연성, 돌발성, 창발성, 혼돈성, 자발성, 활동적인 무, 창조적 진화 등과 직결된다.
  
  원불교는 그 어느 종교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근원적인 해탈과 작고 다양한 구체적인 생활 가치를 지향함으로써 촛불의 현 단계 국면 전환을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다. 혹시라도 도울 수 있는데도 다른 여러 이익에 대한 미련 때문에 돕지 않는 것은 안 좋은 일 정도가 아니라 원불교를 기대하는 사상의 모든 눈과 촛불의 젊은 여성과 청소년, 쓸쓸한 대중의 눈에 자기 배신으로밖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촛불 이후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성립해 차차 아시아 전 대륙과 온 세계로 확대되어 간 새로운 문명 창조 운동의 이름은 분명 '화엄개벽'이다. 소태산 사상과 원불교의 '일원상 개벽'의 명제 및 실천 역사는 이에 참으로 귀중한 '화엄 개벽'의 전 단계로서 귀하고 귀한, 탁월한 '개벽적 대화엄'의 압축적 예감으로서 길이 모심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다만 '일원상 개벽론'은 주역과 정역 등을 전 세계 및 인간 내면의 영과 생명 생태적 무한 수(數)의 광활한 제반 과학 차원과 아직은 깊이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후천개벽적 깨달음, 오늘의 영적 네트워크 소통의 영역은 뇌과학, 뇌생리학, 신경학, 생태학, 생명학, 생물학과 물리학, 제반 혼돈학, 동역학, 경락학, 기혈학, 단전학, 다층의 풍수지구학 등과 다양한 관계나 상호 보완성 속에서 발전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 귀퉁이의 소박한, 그러나 촌스러운 작은 영적 자각의 단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요컨대 소태산 사상과 교리의 도상화(圖像化)나 체계화, 그리고 묵수주의(墨守主義)로는 정신 개벽이란 이름의 참다운 차원 변화를 가져오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지금껏 제시한 소태산 아카데미의 기획 방향이나 평가 방향에서 '촛불'을 계기로 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피나는 자기 개벽을 단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필사적인 것이어야 한다.
  
  일원상과 개벽을 앞세운 당연한 인과율인 것이다.
  
  원불교는 죽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라. 살아나려면 가슴에 촛불을 켜야 한다. '기위친정'은 원불교의 운명이기도 하다.
  
  지금 원불교가 다름 아닌 '기위' 즉 '꼬래비'임을 식은땀을 흘리며 자인(自認)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참으로 촛불을 제 안에 켠다면 '南辰圓滿 北河回'는 바로 원불교의 내일이 된다.
  
  마당과 일원상
  
  수운 최제우 선생 못지않게 소태산 원불교의 일원상 개벽의 길에 빛을 던져준 분이 강증산 선생이다.
  
  선생의 지론은 의통(醫統)에 의한 정세개벽(靖世開闢)이다.
  
  치유로서 평화적, 비폭력적인 후천개벽을 실천한다는 것이 수운의 선동학(先東學)과 뚜렷이 구별되는 증산의 후동학(後東學)의 정체성이겠다.
  
  소태산 선생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온 '사람 살림(活人)'과 '생명을 건지고 세상을 치유한다(濟生醫世)'란 가르침이 다름 아닌 바로 이 평화 개벽이니 촛불 세대의 열망 그 자체인 이른바 '생명과 평화의 길'이다.
  
  생명은 병들고 평화는 일그러져 있는 것이 바로 현대다.
  
  참으로 오늘 여기에 요구되는 이 생명과 평화, '제생의세'가 교리의 가르침과 명상생활, 그리고 생활 개혁의 실천(三學)뿐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까지도 표현되고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현대는 문화의 시대이고 촛불 세대인 어린이, 청소년, 여성과 쓸쓸한 촛불 세대인 어린이, 청소년, 여성과 쓸쓸한 대중 모두가 한마디로 문화의 세대다.
  
  문화는 그들에게 취미가 아닌 밥 한 그릇이다. 치명적인 것이란 뜻이다.
  
  물의 치유와 마음의 해방이 바로 그들의 타는 목마름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이미 촛불의 광장에서 그들 자신이 보여준 춤과 노래와 축제, 그리고 유머와 미소와 한없이 부드러운 사랑의 메시지나 화해의 제스처들이 그저 장식품이었던가?
  
