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 목포 전통마당극 페스티발 특강에서와 같이 이번 8월 21일 정농회 강연 원고를 준비하는 것을 계기로 최근 촛불에서 제기된 먹을거리의 문제, 우리들 식단의 생활생명가치의 문제를 유기농운동 차원에서 한번 본격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강연과는 너무 먼 100매 이상의 거대한 장광설이 되고 말았다. 잘된 원고라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소년들과 젊은이들, 여성들, 그리고 생명운동 관련자들에겐 조금의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 강연 원고와 지난 7월 26일 것 이외에도 천도교 강연들, 앞으로 있을 부산대 철학과의 창립기념 강연 등등이 대체로 이런 비슷한 정황의 산물들이다. 자칫 해괴한 느낌을 드릴 것같아 해명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요즈음 내가 촛불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디지털 식으로 키포인트, 키워드 중심의 단문으로 쓰려고 애쓰는데 여전히 나는 갈데없는 아날로그 장광설이다. 어쩔 수도 없지만 어느 날에야 좋은 '디지로그'가 꽃 필 것인지.
내용이 실하든 어떻든 간에 한 가지 참으로 기이한 일은 내 스스로 촛불에 관련하여 무엇인가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겠다고 희미하게나마 생각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그와 연관된 곳에서 특강 요청이, 그것도 바로 이 시기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무가내'라고 하는 바, 도무지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니 기이하고 기이하다. 아무래도 촛불과 함께 개벽의 때가 오고 있다고밖엔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김지하 모심
'새로운 생명 운동의 길'
나는 농부가 아닙니다.
농업에 관한 특강을 할 만큼 농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늘 특강의 제목이 농업이 아니라 생명운동인 것이 바로 그 증거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루돌프-슈타이너는 결코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농부가 아닌 그가 독일 유기농 운동, 독일 녹색 운동, 그리고 대안 영성 교육인 '발도로프 학교'의 창시자였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새로운 생명 운동의 길.'
참 좋은 제목입니다.
먼저 정농회 창립 30주년을 축하드리며 오늘 저의 강의가 혹시라도 공자 앞에서 문자 쓰기가 되지 않기를 빌겠습니다.
1980년 겨울, 기인 감옥살이에서 풀려난 제가 처음 피력한 포부가 바로 생명 운동이었고 그 첫 마디가 '밥 한 그릇이 만사지(萬事知)다'였습니다.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선생 말씀입니다.
밥 한 그릇이 무엇이지요?
여러분 앞에서는 참 못난 질문이 됩니다만 사실에 있어 밥 한 그릇이 무엇인가를 알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만사지는 또 무엇입니까?
무엇이관대 밥 한 그릇이 곧 만사지라는 겁니까?
이 만사지를 조금은 알아야 답이 나올 듯합니다.
동학 주문(呪文)의 맨 마지막 말입니다만 우선 '만 가지 일을 다 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밥 한 그릇을 잘 먹으면 만 가지 일을 다 알게 된다는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참말 그렇습니까?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은 스스로 이 '만 가지 일(萬事)'을 해설해 '수의 많은 수(數之多)'라고 풀이합니다. '수(數)'가 무엇이지요?
어려워졌습니다.
우선 '1,2,3,4,5,6'이 수지요? 그다음 '100, 1000, 10000, 100000'이 수지요? 그 수의 계산은 어떻게 하지요? 칼로 금을 긋거나 돌멩이를 쌓아 올리거나 새끼를 꼬아서 표시했지요? 옛날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 수의 계산이 수학의 시작이요 음악의 시작이요 문자의 시작이요 법률의 시작이며 천문과 역사와 철학의 시작이었습니다.
한술 더 떠 신비주의와 마술, 계산기와 뇌 과학과 컴퓨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저 유명한 주역(周易), 그 주역을 밑에 깔고 우뚝 일어선, 이제부터 한국이 자랑해서 마땅한 19세기의 정역(正易), 그리고 동서양의 무수한 우주론과 과학들이 모두 다 '수'올시다.
그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동과 서, 옛날과 오늘, 개별적인 것과 총체적인 것,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중간에서 앞으로, 중간에서 뒤로, 제로와 하나, 드러나는 것과 숨어있는 것, 열리는 것과 닫힌 것. 이 모든 것이 '많음'입니다.
바로 이 '만사'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선생의 해설은 이 '안다(知)'를 '스스로 그 진리를 공부해서 알면서 또한 그 앎을 하늘로부터 받음(知基道而受基知)'이라고 풀이합니다. 독공(篤工)'과 계시(啓示)의 합발(合發)을 뜻합니다.
옛 선비들 문자로 하면 추측(推測)과 신기통(神氣通)의 일치입니다.
이것이 '만사지'올시다.
그런데 바로 밥 한 그릇이 곧 그 어마어마한 우주적 학문 세계의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밥 한 그릇을 제대로 못 먹으면 그 모든 의미 있는 사업을 해낼 힘이 없다는 뜻이라거나 밥 한 그릇 속의 그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과 우주의 온갖 것이 다 협동해야만 된다는 뜻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백 번 옳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 한 마디는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갑니다.
'밥 한 그릇이 만사지다'란 말씀의 주인공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그 이듬해인 1895년, 숨어 있던 자리 경기도 이천군 설성면 영산동에서 수운 선생 득도 일인 4월 5일 만물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대낮 정오에 수운 선생 제사를 지낼 적에 동서고금 온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의심받거나 변경돼 본 적이 없었던 제사 방식의 일대 혁명을 단행합니다. 저기 저쪽, 벽을 향해 음식을 차리고 멧밥과 신위를 벽 아래 저쪽에 설한 뒤 그쪽을 향하여 절하고 비는 '향벽설위(向壁設位)'를 문득 거꾸로 뒤집어 벽쪽에 있던 멧밥과 신위를 번쩍 들어다 이쪽, 즉 제사 지내는 상제(喪制)인 내 앞에다 갖다 놓고 내가 나를 향하여 절하고 비는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선생은 그때 '앞으로 오만 년 동안 바꿀 수 없는 법을 내가 오늘 지었다. 만약 선생님이나 조상의 영이 지금 오신다면 생명 없는 벽 근처에서 어슬렁거릴 까닭이 있겠느냐? 반드시 살아있는, 대낮의 영인 내 안에 오시지 않겠느냐? 생명의 밥을 바로 이 산신령에게 바쳐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이로써 우주 억천만 년의 세월과 수수억 천만의 신명과 사물과 간 사람과 올 사람과 온갖 동식물과 물건들과 갖은 생각과 경우와 일과 생명들이 바로 지금 여기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니 지금 여기로부터 옛날로 훗날로, 수수 겹 층의 우주로, 우주 그 밖의 또 수많은 우주로 나아가고 다시 내안에 끝없이 지금 여기로 되돌아오는, 마치 들숨 날숨과 같은 산 한울님인 내게 바치는 바의 참다운 뜻을 또한 알게 될 터이다. 한울님의 그 한울다운 신령한 활동을 불붙이는 바로 그 한울의 힘이 곧 밥이 아니겠느냐!'
