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는 신영복 선생이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 신영복 선생은 인터뷰를 원칙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인터뷰이의 의사를 매우 존중하는 사람이니까…'하면서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도 자존심이 안 상했다고 할 순 없었다. 이번 인터뷰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주년을 기념하는 분위기를 타고 마련됐다. 그동안 그가 내놓은 책이 늘어나는 바람에 인터뷰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최근 내가 읽은 책은 물론 <청구회의 추억>이다. 천생 선생님, 그것도 아주 좋은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 선생은 2년 전 성공회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이제는 같은 자리에서 석좌교수로 있다. 마침 매주 목요일에 있는 교육대학원 수업이 개강하는 날이었다. 그의 과목은 사회과학 특강인데 다른 학과생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지만 역시 일선학교 교사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시대의 스승인 그가 학교선생님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오히려 교사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다며 말을 시작한다. 참, 그도 고3수험생을 둔 학부모이다.
"교육에 대해서는 이해당사자가 아닌 이가 없습니다. 대부분 학부모이고 학생이니까요. 아파트나 증권문제 이상으로 전문가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학교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학생중심으로 이야기하자고 해요. 지금 중·고등학생들, 교실에서 앞줄 몇 명 빼고는 공부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가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중고등 학생시절 6년을 그렇게 학교교실에서 자야 되고 학원을 뛰어다녀야 하는 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입시평준화문제 보다도 학생을 중심으로 두는 일을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언젠가 서울대 입학식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그릇을 키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학시절을 취직시험 공부, 토플토익에 매달리기보다 자신의 앞에 펼쳐질 인생을 더 큰 안목으로 바라보며 준비해야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대학이란 게 대학 본연의 고유성이 소멸되고 시장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공간이 되고 말았어요. 교육공간의 특수한 자치도시적인 그런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청년실업이 닥쳐서 학생들이 급급하지요. 그럴수록 대학은 인생에서 중요한 기간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마음은 급하다. 학부모들의 심정은 더욱더 조급하다. 긴 안목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당장 발등에 불을 꺼야겠다는 생각에 우왕좌왕…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부모가 갈팡질팡 하지 않고 소신껏 자식을 키울 수 있나? 그라면 좋은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하세요."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자신의 입장을 정한 듯 명쾌하게 대답을 내놓는다.
"자식이란 게 부모의 분신이고 부모의 삶이 자식이라는 개체를 통해서 존속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인지 부모는 자식을 자기문제로 여기며 자식에게 관여하지요. 그러나 어느 부모도 자식의 전 생애를 같이 할 수 없어요. 그들이 맞이할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봐도 그렇고, 아이들은 고등학생 무렵이면 부모를 비판적으로 보기시작한다고 한다. 부모들이 구석기형 경험을 내놓으며 따르라고 할 때 순순히 따라갈 애들은 없다는 말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살아갈 2020, 2030년에는 정치권력, 경제력 이런 게 삶의 중심에 있지 않고 문화적, 인간적, 인문학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은 자유롭습니다. 우리 세대보다 개방적이고 가치지향에서 다양하고 자기를 부단히 변화시킬 수 있지요. 어른들은 고생할까봐 물질적 토대를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제 경험으로 보자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고생스러워도 괜찮아요. 오래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오래 견디다보면 그 분야에서 세속적인 성공은 아니더라도 뭔가를 이뤄낼 수 있거든요. 그게 가치 있는 것 아닌가요? 젊은 시기에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는 것은 비극이에요. 그릇을 키우라는 것은 역량을 키우라는 것이긴 하지만, 현재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멀리 보는 게 중요해요. 젊은이들이 더 오래 살 것이니까요."
그는 학부들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신이 굳어있다는 것 알고 있는가?"
그는 부모들이 변화하지 않는 사고로 변화하는 세계, 변화하는 자녀의 삶에 관여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변화'에 관한 한 그보다 더 진실한 목소리로 말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보낸 20년 20일을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조하는데 바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변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했다.
"처음엔 면벽 명상을 했어요. 지나간 일들을 추체험하게 되지요.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겪은 일들을 다시 리콜해서 체험하게 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요. 그런 가운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거지요. 나의 기본적인 화두는 자신을 성찰하고 소통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변화는 '나는 누구인가', 즉 자신의 주체성, 정체성을 성찰하는데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신영복이 처음 발견한 '그 자신'은 관념의 소유자, 가녀린 흰 손을 가진 스물일곱밖에 안된 지식인 청년이었다.