  그들의 정치 아젠다인 생명만 보고 그들의 표현 형식인 평화의 문화를 보지 못하는 서구 사회과학적 실증 중독 지식인이나 정치 선동에만 의한 생명 구호를 거짓 간판으로 내건 환경 좌파 혁명꾼 따위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태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치유에 의한 문화혁명, 모심을 통한 정신개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지난 6월 29일에 절정에 달한 좌우익 '꾼'들, '까쇠들(casseur, 까부수고 까불고 까발리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마당쇠들)'의 폭력의 악순환이나 7월 말에서 8월 하순인 지금까지 계속되는 저 촛불을 빙자한 지리멸렬한 '맑스-촛불'들과 이를 '옳다 좋다의 빌미'로 한 '옘비들'의 탄압이나 똑같이 바로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 바로 대답이 참선의 칼날처럼 나와야 한다.
  
  촛불이 마당굿으로 넘어가야 할 최적의 시점이 된 것이다.
  
  '생명 치유'는 '모심'으로부터 시작 없이 시작되는 '확충(擴充)'의 '판'으로, '평화 해방'은 '개벽'으로 끝없이 끝나는 '원만(圓滿)'의 '마당'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원불교의 핵심은 일원상(一圓相)과 사은(四恩)에 있고 마당굿의 주심은 텅 빈 둥근 '마당'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태극음양 사상의 사단(四端) 및 궁궁을을(弓弓乙乙) 같은 성명(性命)의 역동적인 '판'이다.
  
  둥근 빈 마당 없이는 살아 생동하는 꽉찬 판도 없다.
  
  판의 생활력 없이는 마당의 저 큰 원만은 살아나질 못 한다.
  
  마당 굿의 원형(原形)인 탈춤은 본디 온 마을의 치유 행사로서의 굿이다.
  
  굿은 치료하는 행사다.
  
  마당에서 온 동네가 다 참가해서 자가 치료하는 굿이니 때론 화백(和白) 회의도 하고 때론 마을 공동의 적에 대한 재판도 하고 때론 계몽도 한다. 그래서 탈춤굿판을 어느 지역에서는 '야장(冶匠)' 즉 '대장간'이라고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굿판이 죽은 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주는 '길 닦음'이기도 하고 죄 지은 이의 죄를 씻어주는 '씻김 굿'이기도 했다. 즉, 정화 행위요 천도 행위다.
  
  그러나 가장 중심 기능은 역시 치유다. 위로까지도 오락까지도 치유의 영역인 것이다.
  
  영, 생명, 물질성 모두에 대한 다양한 치유이겠다.
  
  춤과 노래와 제단.
  
  바로 이 풍류(風流)가 탈춤 굿의 중심 흐름인 까닭이다. 왜냐하면 풍류는 우주적, 영적인 생명 문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덧붙여야할 것이 바로 이 굿판에 '신시(神市)' 즉 '호혜(互惠)와 교환(交換)과 획기적 재분배(再分配)가 결합된 신령한 사랑의 시장'이 함께 섰다는 사실이겠다.
  
  통상적인 5일장(五日場)과는 다르다. 그러나 오일장 역시 이 같은 풍류굿판의 신시에 그 모델이 있으니 장터에서 판소리나 풍물을 울리고 마을 고을 문제를 제기하며 획일적 통제 가격이 아닌 사랑과 호혜와 획기적 재분배 원리에 연결된 '가격 다양성(價格 多樣性, 경우와 날씨와 사람과 상품의 질과 이른바 내부공생(endosymbiosis)의 실천에 연결해 여러 가지 다양한 가격이 결정되는 고대 시장의 경제 원칙)'을 일반화시켰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겠다.
  
  좌우간 치유는 탈굿의 중심 가능이고 마당 굿의 이제부터의 중심 가능이어야 한다.
  
  치유 기능의 상징성을 확충(擴充)에 두었다. 그러나 이 역동의 극치인 확충의 판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마당이 텅 비어야만 하는 것이다.
  
