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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광야〉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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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광야〉와 더불어

[창비주간논평] 8월을 살며

8월을 살고 있다. 8월은 어떤 질문도 쓸모없는지 모른다. 세상에 나올 것은 다 나와버렸다. 벌써 열매를 맺은 삶의 완료도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질문도 8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어야 한다. 질문이란 뭇 생명의 출현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8월의 햇빛'을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을 태초의 빛이라 했다. 신이라든가 인간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존재하기 전의 순수한 빛이라 했다. 과연 8월 대기의 밀도 속으로 꽂혀내리는 빛은 그 시원적 무위의 진공(眞空)을 이루어내는 듯하다. 한없이 투명하다. 그리고 한없이 요원하다.
  
  동북아시아 한반도에서 이런 8월의 오후 2시쯤의 햇빛은 풍경이나 풍경 속의 인간을 투명체로 만들어버릴 듯하다. 이런 빛에 질세라 그 더위 역시 그동안의 눅진눅진한 습기를 모조리 걷어낸 그 절대건조 속을 속속들이 달구어낸다.
  
  나는 1933년 8월 1일 태어났다. 바야흐로 삼복 폭염 속에서 방금 태어난 내 핏덩어리 목숨은 녹아내릴 듯했을 것이다. 나를 낳은 어머니의 수고도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산욕(産褥)으로 10년 이상의 세월을 한달에 한차례씩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는 자궁출혈증상이 이어졌다. 내가 아쉬(동생)를 본 것은 그런 10년이 지나서였다. 어린 시절의 나를 꾸짖는 어머니는 자주 '너 같은 것을 낳아서 내가 10년씩 달거리 피를 쏟았다'고 한탄했다.
  
  8월은 이렇듯이 나에게는 출생의 달이다. 그런 식민지시대의 어느날 갑작스럽게 1945년 8월 15일이 왔다. 그러므로 8월은 한 개인의 탄생을 넘어 한 겨레 집단의 해방을 가져온 감격의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날 저녁 무렵 나는 일장기 종이국기에 태극을 그려 물감을 칠하고 거기에 네 귀 괘도 그려넣었다.
  
  며칠 뒤로 마을 장정들이 솔가지를 꺾어다 아치를 세울 때도 나는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 중국 청천백일기, 소련의 낫과 망치의 노동기, 영국 유니언 잭기 등 연합국들의 국기를 그려 붙였다. 거의 날마다 마을은 잔칫날이었다. 도망친 지주네 곳간에서 나온 쌀로 떡을 찌고 술도가 막걸리도 흥건했다. 아버지는 새로 독립할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동진(大東辰)공화국이라 했다.
  
  이 8월의 해방은 금지된 한글의 해방이기도 했다. 내 이름도 일본식 이름 타까바야시 토라스께(高林虎助)를 내버렸다. 새학기 초등학교에 갔더니 언문을 국문이라 했다. 국문 아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나는 대번에 한 학년 월반했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해방 직후 부랴부랴 편찬한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이육사의 시〈광야〉와 만났다. 나는 서당시절 훈장의 입이 흥얼거리는 《시경》 국풍(國風)으로 시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정작 근대시와의 대면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얼마나 내 가슴이 쿵쾅거렸는지 모른다. 얼마나 나의 마음이 갑작스러운 바람에 일어난 숯불의 크기로 확장되어 걷잡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시 〈광야〉는 한 시골 두메마을의 소년에게 일약 세계를 안겨주었다. 거기에는 '까마득한 날'과 '천고(千古)'라는 커다란 시간이 들어 있다. 오늘이나 내일 따위, 한시나 한시 반 따위의 그런 시간이 아니다. 또한 시 제목 그대로인 '광야'라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초인'이라는 커다란 인간까지 있었다. 그것도 그냥 초인이 아니라 백마를 타고 달려오는 초인이 아닌가. 말하자면 한 어린이의 아주 작은 향토환경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벅찬 세계를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나게 한 것이 시 〈광야〉였다.
  
  나는 그것이 무서웠다. 그 시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될 것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 가당치 않은 외경의 언어전당이었다. 하지만 내 삶의 항로에서 그것은 내 숙명 또는 운명의 한 단초를 열어준 힘의 기호를 뜻하기도 한 것이다. 이 시가 준 전율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갔건만 그 여진은 지금도 살아 있다.
  
  시법으로 풀어나간다면 오문(誤文)과 표현 부족의 흔적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지적된다 한들 그 때문에 이 시를 내칠 수 없는 것이 이 시의 생명이기도 하다.
  
  지난해 나는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중국작가협회 초청에 부응해서 한국작가들과 함께 뻬이징에 갔다. 나는 그곳 행사의 대표연설에서 뻬이징에 온 목적의 절반은 한 시인의 죽음을 추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니, 뻬이징대 강연에서도 다른 강연에서도 나는 내 시세계 따위를 말하지 않고 그 시인의 시와 죽음을 개진함으로써 나의 의도대로 이육사의 세계만을 알렸다.
  
  해외의 여러 문학행사에서 한국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선전에 급급하는 행태에 나는 늘 씁쓸했다. 어쩌면 뻬이징에서 내가 내 시세계 대신 〈광야〉의 이육사 시를 고양시킨 것도 그런 행태에 지겨워서였는지 모른다.
  
  이육사는 뻬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4년이니 해방 1년 전이다. 그는 20대 이전부터 나라 잃은 시대의 나라 찾기에 나섰다. 아니 그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들이 다 그렇게 나라찾기 겨레찾기에 몸을 던졌다.
  
  이육사는 열여섯번이나 일제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 마지막 투옥이 일본군 진주의 뻬이징형무소 감방생활이었다. 거기서 그는 고문사 내지 옥사로 세상을 마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뻬이징은 그의 시세계의 중요한 발생공간이기도 하고 그의 학문연고지이기도 하다. 오늘의 신중국 뻬이징대는 그 이전의 뻬이징에 널린 여러 고등교육시설을 종합한 것이기도 하다.
  
  이육사의 〈광야〉가 한국시단의 현단계에 시사하는 것이 있다면 특히 1990년대 이후의 길고 긴 내면주의가 그밖의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가능성을 습관적으로 막고 시인 각자의 상상한계에 의존하는 여러 실태에 대한 것이다. 세계는 언제나 또다른 세계를 찾는 역량에 의해서 넘어설 불안인 것. 결코 개인의 정서적 의식적 배설에만 안주할 수 없다. 시인은 한갓 티끌의 내면도 포착해야 하지만 그런 일로 화자(話者)의 닫힌 감옥에서 영영 길들여질 수 없다.
  
  시인들이여 그대들의 내면 만성에서 뛰쳐나오거라. 비록 사해(死海)라 하더라도 그대가 견디어낼 커다란 외부의 거친 파도를 헤엄쳐라.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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