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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말라, 조금 늦더라도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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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말라, 조금 늦더라도 꿈은 이루어진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6/18] 장애를 딛고 세계 5위봉 마칼루 오른 산악인 김홍빈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열손가락이 없는 불굴의 산악인 김홍빈씨가 최근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히말라야 마칼루 등반에 성공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김홍빈씨는 지난해 한국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고 장애인으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도전하고 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산악인 김홍빈씨와 함께 어려운 상황에서도 히말라야를 넘게 한 그의 의지와 그에게 산은 어떤 의미인지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산악인 김홍빈씨입니다. 김홍빈씨는 1964년 전남 고흥 출생으로 90년 광주시 광주대학교 전자계산과를 졸업했습니다. 한동안 스키 선수로 활약해 동계 전국체전 노르딕, 바이아드론 스키 부문에서 1,2,3위를 차지했고 20살 때 등반을 시작해 동계 에베레스트와 파키스탄 낭가파르밧을 등반했습니다. 91년 북미 맥킨리 단독등반 중 열 손가락을 절단하는 사고를 겪었고 6년 후인 97년 다시 등반을 시작해 유럽 엘브루즈,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남미 아콩가구아, 북미 맥킨리와 아시아 에베레스트, 그리고 호주대륙 코지어스코 등 현재까지 6대륙 최고봉을 등정했습니다. 또, 지난해 장애인으로는 세계에서 4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으며 지난달 히말라야 마칼루 등정에 또 성공해 현재 8000m급 4개봉에 올랐습니다. 1999년부터 한국 장애인 알파인스키 대표선수로도 활동해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 출전했고 2006년 5월에 은퇴했습니다.

김홍빈씨가 현재 KBS 광주 총국에 나와 있는데요 연결해 보겠습니다.

박인규 :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마칼루봉이라는 데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고 하는데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김홍빈 : 이번 등반은 정말 많은 분들이 성원해 주고 또 기도를 많이 해줘서,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는데 정말 큰 사고 없이 등정하고, 귀국까지 너무너무 정말 감사드리고요.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세계 5위라면 높이가 얼마나 되는 거죠?

김홍빈 : 8463미터입니다.

박인규 : 대단하군요. 이번 등반은 몇 분이 함께하셨습니까?

김홍빈 : 후배 한 명, 피디 한 명 해서 세 명이 등반했고 등반기간은 두 달 정도 잡고 갔습니다.

박인규 : 세 명이면 굉장히 단출하게 가신 것 같아요. 높은 데는 많이 가시는 것 같은데

김홍빈 : 네. 저는 많은 팀을 꾸려서 가지 못하고 저 혼자 갈 때도 있고 또 후배나 베이스매니저로 해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인규 : 암만 그래도 장애인이시면서 세계 5위봉에 오르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이번 마칼루봉은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김홍빈 : 제가 어떻게 보면 이번에 등반에서는 굉장히 계획을 잘 짜서 쉽게 등반하고 왔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고생도 덜하고

박인규 : 준비를 많이 하셨다. 이번 등반에서는 후배가 개조해 준 장애인을 위한 자일의 도움을 받았다던데 어떤 장비였습니까?

김홍빈 : 동아대학교 88학번 조병래 후배인데요, 같이 2006년에 가셔브룸 등반을 하면서 제 손을 보고 어떻게 장비를 개조하면 형이 좀 잘 쓸까 연구해서, 공장에 가서 본인이 직접 볼트를 받고 해서, 전에는 두 손으로 잡고 해야 되는데 한 손으로만 할 수 있어서 굉장히 체력소모도 많이 줄이고 등반속도도 빨라졌습니다.

박인규 : 저는 사실 궁금한 게, 아무리 그래도 손가락이 없으면 자일을 잡기 힘들 것 같은데 잡으실 수 있으십니까?

김홍빈 : 저는 굉장히 위험하다 싶을 때 아니면 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줄을 사용하면 더 힘들고 체력소모도 더 많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구간에서만 잠깐씩 쓰고 있습니다. 대부분 발로만 올라가고 있죠

박인규 : 제가 앞에서 김홍빈씨 약력을 소개해 드리면서 세계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도전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6개 올랐어요.

김홍빈 : 현재 6개 대륙을 등반했습니다.