인간을 소우주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대우주 그 자체입니다.
혹시 대우주이면서 동시에 소우주라 한다면 그다지 틀린 말이라고까지 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왜 그럴까요?
수천년 전 고조선 당시에 유행했다는 '천부경(天符經)' 안에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人中天地一)'는 말이 있고 또한 그 당시 함께 유행했다는 '삼일신고(三一神誥)' 안에 '신은 뇌 속에 내려와 있다(神降在爾腦)'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또 무엇을 뜻하는 말이겠습니까?
인간의 몸 안에는 우주 태극의 사상(四象)과도 같은 여러 장기계, 혈관과 내분비계, 신경계 이외에 우주 역수(曆數)와 똑같은 365가지 경락(經絡)과 기혈(氣穴)이 움직이고 있고 그 경락계는 다시 표층과 심층이 따로 있어 서로 드러나고 숨는 상호생성연관을 계속하며 내외단전(內外丹田)들의 매우 창조적인 영적 활동과 함께, 그리고 들숨 날숨의 우주적 호흡(呼吸), 무수히 소멸하며 무수히 태어나는 세포나 숨구멍들, 눈·코·귀·입과 생식기, 항문 등을 통해 온 우주로 확산하면서 거의 동시에 몸 안으로 수렴, 수축하는 끊임없는 안팎의 역동 속에서 비로소 산 균형을 잡는 생명 형식(life form)이 살아 움직입니다. 이른바 기(氣)의 활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피부라는 가죽 부대가 곧 몸이라는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
기(氣).
이 기는 전 우주적인 활동이지 어떤 작은 육체 속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개체성 속에서 이 우주적 전체의 융합 활동이 진행됩니다. 이른바 '개체-융합(identity-fusion)'이지요. 그러나 개체-융합을 겉으로는 드러내면서도 어떤 사람들처럼 '낱' 또는 '개체'와 '온' 또는 '전체'가 따로 있어서 그 '온'의 우주적 중추신경계의 통합 작용이나 그 전체의 이른바 '통섭' 기능의 절대적 통제력에 의해 비로소 '낱'과 '개체'가 움직인다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더욱 음험해진 '에코-파시즘'은 전혀 잘못된 껍데기 관찰에 토대한 망상적 우주생명관이올시다.
어쩌면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 제가 이 이야기를 기일게 늘어놓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기(氣)는 반드시 정신을 동반합니다. 따라서 경락이나 기혈 또는 호흡이나 일체 역동은 인간 몸과 우주를 드나드는 영적 정신 작용이기도 합니다.
이미 현대 뇌 수학은 전신 두뇌 설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대뇌 등의 판단이나 명령 이전에 지체나 감각들이 반사 작용이나 자극에 적극 반응하는 일체 현상이 뇌 활동임을 증명해 내기 시작합니다.
20년 전 일본 분자생물학계는 배꼽 밑에 있는 하단전 기해혈(氣海穴)이 소뇌(小腦) 기능, 즉 전 육체 활동의 균형을 잡는 조절력을 행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 뇌생리학의 칼 프리브람은 홀로그램이론으로 전 우주의 초신성(超新星) 폭발이나 블랙홀 등의 대파동이 인간 뇌세포 속에 그대로 복사함을 입증합니다.
90%의 뇌세포가 잠자고 있다는 일반학설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잠은 죽음이 아닙니다. 마치 돌멩이와 물방울과 쇠붙이 안에도 비록 극히 미약한 정도, 제한된 차원에서일지라도 생명과 영이 활동한다는 현대 진화론이 진실이라면 90%의 잠자고 있다는 뇌세포 안에서야말로 신(神)의 폭발적인 창조적 진화 과정이 안팎으로 역동하는 놀라운 잠재력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경락학은 '참동계(參同契)'와도 연속됩니다. 인간 몸 안의 우주 생명 활동은 주역에서 강조하는 철학적 의미 맥락에서 매우 중요시 되는 바 음양, 오행, 팔괘, 삼관(三關), 절기, 음양승강(높낮이), 진퇴(나아가고 물러감), 육십사괘의 방원(모나고 둥근 것) 등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우주, 특히 땅으로도 연속되는 것입니다.
지구 역시 수많은 표층, 심층이 경락계와 기혈이 포치하고 있으며 안팎 여덟 개의 단전이 활동하고 있음을 한국자생 풍수 지리학은 특별히 중세 이후 내내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 활동은 인간 육체의 기 활동과 그대로 연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부라는 이름의 가죽 부대가 결코 아무 소용없는 헛것은 아니올시다.
비록 구멍이 숭숭 나고 끝없이 무너지고 생성하는 세포운동 그 자체입니다만 여하튼 닫혀있다는 점에서는 '나'요 열려있다는 점에서는 '우주'입니다.
이것은 대기권과도 똑같아서 열려있는 점에서 에너지는 통과하지만 닫혀있는 점에서 물질은 통과 못합니다. 에너지 기구이지만 역시 물질인 로케트 사고가 제일 많이 나는 지점은 바로 이 대기권인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환경이란 말을 흔히 씁니다. 생명과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환경이라는 말을 계속 쓰고 있는 한 이른바 환경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환경은 그야말로 우리들 인간의 둘레 영역(環境)일 뿐입니다.
독일어의 Umwelt은 영어의 Environment인데 모두 다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라는 이름의 하잘 것 없는 들러리, 죽은 물건들의 무대 장치 이상을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인간 생명은 바로 이 환경을 즉 온 우주와 지구생태계를 제 안에 또는 밖에 연속적으로, 상호 관계적, 다양한, 복층적이고 순환적으로, 더 정확하게는 나아가고 들어오는 반복적 확산, 수렴, 즉 확충(擴充·Amplification)하는 총괄활동, 즉 융합(融合)입니다. 다만 그것을 개체 개체가 자기 나름으로 인식하고(各知) 실천할 뿐입니다. (동학의 '各知不移')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돼 있다(人中天地一)'는 천부경의 말은 결코 비과학적인 추상어가 아닌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또한 '수의 많음(數之多)'이니 바로 이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계시 받게 하는 힘의 원천이자 뜻의 불쏘시개요 거룩한 제사의 정향(定向) 즉 방향성이 곧 '밥 한 그릇'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밥을 먹습니까? 밥 한 그릇은 이미 누구나 알듯이 해와 달, 비, 바람, 땅, 물, 벌레, 계절의 순환과 기의 유통, 공기, 기후, 그리고 사람, 종자, 연장 등등 이 모든 총 우주 역량의 행동 그 자체입니다. 이 우주의 힘을 우주 생명인 인간 몸 안에 바치는 것입니다.
