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금강산 총격 사건에 파묻힌 감이 있고, 그런 사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화를 제안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들도 있지만, 오히려 그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이제 한국 정부는 이 제안을 계기로 남북관계에서나, 6자회담을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에서나, 또는 한미관계에서나 중차대한 선택을 해야 할 사활적 기로에 섰다.
대통령 연설, '우리민족끼리' 시사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우선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가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된 근원적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국민의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총을 맞고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면 책임 있는 당국자가 조사를 해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다.
더구나 이 사고가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것이어서 재발의 여지가 없는 것인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재발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절대절명의 의무이다.
그러나 정부는 현 상태에서 이러한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 남북 당국자들간의 대화가 전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당국간 대화가 전면 단절된 상태에서 남북관계는 민간교류에 의존에 간신히 명줄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이 명줄은 온갖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이번 사고는 이 구조적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 연설 직전에 사고 소식을 접한 이 대통령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어차피 당국자간 대화가 안 될 뿐더러 국민 생명권 보장이라는 지상의 의무를 할 수 없다면 민간교류마저 중단시키고 남북관계를 전면 단절하는 것이 그 하나의 선택이었다. 아니면 민간교류의 명줄을 보호하기 위해 당국자간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남북관계가 전면 단절될 것이냐 복원의 길로 접어들 것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었고, 이 대통령은 후자로의 방향전환을 시사했다.
이 전환은 6.15공동선언에서 천명한 '우리민족끼리'라는 원칙에 비춰도 바람직한 것이다. 민족의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의 총을 맞고 죽었다는 비극적 상황에서 민족끼리 박왕자 씨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고, 민족끼리 사망의 경위를 조사하고, 민족끼리 이러한 사고의 재발방지를 위해 협조하는 것만큼 '우리민족끼리'가 중요한 때가 어디 있는가.
지위고하, 정치적 이견, 사상적 차이를 뛰어 넘어 민족 구성원의 생명권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민족끼리'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박 씨의 사망소식을 알고서도 국회 시정연설에서 남북관계의 전면적 단절을 선택하는 대신 대화의 복구를 희망한 것은 따라서 6.15공동선언에 부합하는 방향전환이다.
'봉'이냐 '짱'이냐
변화하는 국제정세도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6자회담이 2단계 이행조치의 완결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북은 핵시설 불능화를 위해 하기로 합의된 11개 사항 중 8개를 완료했다. 원자로 연료봉, 연료봉 제어시설, 미사용 연료봉 등 나머지 3개 조치는 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핵시설과 물질에 대한 신고도 마쳤다. 미 행정부도 북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제외하고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국도 6자회담의 일원으로 에너지 지원에 참여했다.
지난 12일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에서 합의된 것과 같이 2단계 이행조치들이 10월 말까지 완료되고 3단계로 접어들면 경수로와 같이 규모가 큰 경제적 사안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와 '동북아 안보 협력' 등 정치적으로 민감하고도 중차대한 정치적 사안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전기가 될 것이다.
6자회담의 이러한 진전도 남북관계의 선택을 강요한다. 남북 당국자간 관계가 복원되지 않으면 6자회담에서 일본과 같이 외톨이가 되어 따돌림을 받을 뿐만 아니라, 경수로 등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의 책임만 뒤집어쓰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남북관계가 복원되면 6자회담이라는 다자간 외교무대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들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협상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명박 대통령은 6자회담에서 '왕따'를 자초할 것이냐 '주인'이 될 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었고, 후자로의 방향전환을 시사했다. '남북당국의 전면적 대화' 제의는 6자회담의 발전이 강요한, '봉'이냐 '짱'이냐의 절체절명의 갈림길에서 후자로 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미국 정세 '오독' 교정 가능성
북미관계의 진전도 이러한 선택을 요구한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회담차 워싱턴을 방문할 때만 해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정세를 잘못 읽고 있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미 의회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올해 안에 비준할 가능성이 거의 0%인 상황에서 엉뚱하게 미국 대통령에게 쇠고기 시장 개방이라는 선물을 선사한 것이 한 예다.
민주당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고 FTA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공화당 대통령에 선물을 주면서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인기가 땅으로 떨어진 부시 대통령 '덕분에' 소수당으로 전락했다며 가능한 한 부시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있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당신네 당 대통령에게 선물을 줬으니 대통령 말 들으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 이제 미 의회가 FTA를 비준할 가능성은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은 아닌가?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정세를 오독한 것은 북미관계에서도 나타난다. 6자회담의 진전을 흔히들 '부시-라이스-힐 라인'의 작품이라고 한다. 일면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지만, 이 라인의 외교협상 방침이 이제는 워싱턴에서 초당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부시 행정부 1기에서는 강경파가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휘둘렀지만, 2기부터는 현실주의 외교론자들이 힘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2006년 중간선거를 계기로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세력은 급격히 몰락한 반면, '외교론자'들의 세력은 착실히 성장했다.
지난 2~3년간 북미협상이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던 것이 변화하는 세력관계의 반영이었다면, 이제는 외교론자들의 영향력이 정부 안팎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제외하는 것은 이러한 워싱턴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4월 한미정상회담 때만 해도 미국의 이러한 정세를 실제적으로 읽기보다 주관적으로 접근하며 대북 강경책을 선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미동맹 '복원'을 전면에 내세우고 북한이 '비핵화하고 개방할 때까지는' 남북관계를 보류하겠다는 '통미봉북(通美封北)'을 들고 정상회담에 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이미 6자회담과 북미관계에서 멀리 나가버린 미국과 '통미'를 하기는커녕 한미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잘못된 상황판단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적 '통미봉북'을 고집할 것이냐, 미국의 변화를 인지하고 실용적인 '통미통북'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을 요구받고 있었다. '남북당국자의 전면적 대화' 제의는 후자로 발걸음을 돌리기 위한 방향전환을 시사한다.
민족관계를 봐도, 국제정세를 봐도, 한미관계를 봐도 한국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짧은 재임기간 이미 숱한 문제와 논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시정연설에서는 앞으로 더 많은 문제를 양산할 내용들을 무수히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남북 간에 합의된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공동선언, 6·15공동선언, 10·4정상선언을 어떻게 이행해 나갈 것인지에 관하여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를 표명한 것은 민족관계, 국제정세, 한미관계의 발전에 부응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전환이다.
이 방향전환을 어떻게 첫걸음으로 옮길 것인가. 당장 불거진 사망 사건과 금강산 관광 중단에 대처하는데 있어 이 방향전환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6자회담 3단계 이행조치에서 이 방향전환을 어떤 정책으로 담아낼 것인가. 한미관계는 이 방향전환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화두를 던졌다. 이명박 정부가 서 있는 갈림길에서 이 화두가 어떻게 구체적인 행보로 나타날 것인지 주목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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