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과학과 인간
이제 어느덧 마지막 강의시간이 되었네요. 현대사회에서 과학의 의미와 영향을 살펴보고 인류의 앞날에 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의 영향
과학이 현대사회에 주는 의미를 과학의 유형적 영향과 무형적 영향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형적 영향에 익숙한데, 이것이 바로 기술과 관련되어 있지요. 과학이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해왔고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를 가져왔다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이른바 '첨단기술'은 과학의 직접적인 응용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런 기술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면 첨단기술을 쓰지 않는 때가 거의 없을 겁니다. 흔히 과학을 이런 유형적 영향, 곧 기술과 혼동하고 동일시하는 잘못된 경향이 있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무형적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본질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전체 우주에 대한 근원적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삶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정신문화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얻습니다.
과학의 유형적 영향은 결국 기술의 산업화에 있는데, 그 긍정적 측면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질을 풍요하게 쓸 수 있고 생활이 편리해지지요. 당장 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점 때문에 '근대화'가 '산업화'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타당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실제로 기술의 산업화는 긍정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 최근에는 조금씩 인식되고 있습니다. 자원의 낭비와 고갈, 환경의 오염과 생태계 파괴 같은 여러 가지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긍정적 측면 자체에도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과연 물질이 풍요해지고 생활이 편리하면 정말 좋은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예컨대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풍요롭게 에너지를 소비하고, 성능이 좋은 셈틀이나 휴대전화를 쓰고, 걷지 않고 자동차 또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 정말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인가요? 다시 말해서 사회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면 과연 더 행복해지고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본질적 유용성과 현실적 유용성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위배될 수 있어서, 유용성이 아예 거꾸로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기술의 산업화가 진행되면 사람의 노동력이 덜 필요해집니다. 대신에 기계나 로봇이 일을 해주므로 인간은 남는 시간만큼 자기 삶을 즐기고 자아를 계발ㆍ실현하는 데 쓸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다 알고 있죠.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일반 사람들의 삶은 더 좋아지기는커녕 비정규직으로 되거나 아예 직장을 잃고 도리어 비참하게 삶이 전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기술의 발전이 참으로 인간을 위한 길인가 의문이 들게 됩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셈틀이 발전하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훨씬 빠르게 처리해주니까 효율이 높아져서 우리의 삶이 더 편해지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에 가깝습니다. 나도 직접 느끼고 있는데 교수도 셈틀이 발전할수록 점점 살기 힘들어집니다. 옛날이라면 이 정도 하면 되는 일인데 셈틀 때문에 훨씬 많이 해야 합니다. 더 해야 하는 일을 셈틀이 알아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만큼 셈틀을 작동해야 하므로, 실제로 노동 강도가 증가한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적 유용성은 본질적 유용성과 완전히 다를 수 있고 심지어 거꾸로 되어버린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기를 만드는 군수산업이겠지요. 현실에서 '첨단기술'의 핵심 목표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치명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가 문제이니,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도 없네요. 현대 사회의 구조라든가 문화의 수준이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상황입니다.
과학의 유형적 영향과 활용을 강조하면 과학의 본래 의미인 정신문화를 외면하게 됩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는 과학이 남용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모든 것을 과학이라고 하지요. 대학에서도 무슨 과학대학이라고 갑자기 이름을 바꾼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과학이란 말이 마치 도깨비방망이 같아서, 비과학적이라는 평은 방어할 수 없는 최고의 비난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실제로 현대사회, 특히 한국 사회는 지극히 비과학적 또는 반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중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과학을 말하고 과학적인 것이 최고인 양 외치면서 실제로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과학에서는 1 더하기 1은 당연히 2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 더하기 1이 2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3이라고 우기기도 하고 때로는 5천억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사회의 이러한 이중적 경향은 심지어 학문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듯합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유형적 영향과 활용에만 치우치면 행위능력과 가치이념 사이에 괴리가 오게 됩니다. 인간의 행위능력은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대규모로 파괴하고 심지어 지구 자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의 유형적 영향을 통해서 엄청난 행위능력을 얻게 되었지요. 그런데 가치이념과 관련된 과학의 무형적 영향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은 듯합니다. 이 때문에 과학의 본질이 혼동되고 가치가 전도되어 있지요. 과학 하면 곧바로 유형적 영향, 기술과 동일시되는 것은 안타깝고 우려되는 일입니다. 현대사회가 과학의 유형적 활용에만 치중하게 되면 그 마지막 도착역은 인류의 파멸임이 명백해 보입니다.
과학의 무형적 영향과 관련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흔히 반과학주의(anti-scientism)라고 부르지요. 이것은 대체로 과학에 대해 그릇된 인식에서 출발하는데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폐쇄적인 보수주의로서 결국 새로운 것, 곧 진보가 싫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폐쇄적인 보수주의는 설득력이 없으므로 요새는 이런 관점에서 반과학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실제 의미가 있는 것은 두 번째 경우입니다. 이것은 근대 합리주의의 편협성이라든가 유형적 영향에 치우치는 기술문명에 관련된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생겨나는 반과학주의로서 그 출발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인류의 삶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옛날에는 호랑이, 마마 같은 전염병, 홍수 따위 자연재해였다고 하고, 한 때는 성인용 비디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가장 두려운 것은 핵무기, 환경오염, 유전자 조작과 복제, 스마트카드나 생체여권 따위와 관련된 인권 침해와 통제 등인데 이들은 모두 기술문명에 의한 것들입니다. 그러니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기술문명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이네요.
이러한 기술이 과연 통제가 가능한가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술의 문제이므로 과학은 책임이 없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졌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견해는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과학이 현대의 기술문명을 낳았으니 그 결과에 대해 당연히 책임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을 비판하는 반과학주의는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과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활용 때문임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지요.
과학의 본질은 진정한 합리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핵심은 열려있는 사고이니, 과학의 생명은 바로 열려있는 사고에 있습니다. 예컨대 잘 알려진 반증가능성이 바로 열려있는 사고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부분적 합리주의나 실증주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실 좁은 의미의 실증주의는 과학과 양립할 수 없으며, 부분적 합리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이른바 유사과학문화를 낳고 있는데, 현대사회에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과학문화보다 유사과학문화가 더 융성하는 듯 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지요.
* 이 연재기사는 지난 2008년 12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라는 제목의 책으로(책갈피 출판사)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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