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국적으로 냄비를 들고일어난 시위대의 규모를 살펴보면 2001년의 정치 혼란과 디폴트 선언 등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일부 외신들은 아르헨티나가 디폴트를 선언할지도 모른다는 다소 성급한 분석을 내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 당국자들은 작금의 사태에서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기보단 오히려 느긋하게 현 상황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자는 최근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까사로사다(대통령궁)의 국정홍보 담당자들과 연쇄적으로 접촉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농민파업과 냄비시위 등 정국 혼란, 경제 위기와 관련된 대화들이 오갔다.
그런데 이들 관료들은 하나같이 현재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역대 최고수준(500억 달러)에 이르고 있으며 곡물 재고 또한 예년의 수준을 훨씬 넘고 있어 곡물수출만 재개된다면 외환보유고의 기록을 또다시 갱신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했다. '경제위기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대규모 시위로 인한 정국의 불안에 대해서도 이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2001년 델라루아 정권의 퇴진 운동에 앞장섰던 반정부 시위대들(노총과 노동자연합)이 현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정부 당국자들이 정작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농민들이나 냄비를 든 정치 세력들이 아닌 서민 여론의 향배였다. 시위 군중들이 외친 구호를 살펴보면 시위 양상이 2001년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등장한 냄비시위는 100여 일이 넘게 도로를 차단한 농민시위에 대한 반발이자 이를 방치한 정부에 대한 불만 표출이 전부라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정권 퇴진을 외치기보다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 같은 사태만은 막아달라는 항의의 표시라는 얘기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서민들은 정부의 곡물 수출세 인상에 대항해 농민들이 각종 식품의 수출은 물론 국내 공급마저 중단시켜버리자 식료품 품귀현상에 고통을 받았다. 또한 식료품 공급이 막히자 급격한 인플레 현상마저 보이고 있어 장바구니 걱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정부나 농민대표들은 서민들의 애로사항은 외면한 채 시간을 끌수록 국제시장에서 곡물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상황만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간을 끌어도 서로가 손해 볼게 없다는 배짱에서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거래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곡물증권 거래소의 리까르도 포르베스 사장은 "농민 시위로 인해 일시적으로 거래가 중단된 곡물의 양이 1000만 톤에 이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100여 일이 지나는 동안 대두와 옥수수, 해바라기씨 등의 가격이 100% 가까이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포르베스 사장은 이어 "현재 아르헨티나가 보유중인 곡물과 잡곡의 재고량은 약 2300만 톤에 이르고 있어 농민들과의 타협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정부는 외환 수급에 상당한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곡물가 급등으로 추가 세수 노린 정부의 꼼수'
아르헨 정부는 국제시장에서 각종 곡물이 상종가를 치자 모든 곡물의 현지 선적 가격의 35%를 수출세로 걷어 들이겠다는 대통령특별법을 발표했다. 곡물가 인상분만큼 세금을 연동시켜 징수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정부의 일방적인 수출세 인상에 대해 농민들은 적정선의 세금(22~24%)은 인정하겠지만 35%는 너무 과한 것 아니냐면서 곡물거래를 전면 중단시켰다.
이렇게 해서 농민대표들과 정부의 갈등이 장기화되자 국민들은 "먹거리 천국인 아르헨티나에서 장바구니 걱정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정부의 무능과 농민 단체들의 무책임한 행위를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르헨 정부는 수출세를 대폭 인상시키면서 수출을 억제해 국내물가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급격한 국내 물가 인상과 식료품 품귀현상만을 부추기는 꼼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정부와 농민들은 급등한 곡물가의 혜택을 한껏 누리겠지만 정부의 실책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 몫으로 돌아왔다는 비난 여론이 비등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곡물 수출세 인상으로 물가안정과 국가소득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했던 정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민심이반'이라는 역풍만 만난 형국이 된 것이다.
일반 서민들의 악화된 여론을 확인한 정부는 고육지책으로 수출세에 관한 문제를 국회로 넘기게 된다. 대통령이 수출세율을 놓고 농민대표들과 힘겨루기를 계속해 민심을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민주적으로 해결하라고 떠넘긴 셈이다. 곡물 수출세의 추가소득분은 서민 복지분야에 전액 활용하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실추된 바닥민심을 다독이겠다는 제스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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