해월 선생이 밥의 이치를 가리켜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것(以天食天)'이라 한 것은 신비주의나 시적 메타포가 아닌 사실 그 자체입니다. 왜요? 왜 그런가요? 한 번 물어봅시다.
사람에게 밥이 왜 중요한지를 이제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굶주림일 것인가?
하물며 화학 비료가 들어간 밥일 것인가?
하물며 방부제와 색소가 들어간 밥일 것인가? 태평양 건너온 방부제 범벅의 캘리포니아 쌀일 것인가?
성장 촉진제가 들어간, 암을 유발하는 한 겨울의 새빨간 딸기일 것인가?
기름으로 기름으로만 뒤발하는 하우스 농작물일 것인가?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미친 쇠고기이어야 할 것인가? 컴컴한 감옥인 닭 공장의 닭, 돼지 공장의 동물 사료 먹는 그 돼지고기들일 것인가?
이 위대하고 탁월한 인간의 우주적 영적 생명의 활동과 그 활동의 깨침을 위해 우리는 그 자체 또한 우주적 협동의 결과인 밥 한 그릇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팔아먹으려 들어야만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싼 값으로 개밥처럼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불순물을 섞어 내팽개치듯 사람의 아가리 앞에 내밀어야만 할 것인가?
어린 자식이 극도의 아토피로 괴로워한다고 울며불며 젊은 가난한 엄마가 청정유기농 산물 가격이 언제나 내려가느냐고 읍소하는 데에 대해 소위 생명 운동을 한답시고 유기농 유통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간부 입에서 가라사대
"시장이 내리면 우리도 내린다."
말인가, 막걸린가?
장사꾼인가, 운동가인가?
이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이므로 반말입니다.
온난화만이 아닙니다. 간빙기(間氷期)가 끼어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극도로 더웠다 극도로 추웠다 다시 갑자기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는 괴변이 올 것이라 합니다.
온갖 해괴망측한 바이러스들이 다 출현해 대전염병 시대가 창궐하리란 예측이 과학계에 파다합니다. 생태계는 이미 파괴, 오염, 변질, 멸종되는 위에 이상 변종이 출현, 반드시 죽어야 할 조건에서 죽지도 않는 괴이한 동물들, 거기에 이미 끝났다고 생명 과학계 전체가 결론을 낸 진화가 다시 시작 되고 있습니다. 재작년인가 '네이처'지에 영국의 '마이클 위팅'이란 과학자가 수천만 년 전에 이미 퇴화돼 버린 곤충 겨드랑이의 날개가 다시 돋아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양 과학계를 모두 합쳐서도, 솔직히 말해서 심층 생명계를 아직도 잘 모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이아 이론으로 지구 생명체의 미래를 그리도 낙관하던 영국 과학자 제임스 레브릭이 이제 가이아는 더 이상 지구 유기체를 조절하지 않기로 했다고 도리어 복수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이 무더위를 피하려면 북극이나 시베리아로 가야 한다고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똑 난장판의 장사꾼 말투입니다.
그런데 북극과 시베리아는 어떤가요?
동토대 밑에 묻혀 있는 메타층이 폭발해 도리어 따뜻해지고 있고 북극을 형성하는 두 개의 극, 지리(geographic pole)와 자기극(magnetic pole)이 상호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대 빙산의 해빙은 단순한 기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서구 과학계는 26만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몇 년 전 인도네시아의 '쓰나미'의 원인이 대륙판과 해양판 충돌때문이었고 또 그 근본 원인은 지구 자전축의 이동에 있다는 소수 학자들의 매우 탁월하고 우수한 학설을 미신으로 몰아 단죄합니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서남방으로 경사되었던 이 지구자전축의 제자리 복귀 운동이 19세기 후천개벽사상사의 탁월한 역과학(易科學)인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서 뚜렷이 제시되고 그와 함께 남반구 해수면 상승 등을 천재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데 대해 전혀 무식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역시 미신으로 신비주의로 단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동양 것들이 뭘 알아?' 그런 겁니까? '아시아적 생산양식! 전체주의! 그 따위 가지고 우주를 뭐 어떻게 해?' 그런 것입니까?
그러나 19세기의 천재 의학자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의 주장을 한 번 경청해 본다면 생각이 아마 변할지도 모르겠군요.
옛사람들에 비해 근대인들의 몸에 온갖 해괴한 병들이 많아진 까닭은 그동안 자전축과 함께 지구가 서쪽 방향으로 심하게 경사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참고로 동무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즉 '사상의학'을 한 번 읽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도 미신이요 신비주의에 불과한지?
동무는 성명(性命)이라고 부르는 영적 생명의 숨은 차원이 사단(四端)이라고 칭하는 드러난 차원의 우주적 사상(四象)과의 일원적(一元的) 생동성을 바로 확충(擴充) 원리로 보고 그에 준하는 '확충법'을 임상 치료법으로 활용한 사람입니다.
동아시아 사상이 무식한가요? 아니면 서구과학이 무식한가요?
정신 치료에 확충법을 사용한 '카를 융'의 이름을 듣고 대번에 존경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이제마'의 확충법은 미신일 뿐이요 무식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은 옳은 짓입니까?
'카를 융'의 그 임상 방법의 근원이 동아시아라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도 말입니까?
어떻든 우리가 사용하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너무 단순하고 빈곤하지 않나요?
너무 쉽게 보고 너무 단편적으로 보지 않았나요?
더욱이 이 복잡한 무시무시하고 영검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원리적 태도가 큰 문제를 안고 있어온 것은 아닌가요?
무언가 새로운 대응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바로 향후 10여 년에 걸쳐 닥쳐온다는 대병겁(大病劫)은 특히 정신 판단, 생식력 상실, 생산력의 전면 감퇴 등 완전 생명 해체의 지옥 체험에까지 이를 것이라 합니다.
과연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강의 서두에 예를 들었던 독일의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 대전환의 숨 막힌 어둠의 때에 가장 고귀한 지혜와 삶의 규범은 '모심'이라고 강조합니다.
호주의 생태학자 발 플럼우드는 바로 지금 다가오고 있는 대혼돈을 넘어설 유일한 길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하고 모두 다 거룩한 우주의 공동 주체로 높이 모시는 문화와 사회의 대변혁'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선 인간 생명에 대한 다함없는 '모심'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바로 이 '모심'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운동의 길을 다시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농사꾼입니다.
