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세력이 들어오며 식민지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도 무너지게 되었다. 새로 유럽인들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이 복잡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중남미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유럽인, 원주민,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흑인 노예들이 뒤섞이며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복잡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지역에 들어온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여자들과 섞여 살며 혼혈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손인 메스티조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래서 피부 색깔에 따라 맨 위에 있는 순수 혈통의 백인으로부터 여러 형태로 피가 뒤섞인 혼혈인, 그리고 인디오로 불린 원주민, 아프리카인의 복잡한 사회적 계층 질서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흑인인 경우에는 그 자식이 물라토,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인디오인 경우에는 메스티조,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메스티조일 경우에는 크레올레 등으로 각각 달리 불렸다. 그 계층이 무려 23개나 되며 그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랐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종에 따른 이런 사회적 구분은 식민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순수 백인 혈통을 잇는 사람들이 아직도 지배계급으로서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2001년에 페루 대통령으로 인디오 출신인 똘레도가 뽑힌 것은 큰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식민주의로 인해 사회가 새롭게 구성되지는 않았다. 대신 식민당국의 지배 아래 두 개로 나뉜 별도의 사회들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통치자들의 소수파 사회였다.
아프리카 식민지의 경우 백인들은 혼혈을 꺼려했다. 열등한 흑인들과 피를 섞으면 백인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잃게 된다고 믿었고 또 자신들을 아프리카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지배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혈인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이런 흑백분리가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얼마 전까지도 유지되었던 남아프리카연방의 흑백분리정책이다. 울타리를 쳐서 거주지역까지도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착취는 일상적이었다.
아시아의 전통적 사회구조는 매우 강인했고 또 높은 문화수준을 갖고 있었으므로 유럽인들이 그 사회를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 수는 없었다. 처음에 일부 지역에서 혼혈정책이 취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얼마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식민자들의 사회와 식민지인의 사회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두 사회를 연결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선교사나, 통역자, 중개인, 또는 식민세력에 대한 '정치적 협력자'들이다. 우리로 치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다.
'협력 이론'과 그 반동성
이 중간집단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협력자'들이다. 이들은 식민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미 누려오던 기득권을 보호받은 집단을 말한다. 반면 식민세력은 이들을 이용하여 적은 비용으로 식민지를 통치할 수 있다.
'협력(collaboration)'이라는 개념을 식민주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존 갤러거와 로날드 로빈슨이다. 이들은 1950년대부터 협력이라는 개념을 식민주의의 전체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1880년대에 신제국주의가 등장한 것은 그때까지 유지되던 식민지인들의 협력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제국주의는 그것을 무력에 의해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 2차 대전 후에 식민주의가 끝나게 된 것은 더 이상 협력체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민세력이 협력자들을 완전히 잃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들의 '협력이론'이 식민지인들의 협력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식민지 통치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식민통치가 언제 어디서나 일방적인 억압이나 강제에 의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론이 일부 지역 식민지의 통치방식이나 식민주의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론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 이론이 잘 적용될 수 있는 나라는 인도 외에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는 무굴 제국이 망한 후 20여 개로 분열된 인도의 정치세력들과의 동맹이나 제휴, 협력에 의존했다.
따라서 식민지로 만든 뒤에도 인도인 토후들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나누어 준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다른 식민지역에서의 정치적 협력은 자발적이라기보다 대개 억압의 산물이다.
신제국주의나 2차 대전 이후 식민지해체 국면에서 주로 작용한 힘도 협력이 아니라 식민국가들과 식민지 사이의 힘의 관계이다. 협력이 있느냐 없느냐, 또 있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대체로 둘 사이의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협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식민국가들이 힘의 관계에서 식민지인에게 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은 그 인과관계를 거꾸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다른 곳에도 있다. 식민지배가 식민지인의 협력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식민주의의 책임이 식민국가들보다 식민지인에게 있는 것처럼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통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협력이 아니라 강제력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얄팍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또 다른 문제점은 19, 20세기에 서양을 본받아 근대화하려던 모든 비서양 세계 사람들을 협력집단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제를 복구한 사무라이들까지도 협력 집단에 집어넣고 있다. 협력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명치유신을 단행한 사무라이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자국을 근대화함으로써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는 것이었지 서양 국가들과의 협력이 아니었다. 물론 그 가운데 일부 협력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 이론은 비양심적이기도 하지만 이론으로서 정밀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이론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참 기가 차지도 않다. 최근에 일부 반동적인 학자들이 친일파를 옹호하며 그들을 근대화론자로 찬미하고 있는데 그 이론적 바탕이 바로 이 협력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미 반세기가 지난 낡은 이론이고 타당성이 거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최신 이론인 양 포장해 내 놓는 학자들의 뻔뻔스러움은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집권 여당이라는 정당이 그런 천박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근대화'니 '선진화'니 하고 떠들어 대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근대화만 되면 친일도, 독재도, '무조건 친미'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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