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올림픽은 3차례 열렸다. 1964년 동경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그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열린 올림픽을 살펴보면, 올림픽 개최와 경제발전, 그리고 국가 위상과는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일본은 1964년 올림픽을 계기로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한국은 1988년 올림픽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일인당국민소득(per Capita GDP)은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이나, 국민총소득(GDP)은 이미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나라이며 머지않아 독일, 일본을 추월하고 미국 다음으로 큰 경제를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정설이 되어 버렸다.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올림픽 경기에서도 종합 우승을 해 중국은 더욱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잠룡이 아닌 중국에 대한 선진국들, 특히 미국과 일본의 견제의 경각심도 한층 높아졌다.
후진타오의 방한과 불능화 중단 선언
한반도에서는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8월 25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올림픽이 끝난 바로 다음날 한국을 공식 방문한 것이었다. 후진타오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8월 26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음으로써 10.3합의를 위반했다고 하며 그 대응조치로서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중단하고 원상복귀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과 북한의 핵시설 불능화 작업 중단선언은 혹시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후진타오 주석의 한국의 방문과 북한의 발표는 사전에 준비된 것으로써 후진타오의 한국방문이 북한의 발표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역학(dynamics)을 농축 적으로 담고 있으며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9.11사태 이후 북미관계는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가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핵실험 약 1년 후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은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2차 회의를 열고 핵시설 연내 불능화 및 전면 신고 합의했고 2008년 4월 미국의 힐 차관보와 북한의 김계관 부상이 싱가포르에서 양자회동을 갖고 북핵 신고에 관한 잠정 합의를 보았다.
이때부터 북핵문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북핵문제 해결의 종착역은 북미관계 정상화이다. 북한으로서는 사활이 걸려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고 북미관계 정상화에 '올인'하고 있다. 그런데 '북미관계 정상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대국간의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것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미관계 정상화는 북한과 미국이 서로에게 호혜적인 국가가 된다는 말이다. 즉 북한이 친미(親美)국가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는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이 친미국가로 된다는 것은 동북아 국제관계의 방정식을 바꾸어 놓을 만한 일이다. 그러면 미국은 왜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하려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중국의 부상을 놓고 '새끼호랑이론'이 한때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호랑이와 같은 맹수이기 때문에 중국의 부상을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미국에서 이러한 중국위협론이 고조되고 있을 때 중국은 자신의 국가전략을 화평굴기(和平堀期)로 규정하고 경제발전에 매진했다. '화평굴기'란 중국의 평화로운 등장을 강조하는 용어로, 이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중국의 등장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 그리고 냉전시기 소련의 발전과는 차별이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들 세 나라의 경제발전 목표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있었다면, 중국의 경제발전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또한 평화로운 발전을 촉진(促進平和發展)한다는 입장의 '화평굴기'는 미국 주도의 일극체제를 인정한다는 면이 강조됨으로써 미국에서 고조되고 있는 '중국위협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제시된 논리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아무리 화평굴기를 강조해도 이번 올림픽에서 본 것과 같이 중국은 이미 호랑이 또는 용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경제의 힘
미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의 경각심이 다시 고조된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문제가 불거지며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인 씨티은행이 유동성 위기를 겪게 되면서이다. 씨티은행이 유동성 위기를 넘기게 해주었던 것은 중국 및 아시아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였다.
국부펀드란 정부가 통화당국의 외환보유액과는 별도로 재정 흑자 등의 외화 잉여 자금을 재원으로 조성해 수익성 위주로 운용하는 투자기구를 말하는데 국부펀드의 성장은 원천적으로 각 국가의 외환보유액 증가에 기인한다. 중국은 현재 약 1조3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외환을 보유해 외환보유액 세계 1위이다.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2007년 합동으로 발표한 미국채권 해외소지상황보고와 <블룸버그>의 통계에 따르면 2004~2007년에 중국의 미국채권소 지는 3410억 달러에서 3배 증가, 9220억 달러를 기록했고 그 중 4140억 달러(올4월 기준)가 미 재무부가 발행한 채권이었다. 또한 중국이 구매한 미국증권은 그 총액이 1조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중국은 페니매와 프레디맥의 최대채권자로서 3760억 달러의 채권을 소지하고 있다. 만약 중국이 미국채권을 판다면 미국으로서는 심각한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경제면에서 이미 중국은 새끼 호랑이나 잠룡이 아니다. 이러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은 미국으로서 사활이 걸린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페트(pet)라고 할 만한 일본을 동맹으로 갖고 있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동맹국이나 한국은 미국의 입장에서 안정적이지 않은(unstable) 파트너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최대무역국은 2003년부터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으며 중국은 한국의 최대 투자국이며 양국은 매년 400만 명이 넘는 인적 교류를 하고 있다. 중국의 영향력은 한국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는 실정이다.
북한의 미사일이 겨냥하고 있는 다른 곳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에게 이상적이지 않지만 실용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중국에 영향을 받고 있지만 중국으로부터 독립적이고 대등한 관계에 있다. 북한과 미국이 관계정상화를 한다면 북한은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친미국가가 될 것이며 미국은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북핵문제가 진전되면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들 중 하나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관한 문제는 논의되지 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미국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핵무기를 접어두고 (또는 인정하고) 핵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위협할 수준은 못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베이징과 상하이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요도시는 모두 북한이 대량보유하고 있는 스커드형 노동미사일의 사정거리에 들어온다. 스커드 미사일에 핵무기를 탑재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이런 점들이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다면 미국이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단지 부시가 임기 중 마지막으로 외교적 성과를 올리려는 단순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국익을 위하고 극대화하려는 미국의 외교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 올림픽 즉후에 이루어진 후진타오 주석의 한국 방문이다.
양국 정상은 한중간 상호협력 확대와 지역 및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 인류 발전을 위해 협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5월 '한중 공동성명'을 기초로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전면적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하고 경제 분야에서 2000억 달러 무역액 달성 목표를 2010년으로 앞당기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점이다. 또한 양국 국방 당국 간 고위급 상호 방문과 상호 연락체제를 강화하고 다양한 직급과 영역에서 교류, 협력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이것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면 '동맹' 관계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양국관계가 그런 수준까지 갈 것이라는 것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그러나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은 미국에게 한반도에서는 미국의 영향력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북한이 8월 26일 전격 발표한 불능화 중단 선언은 아직도 미국 외교의 우선순위(priority)가 되지 못하는 한반도의 중요성을 미국에게 다시 한 번 상기(remind)시켜주기 위해, 후진타오 주석의 방한 시기에 맞춰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바야흐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외교전이 가속화 되고 있다. 공식 정책으로 한미동맹을 외교의 기조로 삼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더욱 중국과 가까워지고 있는 한국은 '캐치22'(catch 22, 미국 작가 조셉 헬러의 소설)적인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외교는 철저히 국익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상황 대응적이 아니라 좀 더 장기적인 비전(vision)을 갖고 추진되어야 한다. 국익은 눈에 보이는 돈의 개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국민과 민족을 위하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위해서는 힘센 동맹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 속에서 유연하지만 내실 있는 외교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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