  마당 판의 진행 원리는 우선 길놀이의 '모심', 열두 마당의 '살림', 뒤풀이의 '깨침' 세 가지에 있다. 옛 탈굿의 경우에는 먼저 마당을 비우고 금줄을 쳐서 며칠 전부터 '거룩한 장소(聖所)'로 승화시켜야 한다. 비움은 곧 성화(聖化)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마당의 둥근 일원상을 맨 먼저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액자 무대나 열차 칸 같은 폐쇄된 극장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극장 안에 갇힌 채로 해와 달과 별과 허공, 구름, 숲과 나무들, 강물, 흙, 모래, 사람들, 앞과 뒤와 양 옆에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느낄 수 없고 '간접 체험', 즉 우주적 원만 체험의 조작 과정을 받아 들이려면 그만한 세뇌나 주입, 자기기만의 과정이 요청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피하는 것이 좋다.
  
  이른바 작위적인 '감정이입(Einfühlung)'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허위의식이 따르게 되며 도 이런 일방적 감동을 차단하고 비판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는 또 역시 조직적인 '낯설게 하기' 즉 '소격효과(疏隔效果, Verfremdungs affekt)'를 작동시켜야 한다.
  
  내내 감동시키다가 갑자기 스크린을 내려서 그것과 대립되는 영상들을 내쏟아 놓는 등 작위에 작위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극장 안에서 갇히면 이렇게 만화 수준의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당을 비워놓고 길놀이를 시작하면 그 복판에 촛불을 켜놓고 '자심자배(自心自拜)' 즉 '나를 향한 제사(向我設位)' 도는 '나를 향한 모심'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원상 법신불은 우선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마당은 우선 내 안에, 광대와 구경꾼 안에 있고 그런 한에 있어서만 온갖 인격-비 인격, 생명-무생명 등 모든 우주 공동 주체 안에 '모셔지는 것'이다. 바로 이 모심에 의해서 비로소 참선의 과정, 즉 양극의 어둠과 빛, 사단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사상의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상극과 상생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의 드러난 차원과 그 밑에 숨어 있던 차원이 올라오는 이른바 '복승(複勝, 한국 전통 경락학의 한 표현임)'의 이리저리 얽히고 설키는 '기화(氣化)' 즉 '복잡화(complification, 극적 전개 과정)가 전개된다. 참선의 극진자(極振子) 운동과 소각(小覺) 과정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천지, 부모, 동포, 법률 사은과 그것을 둘러산 극적인 은원(恩怨)' 관계가 역동적으로 복잡화하는 것, 나는 이것을 '살림'이라 부르는데 그야말로 '생명과 평화의 구체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여러 행태, 예컨대 열두 마당으로 중층화, 복층화하고 다양화하면서 전개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살림'이니 촛불의 100여 일에 걸친, 첫 촛불의 아름다운 순수와 새 촛불의 거룩한 지혜뿐 아니라 그 사이와 그 뒷 장단에 나타나는 '까쇠들'의 폭력 투쟁의 악순환과 자칭 '맑스-촛불'들의 '오비이락(烏飛梨落, 수운 선생의 興比歌)에 나오는 심상치 않은 反開闢 음모들)' 사건이 겹쳐들게 된다.
  
  그러나 이것에는 정형이 없다. 대강의 구조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살림'의 과정이 곧 '확충법(擴充法)'을 그 미학 원리들의 상징으로 한다는 점이다.
  
  기타 생명 미학 원리는 많이 있으나 확충법이 대표적이라는 말이겠다.
  
  확충법, 즉 'Amplification'은 저 유명한 카를 융의 정신 임상 치료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주 생명과 인간 정신 생명 구조의 네 가지 원리인 '사위체(四位體, 피타고라스의 이른바 Tetractis)' 사이에서 인간 정신 내부의 심층 무의식의 여러 층위들로 깊이 파들어 갔다가(充) 다시 그 네 가지 위상(位相)의 윤리적 사회생활과 도덕 문제로 밖으로 한없이 확장돼 나왔다가(擴) 다시 속으로, 다시 밖으로 이렇게 반복해서 확장·수렴, 수렴·확장하는 안팎의 끊임없는 확충을 통해 결국은 융이 '만다라(mandala)'라고 부르는 둥근, '원만'한 정신의 결정적 치유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방법을 마당 굿, 일원상 사은 문화 운동에서 실제적인 참선법의 형식으로 치유 기능을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한 미학적, 연행적 문화 운동으로서의 모든 문제에 관련해서는 이미 지난 7월 26일 목포 전국 마당극 페스티벌 특강 원고로 발표된 나의 강의 형식의 논문 '운하에서 바다로! 횃불에서 촛불로! 마당극에서 마당 굿으로!' 안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이 확충법이 오직 카를 융만의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융의 분석 심리학 자체의 사상 및 과학의 기초가 도리어 동양 쪽에 있듯이, 확충법 또한 동아시아 의학 및 생명 과학의 산물이다.
  
