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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우울과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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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우울과 예감

[권혁태의 일본 읽기] <13>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

'우치게바'- 그 살육의 역사

일본 운동사에 관한 글을 읽거나 글을 쓰다보면, 다른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에 부닥치게 된다. 내부 숙청, 내부 린치의 역사가 그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히 운동과정에서 나타나는 노선의 대립과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또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대립과 분열 위에서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연착륙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운동이 실패해도 역사적 유산으로 축적되고 이 과정에서 과거의 운동은 비판의 대상은 되지만 부정되지는 않는다. 만일 일본의 사회운동이 실패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운동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운동의 대립이나 분열이 후대의 경험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운동 그 자체의 부정이나 완전 몰락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내부 숙청과 내부 린치를 일본에서는 '우치게바'(内ゲバ)라 한다. '우치게바'(내부라는 뜻의 일본어와 Gewalt라는 독일어의 합성어로 조직 내의 주도권 폭력적 대립을 뜻함)로 인한 서로간의 폭력으로 희생된 피해자만 1969-1999년 동안 무려 1,960건, 사망자 113명, 부상자 4,600명이다. 반체제 운동이 많은 인명 손실로 이어지는 사례는 적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대부분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항의의 수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많은 데 반해, 일본의 경우는 좌파 내부의 대립 항쟁으로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우발적인 충돌에 의한 '사고'가 아니다. 정밀하게 계획된 '살인'이면서 이론적으로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경우가 많다. 연합적군은 무장투쟁을 위한 산악 훈련 중, 총 14명의 동료를 '내부공산주의화의 순화'라는 이유로 살해했다. 1974년에 '우치게바'를 선전하는 1973년 12월의 다음과 같은 한 당파의 성명문은 당시의 상대방에 대한 증오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반혁명분자는 심장이 마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놀래 (중략) 필사적으로 밖으로 도망가려 했다. (중략) 동지의 목숨을 빼앗은 저주스러운 학살자의 손과 팔을 자르고 머리, 팔, 그리고 전신에 혁명적 죄과에 걸맞게 쇠망치로 50발을 꼼꼼하게 각인시켰다', '현관에서 과감하게 들어간 우리 부대는 (중략) 놀래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창문으로 도망가려 하는 XX에게 강력하게 쇠망치 한방을 가했다. 방바닥에 나뒹굴어 우리 영웅적 부대의 진격에 겁에 질려 있는 가족 앞에서 용서 없는 철퇴를 모든 힘을 모아서 전신 모든 곳에 가해 피바다에 침몰시켰다.

오시마 나기사의 우울과 예감

한국에서 '감각의 제국'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 사회파 감독인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1932- )감독이 만든 '일본의 밤과 안개'(日本の夜と霧, 1960년)라는 영화가 있다. 일본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기수로 알려진 그 감독이다. 일본 사회운동의 내부분열을 '사전 예감'하는 영화 중의 하나다. 물론 내부 숙청을 그리는 영화나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의 '고백'(이브 몽땅 주연)에는 1950년대 체코의 공산당 지도자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면서 숙청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벨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의 '위증의 시대'(1957년)를 영화화한 '가짜 대학생'은 공산당 지도하의 내부분열의 폭력적 전개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또 1960년 안보투쟁 시 전학련 위원장이었던 니시베 스스무(西部邁)는 자신의 자발적 사상전향의 동기로서 공산당과의 대립과정에서 당시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증오 과잉'에서 오는 '죽음의 냄새'[死臭]을 들고 있다.
▲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日本の夜と霧、1960年)

▲ 오시마 나기사 감독(http://www.kyoto-filmfes.jp)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과거 운동권 동지였던 남녀의 결혼식이 열린다. 안개 낀 밤이다. 신랑은 과거 학생운동의 투사였지만 지금은 '전향'한 기자이다. 식장에는 과거에 같이 운동을 했던 '동지'들이 모여든다. 그 중에 지금 지명수배 중인 과거의 한 동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과거에 헝가리 민요를 즐겨 불렀던 동지의 문제를 꺼내든다. 동지는 프락치 혐의를 뒤집어쓰고 당 사문위원회에서 회부된 날 자살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타난 형사들에 의해 지명 수배 중인 동지가 체포된다.

사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100여분의 대부분을 식장에서 이루어지는 옛 동지들 간의 규탄이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1950년대 학생 운동 내부의 '전문 용어'가 좌익운동권 특유의 아지테이션(agitation) 억양으로 속사포처럼 등장하니 줄거리는 차치하고 하나하나의 대사를 읽어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1960년대를 '예감'하는 1950년대의 '우울'을 읽어낼 수는 있다.