"감옥 들어가서 처음엔 충격적이었지요. 만난 이들이 대부분 절도, 강도, 살인을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처음 대했을 때엔 그들을 타자화 하지요. 저들과 나는 다르다, 그들을 대상화하고 타자군으로 분석하는 것이죠."
그러나 오래지 않아 창백한 인텔리 청년은 그들과 나란히 서게 된다. 대상으로만 여기던 그 타자들이 욕지거리를 섞어 내뱉는 신산한 사연들을 들으면서, 노역시간에 함께 땀을 흘리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 나도 교장 아들로 태어나서 사택에서 곱게 자라지 않고 저들처럼 가난하게 자랐다면, 부모 사랑은커녕 한 끼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살았다면 저리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존,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그는 배웠다. 그는 몸으로 자신을 변화시켰다. 양재공장에서 징역살이를 하며 그는 재단사가 되었다. 신사복 상하의를 너끈하게 지어낼 줄 알게 되었다. 제화공장에서는 반장이 되어 구두를 만들었다. 원피를 펴놓고 치수를 재어 이리저리 구두를 만들어 냈다. 목수 일도 수준급 이상이다. 감옥에서 익힌 미싱 솜씨는 출소 후 친구 집에 가서 커튼을 만들어 달아주는 일을 아주 쉽게 하게 했다. 일을 하는 동안 그의 발이 든든하게 땅에 닿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사고의 틀까지 바꾸게 되었다.
"역사상의 많은 실천가들이 사회변혁에는 성공했지만 자기변혁에는 실패했는데, 나는 사회변화에는 실패했지만 나 자신의 개조와 변화에는 성공했다는 그런 성취감을 가질 수 있었지요. 남들에게는 말 못할 성취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는 자신의 변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20년을 보냈고 출소 후 다시 20년이 흘렀다. 안과 밖 각각 20년 동안의 변화를 그는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감옥에서 20년 동안 나는 엄청나게 변했지만 사회는 안 변했다고 생각해요. 출소 이후 20년간 우리사회의 변화가 엄청나지요. 그 속도도 빠르고 폭도 아주 컸지요."
발전이나 소득의 증가, 건설. 우리사회는 많이 변했다. 그러나 표피적인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다.
"사실 한 사회가 현상적인 변화보다는 구조적인 변화에 더딘 게 사실입니다. 부모들은 그걸 아니까, 저 완고하게 버티고 있는 사회적 구조를 알고 있으니까 아이들이 말하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저어하지요. 그럼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많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신입생들과 만나보면 알 수 있어요. 젊은이들을 통해 나는 어디가 굳어 있는가 반성하게 되지요."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물을 통해 다시 이야기한다.
"오대산에 떨어진 빗물이 어떻게 서해바다로 가는지 아세요?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해요. 오대산 돌멩이는 서해까지 못갑니다. 그냥 어디 계곡에 박혀 있을 뿐이지요. 물처럼 자유로울 때 우리는 어디든 갈수 있어요. 이제까지 우리 사회 운동하는 이들이나 그 담론구조가 돌멩이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강한 주체, 강철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그래야 유리창을 깰 수 있고 저력을 갖고 있고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돌멩이는 유리창밖에 못 깨요. 엄청난 폭포로 쏟아지는 데 비하면 돌멩이는 초라하지 않아요? 엄청난 파도의 위력을 돌이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돌멩이는 바다에 이르지 못합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바로 자유로운 변화, 부단히 흘러가는 구조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시민단체에 대해서도 그런 구조를 지향해야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젊은이들이야말로 그러한 변화의 선두에 서 있다고 한다.
"촛불집회를 보세요. 이것은 기존사고가 못 따라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전부 돌멩이 만드는 것에 집중했지요. 모두 어디 서브에 접속해야만 하는 웹 1.0의 사고체계를 갖고 있었어요. 서브가 없으면 자신의 역할도 할 수 없는 존재였지요. 지금 정치인들이나 각 사회운동단체, 노조도 마찬가지로 웹 1.0단계예요. 이제 이런 것이 깨졌어요. 촛불집회에 나온 젊은이들은 위로부터 명령에 익숙한 사람들, 동원에 충실한 군중이 아니에요. 웹2.0이죠. 창의적이지요. 자기 자신이 모두 서브예요. 누구 명령받고 온 사람 없어요. 그럼에도 여러 운동단체들은 촛불의 저력을 자기의 운동단체 역량으로 퍼 담을 수 없을까 하고 애써요. 무슨 연대, 무슨 단체 대표로 서서 성명서 읽고 깃발 들고 있지요. 시대착오적이에요."
안타까움에 잠시 그의 언성이 톤을 높인다. 그는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전형을 고민하라고 강력히 요구한다.