  '확충'은 본디 맹자(孟子)의 용어다.
  
  19세기 한국의 천재 의학자, 생명 사상가였던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즉 '사상의학(四象醫學)'에는 바로 이 '확충법'이 나타난다.
  
  음(陰) 즉, 숨은 차원의 생명(生命)인 영적 생명력의 분류를 양(陽) 즉, 드러난 차원인 사단(四端)에 연속시켜 안팎으로 역동시키는 확충법에 의해 태양(太陽), 소양(小陽), 태음(太陰), 소음(小陰)의 네 개의 위상(位象)에 귀속되는 생체 내부의 장기계, 신경계 등등을 나아가 365종의 경락과 기혈의 표층 심층과 단전들을(물론 그 주동성과 합하여), 마구 흔들어, 그러나 양극 사상 등 사이를 끝없이 왕래(참선법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하고 이를 다시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 중심의 칠정(七情)까지도 연결된 선악(善惡) 양 측면 간의 극진자 운동(極振子 運動)과 '복승(複勝)'인 소각(小覺)의 무한 복잡화 과정을 통해 큰 차원 변화로서 치유하는 새 생명학의 큰 경지를 열었다.
  
  이것은 다시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畸)의 운화론(運化論)과도 연결되지만 결정적으로는 수운 동학의 확충법인 '明明基德 念念不忘'의 반복에 의한 '至化至氣 至於至聖'의 끝없는 수련 실천을 통해서 '心化家化'의 치료에 이른다는 것으로 결국은 개벽의 선약(仙藥)이라는 영험한 부적인 '궁궁태극(弓弓太極)' 또는 '태극궁궁'의 치료법에 연속된다.
  
  그렇다면 여기 하나의 문제에 도달한다. 일원상은 다만 텅 빈, 무심한 부처의 심인(心印)으로만 끝나는 것인가?
  
  '마당' 비움과 길놀이를 통해 촛불 앞에서의 자심자배(自心自拜)와 향아설위(向我設位)의 '모심'을 통해 도리어 '판'의 생동하는 '사은(四恩)' 실천의 어려움, 은원(恩怨)의 복잡한 착종(錯綜)과정 전체의 빛과 어둠을 참선처럼 끊고 그 사이를 밀고 가는 근원적인 에너지, 일종의 동학에서 말하는 지기(至氣) 도는 궁궁(弓弓) 또는 혼돈한 근원의 질서(混元之一氣)로서의 힘찬 에너지일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아무리 원불교의 포교를 위한 문화 운동이라 하더라면 일종의 프로파간다(선전극) 차원이 아닌 진정한 살림의 치유 행위인 한, 이 숨은 차원의 에너지는 해명되어야 비로소 미학이 성립된다.
  
  아니라면 생명 미학은 없고 그것은 건성의 형식적인 '주목판매(attention-marketing)'에 그치고 만다.
  
  어떤가?
  
  원불교 수도자들의 마당굿 가담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고 마당굿의 근본 평가가 달라져야 하고 현대화되어야 할 바로 그 까닭이다.
  
  위에서 내가 한자로 그냥 기술한 '明明'이나 '念念' 또는 '至化'와 '至於'자 모두 확충(擴充) 즉 밖으로 분산적으로 나아가고 안으로 집중적으로 들어오는 '아니다-그렇다'의 과정과 숨은 차원의 질적 변화와 그것이 드러난 차원으로 개시(開始) 현현(現現)되는 새 세상의 개벽의 과정은 동학 수양 실천의 기본 구조로서 마당 굿 창조와 참가 과정에서 소태산 선생의 여러 가지 수양 원리나 실천 법칙들과 심도 있는 비교 연결을 통해 개벽 운동의 실천 방법론으로 섬세하게 적용되기를 바란다.
  