박인규 : 이제 하나만 더 오르시면 세계에서 처음 오르시는 거네요?

김홍빈 : 양손 절단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7대륙 등반을 완등하게 되는 거죠.

박인규 : 마지막 하나 남은 데가 어딥니까?

김홍빈 : 남극에 있는 빈슨메시프입니다. 여기는 올 겨울 11월 말경 출국해서 12월 초에 정상등정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올해 안에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드시는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약력을 보니 굉장히 운동을 잘 하시는 분이었고 사고 나시기 전까지는 스키도 하셨으니까. 그른데 맥킨리봉을 오르시다가 사고를 당하셨어요. 그때도 단독등반하신 겁니까?

김홍빈 : 저는 원래 맥킨리를 갈 계획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대한산악연맹에서 주최하는 91년 가을시즌에, 시샤팡마 8027미터하고 초오유 8201미터 연속등반을 하기로 계획돼 있어서 훈련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연맹에서 맥킨리 등반을 하니까 같이 가자고 권유해서 준비해서 같이 떠나기로 돼 있었는데, 제가 비자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2주 정도 늦었습니다. 그래서 이왕 등반하는 거 정말 혼자 한 번 멋지게 등반해 보고, 또 제가 91년도에 낭가파르밧 등반을 하고 내려오면서 8천 미터 14좌의 꿈을 꿨습니다. 그래서 그런 등반을 앞으로 계속 하려면 식량을 개선해야 될 것 같고 장비도 최대한 적게 쓰고, 대신 그만큼 기술습득을 많이 해서 등반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준비해서 떠났었는데요

박인규 : 히말라야 8천미터급 14좌 등반을 위한 연습게임 비슷하게 하신 거군요

김홍빈 : 연습은 아니고요, 맥킨리도 굉장히 어려운 산인데요, 혼자 간 계기가 돼서 차라리 단독등반을 한 번 해보자 그런 의미에서 주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정말 혼자 정상을 다녀놔 보자 해서 떠났습니다

박인규 : 어떻게 사고를 당하신 겁니까?

▲ ⓒ프레시안

김홍빈 :
그 당시 장비는 문제되지 않았는데, 식량 같은 경우 대부분 저희들은 쌀식을 많이 하는데 저는 쌀을 빼버리니까 김치라든가 모든 부식들이 줄어들고요. 대신 간식을 가져갔습니다. 그 당시 제가 낭가파르밧에서 먹었던 단팥죽이 입에 맞아서 그걸 많이 준비해 갔고 간식종류 비스킷 그런 걸 가져갔는데 실제 그것을 한 3,4일 먹으니까 질리더라고요. 그래서 먹는 것이 부실해지고 하다 보니 마지막 5700 데날리페이스 마지막 캠프에서 실은 정상시도를 두 번 했습니다. 그런데 체력이 안 받쳐주고 그래서. 하루만 더 쉬면 내일은 정상 갔다 오겠지 하고 텐트 안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죠. 그러면서 고소가 오고 탈진이 겹치면서 수면상태로 들어가고 그래서 정말 의식이 없었는데, 데날리 국립공원 구조대원들이 발견해서 구조하는 과정에서 실은 제가 양손을 잃게 된 겁니다. 그 날 구조 당시 그 날 밤만 그렇게 추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기들도 구조하면서 당신을 구조하면서 우리도 죽는 줄 알았다. 구조 당시에 제가 썰매에 실려 내려오는 장면을 봤는데 눈이 많이 쌓여있더라고요. 정말 당신들도 힘들었겠구나, 아프다는 소리도 못했습니다.

박인규 : 목숨은 구하셨지만 깨어나 보니 손가락이 다 없어졌다. 그때 심정은 참 말로 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김홍빈 : 병원에 막 실려와서는 설마 절단되리라고는 생각 안 했죠.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고 한 달 후에 절단했는데요. 손가락이 새까맣게 말라서 주먹을 쥔 것 같이 굽어들어오고요. 그리고 한 달 후 절단하고 두 달 동안 한 일곱 번의 수술 끝에 제가 지금 생활할 수 있는 손이 만들어졌습니다.