또 공자 앞에서 문자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감히 한마디 하겠습니다. 공업이나 기타 잡다한 노동과 달리 농업은 본디부터 '모심의 산업'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생태 마르크스자 '테드 밴튼'의 말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기본은 당연한 얘기지만 그 노동관에 있다. 그런데 그 노동관에는 농업노동은 전혀 배제되어 있다. 그의 노동관은 오직 19세기 유럽의 대규모 공장 노동, 쇠붙이를 자르고 용접하고 갈고 닦고 기름칠하고 윤을 내는 그런 노동뿐이다. 따라서 그 노동관에 입각한 사회 행동, 판단, 조직, 일체의 정치적 대응이나 교육 등이 모두 다 이처럼 자르고 용접하고 갈고 닦고…. 그렇다. 반대로 농업노동은 생명의 결을 존중해 그 결의 자연적 생성을 따라가며 솎아주고 벌레 잡아주고 물과 햇빛과 바람과 기타 모든 자연적 요인들을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그 성장에 결합시켜 줘서 추수하면 먼저 그 종자를 보존하고 그 나머지는 먹고 또 그 나머지는 이웃에게 나눠주는 참으로 평화로운 노동행위인 것이다.'
인용이 정확하진 않습니다. 먼저 해월 선생의 향아설위 경우와 마찬가지로 설명을 위해 내 해석을 부연했습니다. 농업은 그 생리 자체가 이미 '모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모심'을 심화하고 강화하는 것.
이것이 이른바 '생명과 평화의 길'이요 '새로운 생명 운동의 길'입니다.
생산자만 그리해야 합니까?
소비자도 그리해야 합니다.
소비자만 그리해야 합니까?
당연히 중간의 유통 공동체는 더욱더 깊은 '모심'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심'이 최근 어린이와 청년과 여성들의 비폭력, 평화의 생명 운동인 '촛불'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분명 새로운 때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기엔 진부하겠지만 '유기농 공동체 운동, 생활협동운동'에 대해 이 기회에 한 번 대중적으로 평가할 기회를 가집시다.
소비의 측면
본래 유기농 공동체 운동은 '생산자는 소비자의 밥상'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함께 책임지는 관계-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출발하였으나 최근, 유기농산물 시장 및 규모가 확대되면서 -인간적인 관계-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관계는 사라지고 물건만이 오고 가는 관계, 단순한 생산자, 소비자의 관계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즉 '호혜(互惠)'가 사라지고 '교환(交換)'만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으니 획기적 '재분배(再分配)'가 가능할 까닭이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직거래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주도권이 소비자 측으로 넘어가면서 자기 가정만 안전한 유기 농산물 먹으면 그만이라는 개인적 이기심 위주의 소비자들에 의해 유기농산물도 상품적 가치만으로 평가되고 유기농업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생명, 생태, 농업 보호 등의 철학과 이념에 대한 인식을 크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유기 농산물 시장이 확대되어 인터넷을 통해서도 쉽게 유기 농산물 구입이 가능하게 되자 (이 현상을 계기로 해 또 다른 방면의 운동으로 도리어 크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예컨대 현대 인류의 갈망인 유기농 생명 농업 정착 문명과 영성적 네트워크를 품은 도시 유목 이동 문명 사이의 이중 복합을 시민 생활의 구체적 이상 속에서 촉발할 수 있습니다) 생활 협동조합은 그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 소속감, 일종의 충성도가 크게 떨어지는 소극성을 변치 못하고 있습니다.
생산의 측면
앞에서처럼 소비자들의 선택폭이 확대됨에 따라 유기농산물 간의 경쟁이 심해지고 이는 자연히 생산자들에게 보다 질좋은 유기농산물 생산을 압박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생산자들은 자기 생산물의 품질 향상을 위한 제반 노력(노동 강도, 기술 향상 등)을 강화해야 하는 부담을 갖는 한편 농산물의 선별, 포장, 가공시설 등에 계속적인 투자를 요구하게 되어 경제적, 경영적 부담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담의 해결과 기타 거시적인 생명운동의 성취를 위해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일부 생협과의 공조 속에서 광범위한 아시아 민중 교역을 추진해 온 일본 생협들이 최근 그 차원 변화를 위해 새 시대의 '호혜시장'을 목표로 다방면, 대규모 전 세계적 민중 생활협동의 물결을 새롭게 시도하는 플랜에 한국 생협이, 물론 이 경우 농산물 소비의 계절적· 지역적 한정성, '제철에 가까운 지역산물의 생명성'이라는 명제를 전제하고도 가능한 생활상의 여러 식품 따위의 교역 부분을, 적극 연결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 유기농산물 시장 가운데 1차 생산물(채소, 곡류 등)의 수요는 크게 늘지 않고 육류, 2·3차 가공품의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에서 가공 사업을 하지 않는 일반 생산자들의 경우 유기농산물 생산으로 인한 농가 소득이 제자리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우리는 새로운 창의적 해결 방향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채소·곡물 이외에 점차 증가하고 있는 '미치지 않고 동물 사료 안 먹으며 대량 사육의 컴컴한 감옥 같은 우리나 공장이 아닌 마당과 흙에서 뜨문뜨문 자란 한우에 대한 생활적, 정서적인 엄청나게 커다란 대중적 요구'에 대해, 그와 함께 증가하고 있는 '채식' 요구에 대해서와 함께 어떤 복합적 대안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채소와 곡물 농사도 하면서 한 가족처럼 소를 키워온 전통 농가의 동식물 생명에 대한 근본적 '모심'에 대한 소비 대중의 거의 낭만적일 정도의 요구가 폭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는 이야기올시다. 농가와 농가 개별 단위에서 작은 규모의 '모심 축산'을 광범위하게 네트워크화 할 경우 삶의 질과 건강한 먹을거리를 비교적 싼값에 요구하는 젊은 도시 소비자들의 타는 듯한 생명에의 목마름에 대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기농 생산자들의 의식도 '생명의 일꾼', '민족의 어머니'로서의 인식보다는 수입 개방에 대응해 돈벌이하기 좋은 농산물 생산으로서의 유기농업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입니다.
유기농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농사짓는 것인데, 지금은 '인증제도'를 통해 품질을 보증하도록 하고 있어서 '자연의 정신'보다는 오히려 상업화의 굴레를 씌워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한 석유 에너지를 덜 사용하는 것이 유기농의 취지인데 비닐하우스 등 농자재와 트랙터, 경운기, 화물차 등 농기구를 사용하고, 농가에서도 가스, 석유 그대로 사용하는 생활을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요컨대 영성과 생명성, 영적인 모바일 네트워크와 생태주의적 정착 사이의 이중 복합에 의한 근본적 문명 전환을 언제나 생각하고 잊지 않아야 할 것 아닐까요?
정리해 봅시다.