1950년대는 일본에게 무엇이었을까? 닷지 라인으로 인한 극심한 불경기가 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성장으로 바뀌고 제1차 고도성장으로 접어드는 시기,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7년 만에 미국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의 시대로 접어든 시기, 하지만, 비키니 섬 피폭, 원수금 운동의 개시, 파괴활동방지법 파동, 약 1년이나 지속된 미이케(三池) 탄광 투쟁, 경찰직무법 파동, 그리고 60년 안보 투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 다른 한편에서 존재했던 시기였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깔고, 일본 좌익사, 그 중에서도 1950년대를 그린 작품이다. 일본 공산당이 코민포럼의 비판을 받아들여 1950년 무장투쟁 선언(소위 5전협)을 하고, 다시 1955년에 평화 노선(소위 6전협)으로 돌아서는 과정을 흔히 노선전환이라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지도부의 '멋대로' 노선 전환으로 상처를 입고, 반목하게 되었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완전히 반(反) 일본공산당 영화임과 동시에 1960년대 이후의 신좌익 운동의 정당성을 사전/사후적으로 확인해주는 측면이 강하다.

예를 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헝가리 민요는 당연히 1956년에 일어났던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무력 개입을 은유하고 있다. 일본 좌익 운동에서 일본 공산당이 차지했던 정치적 위상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에 일본 공산당 등은 소련의 군사개입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군사개입을 비판하였고, 이것이 일본 공산당의 노선전환과 맞물려서 일본 좌파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신좌익의 반 스탈린주의, 반 일본공산당 주의의 태동인 것이다.

이 영화는 상영되자마자 4일 만에 개봉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관객이 별로 없자 제작사인 쇼치쿠(松竹)가 억지로 상영을 금지했다고 하지만, 관객이 그리 없는 편이 아니었다는 증언이 있는 걸로 봐서, 오히려 정치적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다음이고, 이 때 1960년대의 포스터 등을 구하려고 했지만, 쇼치쿠가 모두 이미 처분을 해버려서 구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아주 미묘한 작품이었다.

사실 오시마 자신이 교토(京都)대학 전학련 위원장 출신이었으니, 시대 상황으로 보면 공산당의 노선 전환으로 자신이, 혹은 주위 학생들이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담당한 이시도(石堂淑郎)도 도쿄(東京)대학 독문과 재학 중에 경험, 혹은 목격한 프락치 사건이나 분열로 인한 자살 등이 이 영화의 기본 줄기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결국 오시마나 이시도가 '의식'한 권력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일본 공산당이었던 것이다. 공산당의 노선 문제와 이 때문에 발생한 신좌익의 탄생은 1960,70년대에 발생한 '우치게바'의 전사가 되는 셈이다.

이런 정치적 성격 때문에 결국 오시마도 이시도도 모두 쇼치쿠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누벨 바그(새로운 물결)의 기수였던 오시마는 1960년대에 만든 이 작품을 포함한 세 작품을 통해 일본 영화계의 '거물'로 인지되기에 이른다. 사실 오시마는 당시 쇼치쿠 입장에서 보면 저예산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감독이었다. 실제로 1959년에 그는 데뷔작품, '사랑과 희망의 거리'(「愛と希望の街」)를 통해 흥행에 성공했고 이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되지만, 이 영화를 계급투쟁 영화라 생각한 제너럴 프로듀서인 거물 키도 시로(城戸四郎)에 의해 영화를 못 찍게 되었다. 결국 저예산 고수익을 고려한 쇼치구 회사의 요청에 의해 1960년 1년 만에 다시 영화를 찍게 되었다. 이 결과 탄생한 것이, '청춘잔혹이야기'(「青春残酷物語」), 그리고 '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이다. 이 두 작품으로 오시마는 많은 인기를 끌게 된다. 따라서 오시마는 이 같은 배경을 가지고 강력한 정치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시마 자신도 '일본의 밤과 안개'가 회사로부터 거부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고, 그래서 서둘러서 불과 11일 만에 영화 촬영을 끝냈다고 한다. 오시마를 오시마로 만든 것은 1960년대 제작된 무려 3편의 영화인 것이다. 소설가이면서 영화 조감독,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이시도가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3년간을 '오시마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시대'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오시마의 '예감'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일본의 밤과 안개'인지 그 자체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1950년대의 암울함을 밤으로, 그리고 시계 제로인 미래를 안개로 표현했다고 가정해도, 전체적인 흐름으로 봤을 때,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사실 이 시대에는 우울함을 어둠이나 안개로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회 추리파 작가로 유명한 마쯔모토 세이초 (松本清張, 1909-1992)가 억울한 사형수(제국은행 살인 사건)를 다룬 소설이름이 『일본의 어두운 안개』(日本の黒い霧)였다. 그리고 소설가 이부세 아유지(井伏鮎二)가 나가사키 피폭을 그린 소설 제목이 '검은 비'(黒い雨)였다. 혹은 아우슈비츠 수용경험을 그린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빅토르 프랑크르(Viktor E. Frankl, 1905-1997)의『밤과 안개』(1946년)의 영향일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1950년대가 오시마에게 어둠과 안개로 인식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좌익운동에 한해서 말하자면 오시마의 '예감'은 적중한다.

<참고문헌>

大島渚『体験的戦後映像論』 朝日新聞社, 1975.
石堂淑朗, 「『日本の夜と霧』前後」(『講座日本映画6』), 岩波書店, 1987.
권혁태 「일본 진보진영의 몰락」『황해문화』 200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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