박인규 : 그 정도 큰 고생을 하면 대부분 다시는 산을 안가겠다 이렇게 될 것 같은데, 한 6년 산에 안 가셨죠? 어떻게 다시 가게 되신 겁니까?

김홍빈 : 국내 산은 꾸준히 다녔습니다. 암벽등반도 하고 빙벽등반도 나름대로 하고, 또 눈이 있으면 설상훈련도 해서요. 원정을 가기 위해서 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제가 좋아서, 또 선후배 분들이 산에 데리고 다녀 주니까 제가 따라가서 훈련하고 그랬습니다.

박인규 : 6년 만에 다시 산에 가셨다는 건 그렇다면 해외 원정을 가신 거군요

김홍빈 : 네. 97년에 가게 된 겁니다.

박인규 : 그때 처음 간 산이 어디였습니까?

김홍빈 : 일본에 있는 다떼야마라고 3015미터인데요, 제가 실은 7대륙 등반을 준비하면서 정말 내가 간다고 해서 중간에 포기한다든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제가 그 일본의 다떼야마에서 나름대로 몸을 테스트했던 거죠

박인규 : 문제의 맥킨리봉은 언제 오르신 겁니까?

김홍빈 : 98년도 5월에 등정했고요. 그 다음 2002년도에 다시 한 번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맥킨리 정상을 두 번 등정했습니다.

박인규 :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김홍빈 : 그냥 너무 즐거웠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등반한다는 자체가 설레고 즐겁습니다.

박인규 : 마냥 즐겁지만은 않으셨을 거란 느낌이 드는데. 워낙 큰 사고를 당한 산이기 때문에

김홍빈 : 한편으론 좀 힘들고 어려워야 산행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너무 쉬워버리면

박인규 : 아무래도 손가락이 없는 상태에서 등반하기가 쉽지만은 아닐 텐데 장애인으로서 등반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겁니까?

▲ ⓒ프레시안

김홍빈 :
손을 못 쓴다는 건데요. 대소변을 가린다든가, 신발끈을 묶는다든가, 야영할 때 텐트를 치고. 일반 사람들은 굉장히 사소한 거지만 저한테는 그 부분이 더 큽니다. 산행하는 건 전혀 그렇게 큰 불편이 없는데 그런 것들이 내가 출발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불편한 것들이 조금씩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완전히 혼자 오르시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있겠네요.

김홍빈 : 그렇죠. 혼자 전혀 도움없이 등반한다는 건, 일단 신발끈을 묶지 못하니까 출발도 못합니다. 먹는 거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박인규 : 아까 맥킨리봉 사고 말씀하실 때 들어보니까 식량 준비가 소홀해서 체력이 탈진해서 어떻게 보면 사고를 당한한 건데 그 이후로는 굉장히 산행하시면서 준비를 많이 하신다고요.

김홍빈 : 지금은 가장 맛있고 입에 닿는, 수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하고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맛있는 것부터 항시 먹고 주위 대원들한테도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항시 체력이 달리지 않고 좋은 컨디션에서 등반할 수 있습니다.

박인규 : 작년에 에베레스트에 오르셨죠? 장애인이 아니실 때 올라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김홍빈 : 89년도 동계 때 시도했는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춥고 해서 정상 등정을 못했고요.

박인규 : 그 뒤에는요?

김홍빈 : 그리고 2000년도에 장애를 입고 가을 시즌에 등반을 한 번 했는데 그때도 컨디션 조절을 못해서요. 그때도 정상등정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내려왔습니다.

박인규 : 작년엔 겨울에 올라가셨다고요

김홍빈 : 봄시즌에 올라갔습니다. 제가 에베레스트를 겨울, 가을, 봄에 올라가는 게 가장 등반하기 좋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에베레스트에 많이 가긴 합니다만 그래도 세계 최고봉인데 작년에 등정하실 때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김홍빈 : 에베레스트도 마찬가지 같아요. 굉장히 나름대로 국내에서부터 연구를 많이 하고 암벽을 넘어야 될 부분이 있다고 해서 암벽등반도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 빙벽도 하다가 실은 다치기도 많이 했는데요. 부러지고, 마칼루봉 이번에 출국하기 두 달 전에는 허리 척추에 금이 가서요. 그런데 병원에 입원도 못했습니다 실은 주위 분들이 알면 만류할까봐 병원에 입원도 못하고 허리보호대만 차고 두 달 집에서 계속 쉬쉬하면서 준비해서 갔다 왔습니다.