  마당굿이 그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듯에서 사뭇 건방진 문자 쓰기를 공자 앞에서 자행했으니 너그러운 관용 바랄 뿐이다.
  
  여러 가지 잡소리 예절 찾았으나 이런 것들이 사실은 마당 굿의 마지막 피날레인 '뒤풀이'에서의 '깨침'의 참 내용들인 것이다. '깨침'은 이렇게 흔하고 쉬운 것들이다.
  
  이미 마당굿의 구조는 크게 모심(길놀이), 살림(열두 마당), 깨침(뒤풀이)이라고 전제했다.
  
  원불교의 경우, '살림'이 '사은'의 실천과정이고 생활 개선의 대안 운동(공부와 취사 등)이라면 '깨침'이야말로 이전의 '모심(제안의 일원상 경배)'에 이은 '살림(구체적 생명 평화 운동)' 밑에 '숨어 있던 차원'인 '일원상 법신불'이 '사사불공, 처처불상'의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다양한 화엄적 대해탈을 예상시키는 그야말로 '구체적인 깨우침'이라는 드러난 차원으로 올라오는 바로 이 뒷풀이란 과정의 조그마한 '개벽'일 것이다.
  
  재미난 것은 뒷풀이에서 마당에 들어선 사방팔방의 구경꾼들은 꼭 촛불들처럼 한 굿거리장단에 맞춰 수십, 수백 가지 서로 제멋대로 제째대로 다른 여러 가지 춤사위로 춤을 춘다는 사실이다.
  
  나는 단 한 사람도 남과 똑같은 모습의 춤을 추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촛불에서 이 마당굿이 가진 화엄과 개벽의 가능성을 느낀 바로 그 까닭이며 일원상 법신불이 결코 어느 누구에게 획일적 '통섭'이나 집체주의적 '온 생명'의 '에코 파시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생생한 증거를 확보한 바로 그 이유다.
  
  소태산 선생은 자기의 멘토가 수운 선생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한다.
  
  이 경우 수운 선생의 시 한 구절이 있다.
  
  '쪼각쪼각 흩날리고 흩날림이여!
  붉은 꽃잎들의 붉음이로다.'
  (片片飛飛兮 紅花之紅耶)
  
  2008년 촛불 앞엔 2004년 '쓰나미' 그 지구 자전축 이동이라는 후천 우주 개벽이 있고 그 앞에는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 사태가 있다.
  
  그때 어땠을까?
  
  똑같은 붉은 셔츠인데도 수백만 젊은이, 어린이, 여성과 외톨이 대중들이 저마다 각각 찬양 만태의 서로 다른 패션들을 뽐내었다. '월인천강'이 아닌가? 화엄경이 아닌가? 그래! 이것이 바로 일원상이 아니란 말인가?
  
  여성전위
  
  그간 익산 원광대학교의 여러 번의 특강에서 역시 여러 번 강조한 이야기가 있다.
  
  '소태산 사상과 원불교는 전 세계 인류의 사상, 동·서양 문명의 모든 진수, 그리고 그것이 다시 고대 회복의 르네상스와 미래 전 세계 문화 대혁명의 예상 속에서 결합된 동학 이래의 19세기 남조선 후천 개벽 사상사, 그리고 당취(棠取) 나름의 화엄선(華嚴禪) 사상이나 김일부의 후천 정역(正易)의 물줄기들을 한민족 정통의 생명 사상인 풍류의 나직한 웅덩이 바탕 위에서 일원(一圓)적으로 결합한 한 연못이다.
  
  지금도 역시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결론인가?
  
  첫째는 여성전위론이다.
  
  마땅히 여성이 일원상 개벽의 주역인 것이다.
  
  또 하나 있다.
  
  일원상 법신불 신앙의 파급권은 단순한 고태적 종교 차원을 벗고 이제부터 서서히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모두 포괄하는 전 우주적 공동 주체들의 모심의 일상 생활 행태인 우주적, 영적 네트워크로서 드러날 것이 분명한 '화엄 세계', '대화엄'의 강한 예감이요, 그 날카로운 전위라는 점이다.
  
  그러나 세 번째가 또 있다.
  
