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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진짜 시장주의를 하라"

[이근 칼럼] 대한민국 공동체'를 생각한다 (하)

진정한 시장주의자란?

얼마 전 <MBC> '100분 토론'에 시청자 전화로 스타가 된 '광주 양선생'이 다음 아고라에 올린 글 중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아무리 강한 사자도 기근이 와서 사냥감이 없어지면 정글에서 굶어 죽는다는 경고다. 이는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공동체의 유지라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다.

비슷한 논리로 환경·자원문제를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공동목초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비유를 한 번 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아무런 규제 없이 공동목초지에서 가축이 풀을 뜯게 놔두었더니 개별 농가가 저마다 자신만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한 많이 풀을 뜯었고, 결국은 목초지 자체가 없어지게 되는 비극을 말한다. 공동목초지의 자유방임화는 공동체가 공동으로 망하는 길로 이른다는 예인데, 광주 양선생이 지적한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치경제이론 중 포디즘(Fordism)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목초지가 아닌 '공동시장의 비극'을 예방하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포디즘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생산공정의 혁신을 이루어 내면서 대량생산되는 자동차를 어떻게 소비시키느냐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간단히 말하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적절하게 짝 짓는 하나의 자본주의의 양식이라고 보면 된다. 논리는 간단하다. 자동차를 아무리 대량생산할 수 있어도 이를 구매할 소비자가 없으면 자동차 회사는 망하게 되어 있으므로 포드는 자기 회사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어 이들이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즉,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균형을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어 맞추게 된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밝히지만 여기서는 포드의 노동통제 자체를 옹호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자유방임 경제에서 아무리 경쟁력 있는 대기업이 소위 무한경쟁을 통해 돈을 많이 벌었다 하더라도 소수만이 돈을 버는 국가경제로 귀결되어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점점 이 기업의 상품을 팔아줄 사회전체의 구매력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결국 그 대기업은 부유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에 잠시 집중하다가 국가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경기침체와 함께 동반침체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대규모 실업자가 생기고, 소득의 불평등이 격화되면 국가경제 전체가 불안정해지고, 심지어는 사회혼란이 일어나 시장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자본주의 시장의 붕괴를 예방하면서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것이 포디즘을 국가경제 전반에 적용한 케인즈의 거시경제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국가가 실업문제에 적극 개입해 대량생산의 공급에 맞는 수요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케인즈 거시경제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을 살리면서 시장 참여자의 공생의 길을 모색한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시장주의자는 신자유주의자보다는 시장의 붕괴 자체를 막아낸 케인즈주의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케인즈뿐만 아니라 최근 '따뜻한 자본주의', '나누는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조셉 스티글리츠, 그리고 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다보스 포럼도 모두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이 갑자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이상의 이론적인 예시가 주는 교훈은 시장을 단순히 경쟁력이 있는 강자만 살아남는 자유방임으로 놔두는 것이 반드시 친시장적인 정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공멸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적절한 규제를 만들고, 포드나 케인즈 같이 분배의 문제에도 신경을 기울여 사회적으로 시장 자체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친시장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장기적으로 '사회통합'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고, '공동목초지의 비극'과 같이 과도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한 경제정책에 균형을 주기 위해 정책을 왼쪽으로 이동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모두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해 독점을 추구하고, 파업하고, 공권력을 사용한다면 그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공동체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대한민국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의 경우 이러한 극한상황을 막기 위해서 노사정이 함께 이익조정을 하는 조합주의(Corporatism)가 발달했고, 미국에서는 뉴딜 정책과 같이 분배가 강조되는 경제정책의 제도화가 이루어진 바가 있다.

경제가 왼쪽으로 심하게 이동하게 되어 생산자가 어려워질 때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윈-윈의 균형을 찾고(유럽에서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의미하는 것), 마찬가지로 경제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이동해 노동자와 대다수의 소비자가 어려워질 때 왼쪽으로 옮겨 윈-윈의 균형을 찾게 된다.(현재 미국의 경우와 과거 뉴딜 정책)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이미 상당히 오른쪽으로 이동해 대기업 중심의 생산자와 상위 소수만 혜택을 보는 경제구도가 되었는데, 여기서 이명박 정부가 극단적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이동시키게 되면 양극화가 심화되고, 시장 자체의 불안정과 공동체의 위기로 이를 수 있다.

사회안전망도 미비한데 극단적으로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보수세력이 도덕성과 정직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폭력까지 동원하여 국민의 신뢰마저 상실한다면 국민들은 그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정치세력이 아니라 상위 몇%의 소수만을 위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굳히게 된다.

거기에다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도 경제정책에 있어 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면 대한민국 공동체는 촛불의 광장에서 대부분의 제도권 정치세력을 추방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공동체 회복의 과제

공동체는 공존을 전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에서 생산되는 것이 극소수의 상위층에서 독식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또한 동시에 공동체가 비효율적으로 정체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한편 구성원의 공존을 전제로 할 때 공동체는 구성원간의 신뢰라는 사회자본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상호 신뢰하지 못하면 결국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배제해 버리는 싸움이 되어 버리고, 그러다 보면 극한 대립의 반복으로 공동체가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살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경제와 권력의 독점구조, 그리고 신뢰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빨리 찾아내야 할 것이다.