박인규 : 장애인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건 국내 최초고 세계에서는 네 번째라는데 그렇다면 다른 나라 장애인들도 에베레스트 등반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 모양이죠?

김홍빈 : 미국의 톰 휘태커는 한 다리가 절단돼서 98년도 봄시즌에 정상을 갔었고요. 미국의 에릭 맨 메이어는 시각장애인인데 2001년도에 등반했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 마이크 앵글리스 같은 경우는 양 다리가 절단됐는데 2006년도에 등반했고요. 저는 2007년도에 등반했습니다.

박인규 : 대단하신 분들이 많군요. 목숨을 걸면서 어떻게 보면 세계 최고봉에 도전하신 건데 김홍빈씨는 워낙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하셨습니까?

김홍빈 : 어렸을 땐 시골에 살았으니까 전혀 그런 걸 몰랐는데요, 고등학교 다니면서 TV나 매스컴에 보면 해변에서 야영하고 산에서 야영하고 그런 게 굉장히 부러웠어요. 그래서 나도 해보고는 싶은데 그런 장비도 없고 기회가 없어서 대학 다니면서 바로 산악회에 들어가서 훈련하면서 산을 시작하게 됐죠.

박인규 : 산에 오르면 기분이 어떠십니까? 높다는, 세계적으로 오르기 힘들다는 산에 오르면 어떤 기분이세요?

김홍빈 : 오르게 되면 일단 정상을 가면 자신감이 생기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고 옵니다.

박인규 : 저는 한 가지, 이건 현실적인 의문이기도 한데... 이게 한 번 높은 산 올라가려면 돈이 꽤 많이 든다고 하는데 비용은 어떻게 조달하십니까?

김홍빈 : 많이 조달을 못하기 때문에 항상 가난한 등반을 합니다. 그래서 혼자나 둘이 갈 수밖에 없는 등반이죠. 실은 저도 팀을 꾸려서 가고 싶은데요, 그 경제적인 걸 굉장히 해결할 수 없어서 그런 등반을 하고 있습니다. 선후배 지인 분들의 십시일반 도움을 받아서 계속 등반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장애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27살 때까지 비장애로 살다가 27살에 장애인이 되신 거 아닙니까? 언론보도를 보니까 중장비 운전을 하고 싶었는데 손가락이 없어서 안 되더라. 그런 가시를 봤어요. 그럴 땐 굉장히 힘드시지 않았습니까?

김홍빈 : 저도 운전면허는 그냥 내가 능력이 돼서 시험에 합격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요, 제가 1종면허도 갖고 있었습니다. 사고 이전에. 그런데 반납하고 다시 2종을 땄고요. 또 중장비라든가 대형차를 운전하려고 하면 손가락이 네 개가 있어야 됩니다. 제가 아무리 능력있고 운전을 잘해도 외관상으로 손가락이 네 개가 없으면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거예요. 테스트를 해서 정말 내가 능력이 안 된다 해서 결격사유가 되면 상관없는데, 일단 서류상 외관상만 보고 안 된다고 해버리기 때문에. 제가 실은 1년 반 동안 포크레인 운전도 했었고요. 또 제가 등반을 계획하기 전에 그런 포크레인 일을 하려고 취업이 다 됐었는데 운전면허를 제출하라고 하니 제가 면허를 못 땄었거든요 그런 사유 때문에. 그래서, 그런 이유로 해서 어떻게 보면 제가 다시 산으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박인규 : 27살 때까지 비장애인이실 때는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모르셨는데 17년을 장애인으로 사시다 보니 우리나라 장애인들의 어려움들, 어떤 게 실감되시던가요 특히?

▲ ⓒ프레시안

김홍빈 :
우리 사회는 노약자나 장애인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으면 누구나 편한 거 아닙니까. 임산부도 편할 거고 임산부도 일시적인 장애인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 걸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저도 몰랐으니까요. 제가 장애인이 되고 보니까 장애인들은 항시 힘들게만 살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물론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고쳐나가면 앞으로는 누구나 우리 주위에 예비장애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모르는데요.