  지난 시절 당취 속에서까지도 '화엄선(華嚴禪)'의 형태로 끝없이 모색되어온 '화엄개벽' 실천의 현대적 전위가 태어날 조짐이 있다. 그것이 바로 마당굿 광대들이다. 희미한 동학의 모심과 개벽 사상의 기억을 마치 촛불들처럼 저마다 각각 제쪼대로 제째대로 제 <좇 꼴리는 대로> 제<멋부리고 싶은대로> 제 안에서 제 밖에서 그러나 한 마당에서 굿으로 새롭게 살려내는 젊은 광대들, 그와 연대해서 지리산에서 피 토한 적도 없고 피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는 판소리 또랑 광대 여편네들, 그 근처에서 웅성대는 쓸쓸하고 초라한 촛불들, 제대로 잘 할 줄도 모르면서 해금을 깽갱대거나 아쟁을 뜯어대는 아이들. 바로 그들이다.
  
  정확하게는 그들 몸, 그 캄캄한 몸. 아토피와 오염과 생식력 상실, 정신 파탄, 생산력 감퇴, 권태, 짜증. 온갖 기괴한 바이러스나 증상에 시달리며 악몽과 푸대접과 절망에 들볶이며, 더러운 교육 아래 지리 밟히며 월급도 별로 못 받는, 그 외로움 속에서도 아무도 알아주지도, 아무도 읽어주지도 않는 괴상하고 컴컴한 병든 시 구절을 끄적거리고 있는 그 버림받은 애들. 바로 그들이다.
  
  수운 이외에 또 한 분의 소태산의 멘토인 강증산 선생은 1904년경이던가 정읍 대흥리 차경석 집에서 어느 날 밤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기 두 번째 아내인 고판례(高判禮)더러 옥황상제를 자처해온 자기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식칼을 겨누면서 "지금 당장 우주 삼계의 대권력을 나에게 넘기시오!"라고 요구하게 한다.
  
  여기에 대해 선생은 두 손을 싹삭 빌며 "네, 당장에 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왈.
  
  "너희들은 바로 이 천지굿을 실천으로 옮겨라!"
  
  그리고는 고판례와 함께 제자들로 하여금 온 마당에 불경, 성경, 사서삼경, 공명첩, 계산서, 어음 따위를 모조리 찢어 벌려 놓고 그 위를 밟고 다니며 스스로 율려라고 불렀던 각설이 걸뱅이 타령에 맞추어 제멋대로의 춤을 밤새도록 추게 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물론 수운에 이어 해월 최시형 선생은 여성을 후천개벽 시대의 타고난 도인으로, 그 포태와 태교와 출산과 교육과 부엌 등에서, 들과 밭에서의 살림과 농사와 온갖 생활 생태 생명 자체를 천지 모심이요, 후천개벽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증산 말처럼 이 시절은 음개벽(陰開闢)의 때다. 여성과 혼돈적 질서가 다스리는 세계다. 율려가 아닌 여율이다.
  
  어머니와 여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서운 어머니와 자애로운 어머니다.
  
  앞이 아닌 뒷 여자와 모성을 중심으로 개벽을 믿어야만 남성과 아이들의 참다운 협조를 얻는다.
  
  나는 원불교에서 가장 놀란 것이 세 가지다.
  
  소태산, 화엄개벽의 예감으로서의 일원상 개벽, 그리고 여성 교무들의 활약상이다.
  
  그중 제일을 바로 여성 교무들의 전위성에서 본다.
  
  왜?
  
  나는 지난 5월 두 분의 어머니, 장모님과 생모님을 연이어 사별했다.
  
  연이은 상중(喪中)에 서울 교구장인 동타원 교무님으로부터 소태산께서 생전에 남기셨다는 중요한 한 말씀을 고맙게 전해 들었다.
  
  '나 이전만 아니라 나 이후에도 수운과 증산은 매우 중요하다. 그분들에게 많이 배우라. 그러면 된다. 그러나 앞으로 나타날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내가 확실하게 해놓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는다.'
  
  정확하지는 않다.
  
  내 입맛에 맞게 수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강은 이런 뜻이다.
  
  아니라도 좋다. 내 희망사항이니까.
  
  내가 이 생각을 실천했든 못했든 그것은 내게 큰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 전체의 대전환, 즉 다시 개벽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니 그리 쉽게 실천되기는 어차피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임에는 틀림없다.
  
  여성 전위론 그 다음의 '화엄개벽'이나 마당굿 광대들, 그 못난이들의 전위 문제도 역시 그 중심은 여성 전위론에 있다.
  