유기농 공동체 운동 또는 생활협동은 사회주의적 집체주의 변혁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대안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결국 지금의 모습을 현실과 삶의 생명성에 맞지 않는 둔탁한 공동체 허상과 협동의 구두선(口頭禪)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내포된 또 하나의 유기성 없는 짝퉁 시장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과연 유기농 공동체 운동이 오늘날 생명의 위기에 대한 참다운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생명·평화의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근본적 고민이 절실한 그런 시점입니다.
그러나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생협 운동 진영 내부에 이 같은 위기에 대한 고민이 전혀 깊지 않다는 점이며 나아가 오늘날 전반적인 생명의 위기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 또한 전혀 깊어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생명의 철학, 사상, 과학에 토대를 두지 않은 채 또 한 종류의 물류사업에만 치중해온 결과라고 평가되며 결국 이것은 새로운 생명 문화 운동을 통해 새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해야만 해결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아시아만 아니라 전 세계적 범위에서 '공동체와 협동운동'은 거의 전면적으로 퇴화하고 있습니다.
좌우 양 극단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지표로 인식되어 왔던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몬드라곤 공동체와 이스라엘의 기브츠 공동체, 일본의 야마기씨 공동체가 이미 해체 위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인식 체계 자체가 변하고 있습니다.
찰스 다윈과 함게 응당 발생과정 전체에서부터 집체와 종(種)을 중심으로 해 개체와 다양성과 자유가 주변현상으로 다루어지고 전체적 통합 과정으로서의 조직화가 어길 수 없는 필연성으로, 약육강식과 자연선택과 적응기제와 도태가 생명의 전체율로 절대화 되었던 시대는 이미 옛날입니다.
집체적 통합의 절대성 대신 개체 개체 마다에서의 '내부 공생(endosymtiosis)'의 원리로, 종 발생 선행(先行)론에서 개체 발생 선행론으로, 개체 중심의 융합(identity-fusion)에 의한 자기 조직화(Self-orgarnization)의 진화론, 자기 선택과 자유의 진화론으로 생명 과학 자체가 크게 진화했습니다.
약육강식과 도태와 적응의 필연성과 환원주의로부터 상부상조(相扶相助)가 도리어 중심 흐름으로 되면서 상호 의존과 창조의 우연성, 돌발성, 돌연변이, 자유성과 다양성, 복합성과 혼돈성, 창발성의 기제가 거의 필연의 차원으로까지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생명계 자체의 대변동입니다.
'무기물에서 유기물로의 변증법적인 질적 비약' 따위의 외삽법(外揷法)으로는 더 이상 생명 탄생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비록 잠자는 상태, 희미한 씨앗 상태라 하더라도 일체 무기물 내부에는 생명이, 그리고 그 생명 내부엔 영(靈)이, 영의 내부에는 신(神)이, 신의 내부에는 공(空)이 이미 살아 있었던 것이며 그것이 외부로 활동하고 진화하고 복잡화하는 기(氣)의 주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 조직화 과정입니다. 즉 진화입니다. 따라서 진화는 창조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가 곧 진화이니 다름 아닌 '창조적 진화'인 것입니다.
동학 사상은 바로 이것을 '안으로 신령이 있고(內有新靈) 밖으로 기운화함(外有氣化)이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우주적 융합의 전체성을 각각 개체개체 나름으로 인식하고 실현한다(一世之人各知不移)'고 설명합니다. 동학은 동양 최초의 창조적 진화론이며 다윈 이후 서양 진화론의 대 고원 통로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 진화론과 이후 예리히 얀치를 선봉으로 하는 자유의 진화론 양자를 다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진화의 생명 논리는 '아니다, 그렇다(不然基然)'와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이중적 생성'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불교, 특히 원효(元曉) 불교의 철학적 배경에 연속되고 베르그송, 떼이야르, 그레고리 베이트슨, 데이비드 보옴, 질 들뢰즈와 미셸 세르에까지 이어지는 변증법과 환원주의의 극복이며 마침내는 싸이버네틱스의 뇌 운동 구조 인식에 따른 컴퓨터의 'no-yes, yes-no'의 이진법 원리로도 일단은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동학의 이 같은 진화론, 생명의 논리, 그 실천 과정 자체가 동학 최고의 윤리강력인 '모심'의 설명 내용이자 동시에 '모심(侍)'의 실행 과정이라는 점이올시다.
'모심' 이미 말했습니다.
'모심이란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우주 융합의 전체성을 각각 개체 개체가 제 나름으로 인식하고 실현한다(侍者 內有新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 者也)이다.'
우주 융합의 전체성을 '각각 개체 개체가 제 나름으로' 인식하고 실현한다는 것. 이것이 이미 1860년 얘기올시다.
이러니 생명과 삶의 필연적 집체성에 토대를 둔 공동체와 협동 운동이 잘 될 까달깅 없는 것입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나쁘게 말하면 완전히 제멋대로입니다. 개성이 강하다는 것이지요. 이 개체성, 이 개성을 앞에 전제하고 들어가는 생활 운동 기구가 이스라엘의 '모샤브'인데, 작업량, 임금, 휴식시간, 개인행동의 자유, 선택가능성 등등 개별적 차이를 철저히 존중하고 들어가는 '모샤브'는 과연 어떨까요?
'기브츠'에 비교해서 말이지요.
놀라지 마십시오. 기가 막히게 잘 된답니다.
왜 그럴까요? 위대한 진화론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우주 진화의 3대 법칙 가운데 '안으로 의식이 있고 밖으로 복잡화가 있으면(inward consciousness, outward complexity)'까지는 옳았습니다. 동학의 '모심'의 해설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법칙 '결합은 특수화 한다(Union differentiates)' 즉 '집체적 전체성은 대전제요 진리인데 그 다음에 그것이 점차 분화되어서 개체들의 자유가 나타난다.'
이것은 여지없이 틀렸습니다.
그의 악명이 '전체주의 예언자'로 된 까닭입니다. 당대에 무솔리나, 히틀러의 파시즘과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사회주의가 휩쓸던 때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동학의 '융합의 전체성을 각각 개체 개체가 제 나름으로 인식하고 실현한다(各知不移)'보다 한참 뒤떨어집니다.
현대 진화론의 '개체융합(identity-fusion)에 의한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의 진리에는 동학이 떼이야르보다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와 협동' 대신 무엇이 그 대안 가치로 떠오르고 있을까요?
물론 '개체를 중심으로 한 융합'입니다만 아직 설명 부족입니다. 이런 경우에 '린 마굴리스'의 개념 '내부공생(內部共生·Endosymbiosis)'이 끼어들게 됩니다.