박인규 : 말하자면 김홍빈씨 같은 경우에도 세계에서 높다는 산도 오르고 하시는데 실제 능력이 있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거죠?

김홍빈 : 네. 일반인들도 취업하고 기회가 좁아지는데 장애인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정말 더 좋아져야 되는데 더 현실은 힘들고 있으니까 그런 게 좀 안타깝죠.

박인규 : 실제로 장애인으로 살아보시니까 장애인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나 정부에서 이런 걸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느끼신 건 없습니까?

김홍빈 : 장애인이라는 그 자체를 들먹이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생활이 느리고 불편할 뿐이지 일반 사람들보다 능력있는 장애인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를 자꾸 줘서 또 어떻게 보면 실패도 하고 또 실패와 더불어 정상인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두세 배 노력하다 보면 더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장애인들이 하나씩은 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걸 주위 사람들이 나름대로 개발하고 찾아서 이런 일을 해봐라. 저도 그런 경우들이 많았거든요. 실은 저도 운전면허를 2종을 딸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선배가 화물차를 몰고 주먹을 쥐고 운전을 해봐서 되니까 저를 외곽지로 데리고 가서 한 번 해봐라. 그래서 자신을 갖고 운전을 시작했죠.

박인규 :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주지 않을 게 아니라 능력을 보고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올 겨울에 빈슨 메시프봉에 도전하시고, 그럼 1차적인 목표인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 셈인데, 그렇다면 산악인으로서 목표는 끝나는 겁니까? 다른 목표가 있습니까?

김홍빈 : 90년 낭가파르밧 등반을 하고 내려오면서 꿈꿨던 8000미터... 그때 히말라야 14좌의 꿈이었거든요. 그 꿈이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 번 계속 해보고 싶습니다.

박인규 : 지금까지 14개 중에 4개 봉을 오르셨으니까 10개가 남았는데, 1년에 한 개씩 오른다 치면 10년 걸리는데 그때는 체력이 달리시는 거 아닙니까? 언제까지로 계획을 잡고 계세요?

김홍빈 : 경비만 마련되면 1년에 대여섯개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한 시즌에 두 개씩 하는 게 훨씬 더 경비나 체력소모가 적습니다 실은. 물론 경비가 문제가 돼서 그러는데요

박인규 :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경비가 문제다. 대략 14좌 등반을 언제까지 해야 되겠다 그런 계획이 있으십니까?

김홍빈 : 저 나름대로의 계획은 5년 안에 끝내고 싶은데요, 좋은 조건이 되면 더 한 3년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김홍빈씨의 산행을 보시면서 많은 장애인들이 희망과 용기를 가질 것 같은데요, 혹시 장애인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마무리말씀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김홍빈 : 움츠리지 말고 밖으로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도 제가 열심히 무슨 일이든지 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니까요 주위에서 많이 도움을 주려고 하고 제가 도움을 받다 보니 용기가 생기고요. 정말 제가 등반하면서 항시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는 이런 글귀를 계속 되새깁니다. 조금 늦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꼭 꿈은 이루어진다. 그런 것들이 정말 제가 에베레스트를 19년 만에 올랐던... 제가 89년도에 시도해서 2007년에 등반했으니까 19년 걸렸습니다. 지금 7대륙 등반 같은 경우도 97년에 시작해서 올해 끝나면 12년이 걸립니다. 아마 웬만한 사람들은 도중에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8천미터 14좌도 꼭 꿈을 이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주위 사람들한테 꿈은 꾸는 사람한테는 꼭 이뤄지게끔 행운이 온다는 좋은 메시지를 한 번 남겨주고 싶습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못할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박인규 : 조금 늦더라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꿈이 이뤄진다. 장애인들도 한 번 새겨야 할 것 같고요, 우선 올 겨울에 남극 빈슨 매시프봉 등반 성공하시고, 또 5년 3년 내에 히말라야 14좌 등반도 성공하셔서 한국인의 기개를 많이 떨쳐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홍빈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열손가락이 없는 상황에서도 세계 5위봉인 히말라야 마칼루 등반에 성공한 불굴의 산악인 김홍빈씨와 함께 히말라야를 넘게 한 그의 의지와 그에게 있어 산은 어떤 의미인지..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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