  나는 대종경에서는 발견 못한 것을 최근 '선외록(選外錄)'에서 찾아낸다.
  
  여성 전위론이다.
  
  명확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른바 감(感)이다. 마치 소태산의 '인물'에서 내가 그의 사상보다 더 깊고 큰 우주의 산 비밀을 본 것과 같이.
  
  그의 인물, 그의 삶. 그의 대인접물(待人接物)하는 태도. 그의 죽음에까지 일관하는, 한마디로 그의 인생 전체의 특징이 '여성성'에 있다는 점이다.
  
  여성성과 모성.
  
  그는 1만 4천 년 전 우리 민족의 고향 파미르의 마고성 시대의 천시(天市)와 신시(神市)에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우주율이었고 거기에 따라 인류 최초의 문명이 기획되었다는 바로 그 탁월한 차원의 혼돈적 질식(chaosmos)인 '팔려사율(八呂四律)'은 다름 아닌 소태산 자신의 인생 자체였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여성성 여덟에 남성성 넷의 비율이다.
  
  그것이 그의 인물이었고, 이 일원상 개벽의 사상이었으며, 실천 구조였고, 새 시대의 예감이었으며, 삶과 죽음의 신비의 본질이었다.
  
  소태산의 여성성.
  
  이것이 원불교 여성 전위론과 후천개벽 여성 전위론, 생명 평화 운동 전위론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에 해당하는 남성성이 무가치한 것일 까닭이 없다. 남성의 그 나름의 능력들에 따른 탁월한 역할이 없이는 무서운 어머니 아닌 자애로운 어머니 지배의 평화로운 생명의 균형, 그 기우뚱한 균형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어머니와 부드러운 여성성 중심의 문명사 전환은 남성성의 탁월한 능력의 보필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소태산 전체에서 드러나는 팔려사율의 여율 구조에서 사율의 남성성이 갖는 여러 특징과 인격, 매서운 규율성, 엄격함, 치밀함 등이 그것이겠다.
  
  그렇지 않으면 사납고 무서운 어머니와 여성에 의한 사납고 무서운, 컴컴한 혼돈 일변도의 새 문명사의 어둠이 지배하는 중에 남성은 아이들과 손을 잡고 상고 시절과 똑같은 가부장 일변도 지배의 폭동과 살육, 억압 체제와 율법과 피의 지배를 또 한 번 시도하게 된다.
  
  내 이야기라기보다 '대모론(大母論)'의 저자인 '에릭 노이만'의 대강의 취지다.
  
  원불교 개벽 운동, 특히 문화 운동과 생명 생활 운동에서의 여성 교무들의 생명 평화 살림의 능력이 남성 교무들의 이와 같은 치밀한 이성적이며 조직적, 체계적인 보호와 뒷감당과 더불어 빛을 발하는 미래를 기대한다.
  
  어린이들은 언제 오는가?
  
  '기위친정'의 진정한 주체는 어린이다.
  
  그는 생명평화의 투철한 개벽 교육으로부터만 온다. 문제는 여성이다.
  
  마당굿의 원형인 탈춤에 우리가 좋아하는 '미얄할미(여성, 어머니 마당)' 마당이 있다. 용산 삼개들머리 집 화류계와 바람이 난 가부장 남편에게 부부싸움 끝에 맞아죽은 미얄할미의 불행을 슬퍼하며 남강노인이 마지막으로 외치는 한마디가 있다.
  
  '동창이 밝아온다
  
  아이들아 일어서라!'
  
  남강노인은 비가비(식자 출신) 광대다.
  
  어쩌면 소태산, 바로 그 분인지도 모른다.
  
  '선외록'에서 제자들을 '봉사가 문고리 잡은 것'이라 하여 스스로를 '문고리'로 자임했는데, 기이하게도 '문고리'는 '광대'의 별칭이다.
  
  광대(廣大)는 원만(圓滿)의 또 다른 말이며 '원만'은 남북통일과 함께 후천 우주 개벽의 조건인 것이다.
  
  수운의 시 구절이다.
  
  또 남는다.
  그 원만의 주체가 남쪽의 별(南辰)이라는 것이다.
  
  별이 무엇일까?
  
  2008년 8월 18일
  
  일산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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