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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드는 것, 혹은 관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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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드는 것, 혹은 관찰하기

[촛불의 소리] 자칭 '객관적 관찰자'들에게 보내는 충고

현대 과학의 최첨단 분야 중 하나인 양자역학은 다소 특이한 한계점을 전제하고 있다. 관찰행위 자체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관찰하는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는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굳이 복잡한 과학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전제는 아마 사회과학에도 적용가능 할 것이다. 자연과학자가 자신이 관측하고자 하는 계(System) 속에 속해있기에 관찰이 곧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유의미한 행위가 되듯, 사회과학자 역시 자신이 관찰하고 논평하는 사회 속에 속해있기에 그의 관찰과 논평 역시 사회 속에서 하나의 변수가 된다.
  
  현재 촛불 정국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성을 외치며 촛불에 대해 온갖 논평을 쏟아내는 지식인들과 상당수의 시민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현대 사회에서 관찰자와 행위자를 엄격하게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객관적인 관찰자에 한정 지으려는 이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인이라면 무릇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유무형의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만큼 그들이 행동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잃을 것은 시간이요 얻을 것은 사명감뿐인 학생이 이미 가족과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인들에게 정의를 위해 소유를 내려놓으라며 윽박을 지르는 것은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썩 보기 좋은 모양새도 아니다. 하워드 진의 말마따나 이는 성숙하지 못한 행위이며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행위도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 누가 아도르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문제는 '편향적' 인 행위자와 스스로 구분을 지으며 '객관적' 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목소리들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그 파급력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구세력의 신성동맹이 내는 반동적 목소리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후자가 우익 특유의 무지막지함과 정서과잉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진지하게 경청할 가치가 없는 코미디로 수용된다면 전자는 세련된 외양을 무기로 공론의 영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목소리 자체로 현실을 재창조한다. 현재 촛불정국에 대한 여론은 집회에 직접 참여한 시민들의 열정적인 체험담 외에도 수많은 관찰자들의 목소리 또한 가미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여론' 은 촛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행위를 하지 않는 관찰자들은 무엇을 관찰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이들이 촛불집회의 모든 순간에 현장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열성적인 참여자에게도 힘든 일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몇 번의 참여에 따른 단편적인 인상 혹은 언론 보도 내용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현장의 최전방에 있던 자만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맥락을 스스로 재구성 해보는 정도의 책임감은 가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책임감 없이 단편적 이미지에 휩쓸려 아우성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반동적 언론에서 주어진 이미지에 휩쓸리는 목소리들은 가장 위험하다. 이들 언론의 보도만 보자면 현재의 촛불 정국은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귀족들을 학살하는 혁명의 상황에 가깝다. 전경을 집단 구타하고 인민재판을 하는 혁명적 상황에 대한 목소리는 혁명에 열광하는 목소리와 혁명에 반대하는 그것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대부분의 관찰자들은(행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유혈 혁명에는 생래적 거부감을 지니고 있기에 촛불 정국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것이 반동적 언론들의 전략이자 '객관적' 관찰자들의 한계이다. 이들의 폭력비판은 공허하다.
  
  근본주의적 폭력비판은 실질적으로 소용이 없다. 기껏해야 전경과 시민 모두 잘못하였다는 무의미한 양비론으로 빠지거나 '누가 먼저 때렸나' 라는 검증 불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검증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폭력적' 이고 '비이성적' 인 행위자들과 자신들을 대비시키며 '비폭력' 과 '이성' 의 영역에서 훈수를 둔다. 반동적 목소리들은 훈수의 재료를 제공한 뒤 터져 나오는 관찰자들의 세련된 훈수 뒤에 자신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을 숨긴다. 그리고 훈수가 행위자들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잠재웠을 때, 이들의 무지막지한 주장은 비수가 되어 관찰자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행위자들을 찌른다. '일반시민' 들인 관찰자의 이름으로.
  
  여기에 관찰자들의 비극이 있다. 이들은 순수하다. 시민에 대한 전경의 폭력과 전경에 대한 시민의 폭력 양쪽 모두에 분노하며 노무현의 악덕만큼이나 2MB의 악덕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노무현 정부 시절이나 2MB 정권 시절이나 '운동권' 들에 대한 강경진압에 무감각한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사진예술이 태동하던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이미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듯, 맥락이 거세된 단편적 이미지는 이들의 순수함을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만들며 농락한다. 벤야민은 비판정신을 마비시키는 사진의 순간적 이미지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표제를 제시하였지만 이미 반동적 언론들은 자신들만의 맥락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 세계 안에서 자유자제로 표제를 붙여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세계 안에서, 이들의 표제는 사진의 '진실' 을 가장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사와 사진 이미지들로 구성된 반동적 언론의 매트릭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순수한 렌즈로 관찰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 직접 촛불 집회에 나오더라도 그것은 어수선한 집단 객기쯤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그 시각은 더 이상 '객관적' 이지 않다. 아마 전쟁터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관찰자를 자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진영논리가 작용하는 현실 정치 영역의 권력 게임에서 객관적인 관찰자는 존재하기 힘들다. 행위자 혹은 자원만이 있을 뿐이다. 직접 거리에 나서는 것만이 행위는 아니다. '과격 행위자' 와 '부정적 시선으로 관망하는 시민' 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타나는,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신중하고 올바른 관찰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사회참여 행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관찰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변혁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관찰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며 또 다른 길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이에 반해 순간적 이미지에 휩쓸려 감정적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객관적 관찰' 과는 거리가 멀며 어떠한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행위자들과 애초에 선을 긋고 무책임한 논평, 아니 감정의 배설을 쏟아내는 관찰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자기성취적 예언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촛불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신중을 기해 말한 방향제시와도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허공을 맴돈다면 관찰자들의 목소리는 관찰자 그룹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유통이 되며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리고 반동적 언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시민 대다수의 의견으로 포장하며 또 다시 관찰자들은 그러한 보도에서 '판세' 를 읽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그에 맞춘다.
  
  거리에 나올 용기와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고 판단할 책임감 중 어느쪽도 갖추지 않은 채 '쿨' 한 척만을 하는 관찰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만들어질 미래는 역시 차가운 미래일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현재의 촛불 정국은 확실히 87년 6월과는 다르다. 하지만 87년 대선과 같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자를 택일해야 하는 양자역학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 역시 순수한 선과 변혁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그리고 2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보았을 때 '관찰자' 들의 상당수는 최소한 순수한 선을 택할 완고한 도덕주의자들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코를 막고 2MB에게 투표를 하였다면 몇 가지 소소한 악덕쯤에도 변혁을 위해 다시 한 번 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도 '나는 찍지 않았습니다' 를 무기력하게 외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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