경제·사회적 개념으로는 무엇입니까? '호혜(互惠·reciprocity)'올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혜택을 나누어 주는 사회적 사랑인데 이것은 인간과 자연 생태계 사이에서도 작용합니다. 또 인간과 신 사이에서도.
우리 민족의 사회적 삶의 전통에서 이런 것이 없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탁월한 형태로 '계(契)'와 '품앗이'가 그것입니다.
'계'란 한 사람에게 요긴하게 쓸 만한 큰 몫돈을 몰아주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돈을 묻는 공동 저축을 돌아가며 하는 것이고, '품앗이'란 한 농가의 농사 전체를 온 동네가 달려들어 한꺼번에 몰아서 마쳐주는 것을 돌아가며 하는 일방식이지요.
이 역시 '모심'의 한 형태입니다. '모심의 생명 운동'은, 그리고 '생명 운동의 모심'은 오늘날 이 '계'와 '품앗이'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유기농 생산·소비·유통의 전 과정이 각각 바로 이 같은 '계'와 '품앗이'의 '개체-융합'과 '내부 공생'의 행태로 재구성되는 것을 한 번 심각하게 고려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한살림 생협'의 내 친구 한 사람은 언젠가 긴 한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형님 잘 아시다시피 한살림은 그야말로 전체적으로 잘 통합되고 행동하는 대표적 생명 운동 아닙니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몸에 익숙한 농촌적인 어울림의 전통이 보이지 않는 중에 깊이 깔려 있는 까닭이겠지요.
그러나 형님, 이것 보십시오.
세월은 자꾸 흐르고 우리들 삶도 나날이 도시화되어 갑니다. 젊은 회원들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지 아세요? 완전히 외도토리들입니다. 개체란 말입니다. 유목민, '노마드'들입니다. 저 혼자 막 돌아다녀요. 이들하고는 공동체니 협동이니 전체니 단체니 그런 말이 안 통합니다.
그러니 이제 어떡합니까?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이 유기농 채소와 곡물을 함께 나누고 함께 의미 있게 살아가는 영적인 생명 운동을 지속하려면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문제는 생명 그 자체와 생명 운동을 다시 허심탄회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개체 생명 안에 우주적 영적인 융합이 움직이는 것을 개체 본인들이 희미하지만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화의 한 국면입니다. 뇌의 진화입니다. 대약진에 해당하는 디지털 문명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논리는 '아니다-그렇다'라고 했습니다. 이중성입니다. 음양이요 상생· 상극입니다. 색과 공이요 원수 사랑이고 죽음과 부활이며 하늘과 땅, 그렇습니다.
또한 생명의 생성 구조는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상호 교차 관계입니다. 생명은 동양 개념으로는 기(氣)올시다.
따라서 생명 운동, 생명 변화는 아까 동학의 '모심'의 뜻 가운데 한 가지인 그 '밖에 있다(外有)'는 '기화(氣化)'겠습니다.
그러면 '안에 있는(內有)' 것은 무엇입니까? '신령(神靈)'입니다.
생명 운동의 안쪽에는 영성적 문화가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빈다. 그러니 이 말은 제가 오래 전부터 젊은이들에게 강조했던 '생태학과 인터넷 사이의 이중성'으로 되기도 합니다.
컴퓨터는 사이버네틱스, 뇌 과학, 즉 영성 과학의 산물입니다.
짐작되는 것 없습니까?
현대 문명의 대안은 영성만도 아니고 생명만도 아니며 영성적 생명이요 생명적 영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화이고, 이 진화가 모심의 산물이자 동시에 모심이 진화의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이버, 디지털, 네트워크 인터넷, 이 모든 영적 소통의 문화는 도시 유목 이동 문명의 산물이자 그 촉수입니다.
유럽의 지성계는 인류의 미래를 오로지 '유목 사회', 즉 '노마디즘(nomadism)'뿐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어떤 이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생태주의자 등은 인류 미래의 유일한 대안 문명은 오로지 농업사회뿐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촛불, 그 촛불의 전단계인 붉은 악마는 어떻게 말합니까? 그들의 시뻘건 도깨비 로고의 주인공 치우(蚩尤)를 앞세워 유목과 농경, 이동과 정착, 영성과 생명, 남성성과 여성성, 역동성과 균형의 이중 복합을 집단적으로 예언합니다. 왜냐하면 고조선 이전 배달국 14대 천황 '치우'는 4천 5백 년 전 중국 화하족(華夏族) 추장 황제(黃帝)가 그 이전의 유목 문명을 숙청하고 남방으로부터 도래한 농경 문명 일변도로 유일 체제화하려는 데에 맞서 유목-농경과 이동-정착의 이중적 문명 복합을 목표로 74회의 피투성이 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의 소망은 유목적 도시 이동과 농경적 농촌 정착이라는 이중 복합 문명을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도 다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우리 한민족 참 이상한 민족입니다.
환웅이 누구입니까?
북방 유목 이동 민족이요 천손족(天孫族), 즉 영성적 민족의 갈래입니다.
웅녀가 누구입니까?
남방 농경 정착 민족이요, 신화대로라면 이른바 지손족(地孫族), 즉 감성적 민족의 갈래입니다.
신화의 내용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나오면 흔히 심기 불편한 분들이 여기저기서 돌출하는데 쓸데없이 나에게 시비 걸 생각 아예 마십시오.
다 준비 해놓고 지금 발표하고 있습니다.
신화는 역사의 압축이요 또한 예감입니다.
오늘 새로운 생명 운동의 길은 비록 그 중심이 유기 농업과 생태학과 농촌적 재정착, 다시 말하면 '귀농(歸農)'쪽으로 기울었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은 동시에 유목 산업과 인터넷과 도시적 이동성의 개방과 함께 어떤 생동하는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쌍방향 통행'이요 '기우뚱한 균형'입니다. 이것이 새 문명의 모습입니다.
그 가장 확실한 실증이 '촛불'입니다.
도시의 유목민인 어린이, 청소년, 여성, 그리고 절대 다수 비정규직을 예상시키는 소수의 쓸쓸한 대중들이 농촌 정착적 생태주의자들만이 관심 가질 법한 일상생활의 먹을거리와 산과 물의 생태계와 물 문제와 의료 보험 등을 직접 민주주의 아젠다로 밀고 나올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생명 운동의 새로운 인식, 새로운 전개 방향과 방법을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는지요?
중산층 중심의 웰빙 운동이나 인터넷 쇼핑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역시 세로운 생명 운동의 기우뚱한 균형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균형을 전제하되 중심이 어느 한 곳에 기울어져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중심이 곧 매출액을 말할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이겠지요. 아닌가요?
멕시코의 농민 운동가 마르코스 그룹은 복면에 총을 들었지만 싸움은 도리어 인터넷과 사파타의 농민 혁명 신화가 합니다.