우선 공존을 지향하는 정치·경제적 생존을 위해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국과 같이 진행된 한국의 무분별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이는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실패(market failure)가 문제가 아니라, 시장 자체의 괴멸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하루 빨리 사회안전망과 소득의 균등한 분배를 염두에 두는 경제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즉, 공동체의 자원을 나누는 쪽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데, 실업 문제, 복지 문제, 격차 문제는 공동체 자원의 나눔이 없이는 해결 불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과도하게 오른쪽으로 간 한국의 정치·경제를 이제는 다시 왼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성질이 급한 보수세력은 이러한 주장을 좌파의 주장으로 공격하려 하겠지만 지금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사회주의로 가자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내에서 공동체의 자산인 시장을 살리자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시장주의자의 자세이지 소위 '좌빨'의 자세가 아님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지금의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 다는 사회주의 혁명에 맞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살려낸 케인즈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유럽의 예나 과거의 케인즈 경제정책이 보여주고 있듯이 좌로 이동한 경제정책도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내었고 북유럽의 경우에는 아직도 경제성장과 생산성 면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물론 이 모델을 한국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공동체의 두 번째 필요조건인 신뢰 회복의 문제는 신뢰가 붕괴된 요인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우선 이명박 정부와 보수세력의 신뢰가 붕괴된 이유를 보면 대략 네 가지다.

첫째는 전문성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이명박 정부의 인사나 정책을 보면 과연 하는 일에 대해서 정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전문가가 전문지식을 살리는 자리에 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꼼꼼한 심의를 거친 정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경제, 교육, 통상, 통일, 문화, 노동, 정보 등 헛발질을 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필자의 관련 칼럼 :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이명박 정부)

두 번째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바꾸는 사람과 정부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앞에서는 안 한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하고, 말을 해 놓고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고 주장하면 신뢰는 금방 깨지게 되어 있다. 요즘은 정보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거짓말은 정말 철통같은 보안이 아닌 이상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세 번째는 이 정부와 보수 세력이 과연 90% 이상 되는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뢰가 깨졌다. 이는 앞에서 장황하게 주장한 내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상위 몇%만을 위하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이 정부와 보수세력이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 정권인지에 대해서 신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네 번째는 이 정부와 보수세력의 통제 중심적 사고다. 수만명의 군중이 모여서 시위를 하는데 촛불집회처럼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한민국 시민은 매우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보수진영에서는 체제전복 세력이라는 배후를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체제전복은 아마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전복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촛불시위를 통해 한물간 공산주의나 전체주의를 모색하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는 현 보수진영에서 보수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전복 세력이 있다고 보도하고 통제하고 진압하는 정부와 보수세력을 보고 국민들은 이 정부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촛불시위 ⓒ프레시안

대한민국 공동체를 살리는 길

이상의 분석에서 보면 현 정부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은 자명하다. 우선 과도하게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 한국의 정치·경제 구조와 제도를 더 이상 오른쪽으로 옮겨 놓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무너지거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현 집권세력을 정말 소수의 섬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관련 칼럼 : 새로운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탄생)

그 다음 필요조건은 신뢰의 회복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누가 보아도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사를 하고, 둘째 사실만을 투명하게 말하고, 셋째 국민과 함께하는 정책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통제와 진압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과연 보수정권은 정책을 '좌 클릭'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일 터인데, 보수정권의 색깔을 살리면서 정책을 좌 클릭하는 비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이명박 정권과 보수세력의 브레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효율성에만 목을 맬 것이 아니라 정책이 지향하는 보수적 가치에 무게를 둬야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그들의 몫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한국이 당면한 문제는 좌나 우,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와 촛불시위를 통해 상당수의 국민이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살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공동체 의식은 공동체의 안전을 담보하고, 서로 공존하고, 또 민주주의와 평화를 존중하는 시민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공동체가 창의적일 수 있다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의식이다. 이 공동체의 문화는 '추천'을 클릭하며 서로를 북돋아 주는 것이며, 기꺼이 기부금을 내는 새로운 기부(donation)의 문화이며, 초중고생과 아줌마도 사회의식을 갖는 참여의 문화이다.이러한 공동체 문화야말로 진정한 '선진문화'라 아니할 수 없다. 뉴라이트 선진화 단체는 이들에게 훈계할 것이 아니라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필자는 이를 한반도의 남쪽에서만 새롭게 생겨나는 공동체 의식이라고 하여 "대한민국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붙였다. 새삼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단위로 하는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민족주의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의 싸움은 단순히 권위주의 보수세력과 민주주의 진보세력간의 싸움이 아니라 과연 보수세력이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느냐, 그리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갈 능력과 자질이 있느냐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세력에게는 매우 섬뜩한 역사의 메시지가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보수세력이 새롭게 시도하는 통제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들의 통제는 새롭게 형성되는 선진적인 대한민국 공동체, 즉 새로운 선진적인 민족주의 형성에 대한 통제와 탄압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통제와 탄압이다.

지금부터 촛불집회와 90% 이상 국민의 과제는 이 선진적인 공동체를 끌고 미래로 나갈 세력을 찾고 만드는 일이다. 서울 한 복판에서 대한민국의 군복을 입고 성조기를 흔들면서 주먹과 각목을 휘두른다고 이러한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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