"병사 하나하나 모아가며 수적으로 더 많은 이들을 결집해내려고 하기보다 새로운 부대창설을 하려고 해야 해요. 새로운 전형의 창조가 그러한 위력에 비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감옥가기 전 그는 대학에서 가르쳤고 출소 후에도 그는 바로 대학 강단에 섰다. 또 스스로 감옥에서의 시간을 자신의 '대학시절'이라고 말하니 그는 평생을 대학에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감옥생활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수의를 입고 서울 시내를 다닐 수 있었다. 수감생활 18년 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에 6일간 귀휴를 얻어 나왔다. 그때 교도관이 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권했는데 그는 괜찮다고 했다. 죄수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친구들이 얼굴을 보자고 성화하여 롯데호텔의 커피숍으로 나갔을 때도 그 옷을 입은 채였다. 왜? 그로서는 감옥에 있다는 게 거리낄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키색 상하의 수의를 입고 특급호텔에서 커피를 마신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20년간 스테디 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 등. 서점에 가면 '공부해야할' 고등학생들도 그의 책을 서서보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본다. 많은 이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산다.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글쎄요. 요즘은 스승이 없는 시대 아닌가요? 연암 글에 보면, 스승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여기는 길이란 이미 명백하잖아요? 도달해야할 목표는 확고하게 두고 서로 경쟁적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스승이 없는 사회지요. 이 사회는 물질적 풍요, 화폐적 가치라는 하나의 가치로 환원되어 있는 천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모두가 확고하게 믿는 그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아마 그의 독자들이 그러지 않을까. 그에게는 100만의 독자가 있다. 우리사회가 앞 다투어 달려가는 목표와 다른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내가 위로를 받아요. 인간이란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존재이니 사회적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데, 대단히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과 독자가 3단계를 통해 만난다고 한다. 그의 경험상 독서란 텍스트를 읽고, 그 다음 필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독자인 자기 자신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독이라고 한다. 독서란 결국 필자와 독자의 공감인 것이다.
"제 책을 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이 많이 읽어요. 맨 처음엔 군대에서 읽었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하하하… 감옥이나 군대나 갇혀 있다는 점에서 같다고 본 것이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교무실에서 벌 받다가 얼핏 책 제목 부터 보고 읽기로 마음먹은 이도 있다. 학교가 감옥이지, 어디 다른 데가 감옥이냐 싶은 마음에.
바쁜 듯 '바깥세상'을 활보하는 이들도 실상은 모두가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믿는다.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 실정법, 심지어는 교통신호, 주택가격에도 우리는 갇혀 있지 않습니까? <사색>의 오랜 생명력은 갇힌 필자와 갇히지 않는 독자와의 일정한 공감이 지속적으로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분석적이니까, 그냥 징역살이 오래한 필자를 측은하게 여겨서 책을 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하…"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들은 그가 참 발랄하고 명랑한 성품의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가 오래 바라본 시멘트 벽의 회색빛에 그의 밝음은 침식당했을 것이다. 그가 출소했을 때 친구들이 그를 위로한다고 "야, 너 하나도 안 변했어"라고 해서 그를 섭섭하게 했단다. 20년 바쳐서 다른 것 다 버리고, 잃고, 유일하게 건진 것이라곤 '나 자신의 변화와 개조'였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사실 바깥세상에서 살아온 친구들이 안 변했더란다. 그래서 그는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과연 난 변했나?'
그가 안에서 치열하게 안고 산 고민이 밖에서 사는 현대철학가들이 안고 있는 과제와 같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변화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지금 잠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실은 자신의 사고가 아직도 근대적인 사고의 틀을 못 벗어났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변화와 개조라는 사실마저도 그가 지극히 개인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깨달았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주체는 맥락 속에서,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변화란 그 배치를 얼마나 잘 수용하는가의 문제라는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변화란 잠재적 가능성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고 현실적으로는 사람들과 함께 설 때 충분히 같아질 수 있는 형태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변화란 개인단위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아닌가…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자기가 배치되는 지점에 따라 생각이나 정서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 나는 변화했다고 일단 이해해도 되겠다 싶어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하…"
무감어수 감어인( 無鑒於水 鑒於人, 물에다 자신을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자기를 비춰보라). 오래전 그의 말이 다시 울린다. 우리가 이뤄내야 할 변화, 그 시작은 물론 내 안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 그 종국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앞에 서있는 그 사람, 그의 몸짓과 눈빛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서로가 함께 이뤄낸 변화에 같이 기뻐할 때야말로 나는 진정한 변화에 다다른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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