유기농 운동가에게 멕시코 전법을 따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전혀 아닙니다. 오해 마십시오.
그러나 촛불과 함께 이미 도처에 퍼지고 있는 동학당의 신화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온라인 화백민주주의, 생명, 생태, 생활, 그리하여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우주적 집단 지성의 여성적인 활력이 새로운 생명운동의 길에 던지는 빛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찾고 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를 묻거나 제안하고 싶은 것입니다.
촛불은 국면 전환을 할 때입니다.
이미 광장에서 제기된 먹을거리, 쇠고기 문제, 물 문제, 의료 보험, 대운하, 교육 등등 생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생활 대안 운동을 집단적, 그러나 철저히 개체 중심의 자연스런 융합과정에서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운동과 종교계, 지성계와 자기들 네티즌 사이의 끊임없는 쌍방향 통행을 통한 새로운 영성적 생명의 대문명사 창조 운동을 함께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가요?
이 과정에서 유기농 운동과의 현실적 관계가 발생하게 되지 않을런지요?
이미 촛불들은 자기들 내부에서 매우 진지하게 우리의 식생활 습관과 식단 문제를 토론했다고 합니다.
바로 채식(菜食) 문제입니다.
우리가 특히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여성들이 전통적 채식 위주의 식생활에서 너무나 지나치게 육식 위주의 미국이나 유럽 스타일로 바뀌어 버린 것에 대해 상당히 여러 사람이 다각적으로, 긴 시간 토론했다고 하며 그 배분 문제와 식단까지도 검토했다고 합니다.
또한, 채식을 중심으로 그들이 생활 개혁 운동을 밀고 갈 때에 과연 현 상황과 같이 중산층이나 그 이상의 부유한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고급의 청정 유기농산물을 가난한 시민들이 마음 놓고 사 먹을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 제공되는 식품들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인지를 끝없이 따졌다는 소문입니다.
한국의 기후와 풍토, 한국인의 생리적 조건이나 종교 생활의 전통 등으로 보아 채식 위주의 식생활이 갖는 긍정적 의미는 막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 우리가 입으로 가져가는 채소나 곡물과 과일이 참으로 생명 식품일 때만으로 한정됩니다. 그 생명성의 보장, 그 적정한 가격, 그 지속적·집단적 공급의 문제 등이 가장 주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쇠고기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산은 엄격한 감시를 통해 판단한 뒤 대중적 불매 운동으로 대응한다지만, 직접 먹어야 할 한우 고기는 어찌해야 할 것인지?
그 품질은 누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보장하며 그 높은 가격은 어찌해야 현실적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것인지?
먹을거리가 바로 광장의 수만 군중에 의해 정치의제로 떠오른 것은 세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바로 생활과 생명의 전혀 새로운 문명이 오고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올시다.
그리고 그 행동 방식이 철저히 비폭력, 평화로 일관했다는 점은 드디어 인류 대망의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서막에 해당합니다. (폭력의 악순환 문제는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여러 경우, 그것도 매우 힘주어 강조했으므로 오늘은 생략합니다.)
'생명과 평화'는 우리 민족의 DNA이기도 합니다.
동이계 방사, 술사들의 경전인 산해경(山海經)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입니다.
'이 민족은 산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며,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죽지 않는 군자의 나라인 것이다. (好生 不殺生 好讓 不爭 不死君子之國)'
자, 이쯤 되면 생명과 평화가 전 인류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가는 현대사에서 촛불과 유기농 운동의 바람직한 악수는 그 자체로서 이미 위대한 민족 문화 운동이요 새 문명 운동으로, 민족 통일 운동의 아름다운 이념의 차원으로까지 산 채로 거룩하게 승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할 것입니까?
촛불과 손을 잡고 그들의 구체적 현안에 대해 논의의 장을 열어주실 겁니까?
유기농산물과 채식의 문제, 글자 그대로 가장 구체적이고 생리적인 생명 운동의 첫 걸음인 먹을거리에서부터 저 아름다운 촛불을 청소년과 여성들의 살아 있는 몸 안에서 화안히 켜 주실 수 있을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촛불을 기다리겠습니다.
한우 고기에 관해서 나는 오랜 친구인 괴산(槐山)의 농사꾼 조희부 형을 통해서 8월 6일 아침 한우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여기에 요약한다. 질문. 미국 쇠고기 파동 속에 한우 고기는 안녕하신지? 대답. 안녕하지 않다.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다. 소비 감소 추세다. 모든 쇠고기에 대해 경계하는 분위기다. 질문. 어떤 놈 덕에 어떤 놈이 똥 벼락 맞는 격인가? 대답. 그런 셈이다. 식생활 일반에 큰 변화가 올 것이란 예감이 든다. 질문. 채식 중심의 전통적 식생활의 부활 말인가? 대답. 그렇다. 그러나 그냥 희망사항으로만 끝날는지도 모른다. 바람직하기는 거기에 관련한 어떤 능동적 운동이 일어나는 것인데… 될까? 질문. 지금 한우 축산 현황은 어떤가? 대답. 소 한두 마리 키우는 농가들은 거의 다 포기하고 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러나 백 마리, 오백 마리 이상씩 키우는 전업 축산업자들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질문. 소 한두 마리를 '모심'과 '정성'으로 키우는 소축산농가들의 한우 생산이 수없이 많은 소농가들 사이의 네트워크로 확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대답. 문제는 소비자 쪽의 능동적인 집단 운동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있다면 집단 계약으로 질과 가격 등에 관해서 생산자 쪽의 운동도 네트워크화 될 수 있다. 핵심은 역시 '모심'의 정신이다. 질문. 그 네트워크의 압력이 전업 축산업자들의 한우의 질과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건가? 대답. 대체로 비슷한 얘기가 된다. 역시 문제는 '모심'에 있다. 질문. 한우는 대체로 무얼 먹이는가? 한우도 미국 소처럼 동물 사료를 먹이는가? 대답. 그런 일은 없다. 대체로 옥수수, 밀기울, 콩 깻묵 따위다. 그것이 소에게 좋은 사료다. 질문.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어찌 생각하는가? 육식을 줄이고 채식 중심으로 식단이 바뀐다면? 대답. 매우 좋지 않겠는가! 조상들 식단은 기후, 풍토, 물의 특성 등을 다 고려한 것이다. 우선 동맥경화증 예방, 환경오염 예방, 그리고 탄소 배출량 감소 등 좋은 소식이 많을 것이다. 질문. 한우 고기의 품질은 어떠한가? 이번 파동은 미국 쇠고기의 고기 자체로서의 품질 문제다. 대답. 농작물을 잘 먹이기만 하면 한우의 육질은 건전하고 매우 맛이 좋다. 맛도 좋고 모양도 매우 아름답다. 식물을 잘 먹이기만 하면 그것이 가능한데 흰 지방이 빨간 고기 속에 무늬를 그리는 품격이 높은 고기다. 고기 안에, 뼈 속에 퍼져나가는 대리석 무늬가 우아하다고 해서 '마블링(marveling)'이라고 부른다. 일본 이름으로는 '상강육(霜降肉).' 하얗게 서리 내린 것 같다는 뜻이다. 질문. 그것이 최고의 한우 고기인가? 대답. 그렇다. 매우 좋은 고기로서 주로 구워 먹는데 퍽퍽하지도 않고 입맛에도 좋다. 일본과 한국에서 평가가 아주 높다. 질문. 역시 가격 문제가 남는다. 한우는 비싸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어서 항상 그것이 문제가 된다. 어떤가? 대답. 생산-소비자 간의 거래, 유통 단계를 줄이면 단가 낮출 수 있다. 질문. 직거래 이야긴가? 대답. 그렇다. 아까 잠깐 이야기 나왔지만 이 문제에도 어떤 능동적인 운동이 있어야 한다. 한우 고기에 일, 이, 삼 등급들이 있는데 경매 가격이 다 다르다. 만약 다수의 소비자가 생산자와 집단적인 직거래 계약을 한다면 도리어 이런 가격 차이 등을 여러 모로 유리하게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품질과 가격 문제이겠는데 핵심은 그런 소비자 운동 네트워크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생선을 함께 먹는 것에 관하여 나는 지난 7월 26일 강연 차 목포에 갔다가 의사이며 유명한 환경 운동가이신 서한태 박사를 만나 식사 중에 다음의 짧은 생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사. 미친 미국 쇠고기 대신 유기 농산물 채식과 한우 고기를 식단에 배합하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들었다. 바다 생선도 함께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선만 아니라 김, 미역, 서슬 따위 해조류들과 갯벌에서 나는 어패류 등 바다 생명 전체를 식단에 연결시켜야 될 것 아닌가! 나. 그렇다. 인간 몸 안에 산 우주 생명이 있으니 우주 생명이 들어가야 한울이 한울은 먹는 이치, 먹이 사슬이 온전해진다. 그런데 모든 바다가 심하게 오염돼 있다. 생선의 오염은 어찌할 것인가? 박사. 생산자-소비자 사이에 환경 운동이 항상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러자면 소비자 운동이 개인 차원을 넘는 네트워킹 운동이 돼야 한다. 그 운동이 감시를 조건으로 계약해야 한다. 또 이것을 계기로 환경 운동이 생명 운동, 생활 운동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겠는가! 나. 의사로서 말해 달라. 채식과 육식과 생선 및 바다 식품의 식단 배합 비율은 어느 정도가 좋은가? 박사. 채식 60, 생선 및 바다 식품 25, 육식 15 정도가 좋을 듯한데 정확한 것은 다음 기회에 또 알려주겠다. 나. 인간 생체 조직과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비율이 작은 것인가. '미칠 가능성의 역순(逆順) 아닌가? 박사. …. |
아까 나는 '호혜(互惠, 契나 품앗이 같은 개체-융합과 내부 공생, 그리고 各知不移의 시랑과 생태계 존중과 신과의 화해를 담는 생명 경제, reciprocity)' 또는 '호혜 시장(互惠와 交換과 再分配 사이의 결합, 神市와 같은 고대 경제 형태)'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생명 운동의 길의 한 목적지임도 암시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고대 회복이고 네오 르네상스이며 또한 후천개벽,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의 전 세계 문화 대혁명의 경제 사회사적 불쏘시개일 것입니다.
유기농 같은 현재의 생명 운동 역시 그 같은 비전으로부터 촉발되고 그런 시장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한 과정일 것입니다.
세계 문명사의 중심은 대서양에서 동아시아, 태평양 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미래의 가장 활기찬 시장은 아메리카가 아닌 아시아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시장은 아메리카와는 달리 단순한 신자유주의 교환 시장만이 아닌 그야말로 새 시대의 새로운 '호혜와 교환과 획기적 재분배의 시장'일 것이 분명합니다. 아시아 시장의 오랜 전통이 그러합니다. 그 전통의 현대적 부활의 형태로 '신시(神市)'가 올 것입니다. 또 와야 합니다.
그 첫 시작이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될 것입니다.
생명 운동은 분명 한반도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생협의 구체적 경험은 일본으로부터 배워올 것이 많습니다.
일본 생협은 20여 년간 꾸준히 아시아와의 민중 교역의 역사를 축적해 왔습니다. 그 경험과 그 인력을 바탕으로 일본 생협들은 올해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계획을 확정하고 연말인 11월 8일 후꾸오까에서 동 호혜기금의 아시아 및 세계 대회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호혜 기금은 먼저 아시아지만 곧 이어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로 확산한다고 합니다.
이 기금에는 한국의 생협 중앙이 깊이 공조하고 있으며 이 운동은 민중 은행 형태인 지금의 기금으로부터 다양하고 복합적인 심도 있는 현대적 계와 품앗이 운동, 즉 새로운 효력성 있는 생명 운동을 통해 전 인류에게로 확장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슬로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
아마도 기금의 첫 발자욱은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과 유사하겠지만 그 목적인 호혜 시장은 도리어 후천개벽적입니다.
한국 생협이 거기서 큰일을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일본의 모든 생협 운동, 환경 운동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팔레스타인,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의 민중 교역 기구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유기 농산물은 국제적 교역 품목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절에 까다롭기 때문에 기다리는 냉동품, 포장품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 생협 20여 년의 민중 교역사의 경험에서 앞으로 우리는 바로 이러한 문제점들의 해결에 관한 많은 시사와 교훈과 학설을 끄집어 낼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국내 생명 운동과의 탁월한 연대가 요구됩니다.
전 세계 시민 생명 운동사, 민중 생활사에 대전환이 올 것입니다. 또 하나의 촛불입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 최고의 멘토는 역시 다함없는 '모심'이겠습니다.
'모심.'
이것이 후천개벽의 비밀입니다.
바로 이 모심의 자세로 오늘 이 강연의 마지막 말씀을 선사합니다. 바로 그 '호혜 기금'의 아이디어, 전 아시아와 온 세계에 '신시'의 호혜시장을 세우자는 그 메시지, 그리고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라는 그 슬로건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자리에 서있는 불초 본인으로부터 발신된 것임을 감히 밝힙니다.
물론 여러분 '정농회'로부터 시작된 한국 생명 운동의 줄기찬 활동사에 대한 다함없는 '모심'으로부터 비로소 솟아오른 지혜의 선물이겠습니다.
자부심을 가집시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8년 8월 7일 새벽 일산에서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