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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섬세한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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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가장 섬세한 정원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30> 북촌의 정원구경 ④

가장 섬세한 정원은 구기동 한 빌라에서 보았다. 십수평의 넓지 않은 마당에 주부 강연심씨가 만든 정원은 마사토를 언덕처럼 채우고 돌과 나무, 연못을 조성한 경관이었다. 산봉우리 여러개처럼 보이는 큰 조경석부터 괴석과 조막만한 강돌까지 수백개의 각색 돌들이 높낮이를 이루며 굽이굽이 경관을 이뤘다. 돌을 배치하면서 식물을 같이 심어 빈틈없이 어우러지게 하고 돌확과 자배기를 연못처럼 묻고 수련을 심었다. 조경전문가가 왔다가 주인의 미의식에 쫓아가지를 못해 물러난 뒤 집주인이 직접 나섰다. 돌을 눕히고 세우고 화초와 어우러지게 한 솜씨가 자연스럽고도 모양과 색깔이 보면 볼수록 예뻤다. 식물원의 호화로운 정원과도 달랐다. 평범한 안목으로는 될 일이 아닌 듯하고 그 옛날 일본에 가서 정원예술을 전한 한국인의 피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날 정도였다.

"어떻게 놓으면 좋을지가 그냥 보여요. 타고난 것 같아요." 라고 이 주부는 말했다. 십여평 공간인데도 엄청나게 많은 나무와 흙이 들어가고 돌도 평생 모아두었던 것들을 다 꺼내 놓았다.

"내 맘껏 꾸며본 작은 정원을 평생 갖고 싶었어요. 돌과 나무를 다루는 일이 좋고 솜씨도 좀 있는 걸 믿고 시작했지요. 작지만 지금 여기가 제 꿈의 정원이 되었어요. 평생 심을 나무를 이번에 다 심어본 것 같고... 이 정원만 보면 난 부자가 된 것 같아요. 조용하고 꽃향기 가득하고 이 돌은 내가 앉는 자리이고.... 아침마다 물을 주면서 이웃마당도 보고 새로 사온 이 꽃을 어디에 심을까, 얘기도 하지요. 그보다 더 편안한 대화가 어디 있겠어요."

석이, 바위솔, 바위채송화등이 뿌리내린 돌은 생명력을 얻은 것 같았다. 애기쑥을 둘러심은 둥근 돌 하나는 '금동이'라고 이름붙였다. 천남성은 남성적인 풍치를 냈다. 주워온 고목등걸도 놓고 소나무, 으아리, 매화, 해당 그런 것들을 심었다.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야생화가 피고 돌은 물을 맞으면서 오묘한 빛깔을 머금어간다. 서른 살의 공학도 아들이 말을 건다. "엄마, 새들이 가을겨울까지 찾아오게 열매 맺는 나무도 심어요." "그래. 지금 있는 걸로는 여름까지밖에 못 먹겠지."

매일 마당에 나가 몸을 구부려 일하고 가꾸고 바라보는 일 자체가 휴식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매일 관리하지 않으면 마당은 금새 쑥대밭이 된다. 친구들은 바쁜 사업가인 그녀가 한가하게 마당에서 풀 뽑고 있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철따라 이 집 정원을 가보았다. 가을에는 개옷나무며 담장이의 단풍이 타는 듯 붉고 눈이 내린 날 본 분홍색 불로초는 투명한 얼음사탕 뭉치같이 돌 가운데 빛나보였다.
▲ 돌과 나무를 섬세하게 쌓아올린 구기동의 빌라정원.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가 더 많아졌다. 주부의 솜씨다. ⓒ하지권

▲ 구기동 빌라 정원의 한부분.ⓒ하지권

정원 규모를 넘어 산수를 즐긴다고 할까, 큰 규모의 경관을 일상처럼 볼 수 있는 곳은 세검정 부근이었다. 홍지동 옛 김홍근과 대원군 별장이던 석파정 부근 야트막한 산의 흰 화강암 치마바위에 소나무와 진달래, 살구꽃 이런 것들이 흐드러지고 아래쪽에는 홍지천이 흐르고 세검정 정자가 서있는 풍광이 아름다워 이곳에 조선조 내내 벼슬아치들의 별저가 그토록 많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쩌다 석파정에 들어가 보았는데 바위 위로 넘쳐흐르는 물과 계곡, 소나무, 산으로 이어진 경관 등은 압도적이었다. 몇십년을 불꺼진 폐가처럼 남아있다가 한 사업가의 개인소유로 낙찰돼 앞으로 영빈관으로 쓰일 것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무슨 빌딩같은게 들어서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 같다. 이미 깨뜨러 흐트러논 바위가 있다. 건물 중 한 채는 1950년대에 부근 손재형씨 집이 있는 세검정 로타리 한 음식점으로 옮겨졌다.
▲ 석파정 ⓒ박보하

▲ 세검정의 봄풍경. 이 집은 부근의 석파정에서 옮겨온 건축이다.ⓒ하지권

세검정 정자가 서있는 자리는 어지러운 도시화 때문에 조선왕조 사관들이 실록의 사초를 씻어버리던 차일암마저도 주택의 시궁창물이 흘러드는 지저분한 풍경에 잠겨들고 넓은 돌들은 깨지고 시멘트 구조물로 범벅이 됐다. 실록을 완성한 뒤 애쓴 사관들을 위해 여기서 차려진 세초연은 조선조 내내 실록편찬과 관련해 여러번 열리고 그 기록이 모두 나오지만 그림은 단 한 장이 안동 권벌의 집안에 전해온다. 권벌도 사관으로 참여했었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두어 남겼다. 여기 세검정에 그 그림의 모사본과 여러편의 시만이라도 현판처럼 걸어놓으면 좋지 않을까.

정약용의 어떤 책에서 읽었다. 그는 명동에 살았는데 여름날 하루 우레가 치고 큰 비가 내릴 듯한 것을 보고는 '비 내리는 풍경을 보겠다' 하곤 서둘러 말을 달려 세검정에 왔었다. 산에서 쏟아지는 세찬 물길이 이곳 세검정 부근에서 가장 장관을 이룬다고 했다. 친구들과의 이야기등 이 날의 이야기를 쓴 정약용의 글이 생각나 비가 제일 많이 내린 2006년 8월 홍지천을 따라 평창동까지 갔었다. 정약용이 감탄한 경관은 이미 다시 보기 어려운 것이 됐지만 물살이 내려가는 개울 속 바위들이 아름다웠다.

세검정 부근 경치에 대한 여러 사람의 감탄은 정약용뿐이 아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쓴 로웰(1884년 미국에 산업시찰 간 조선관리 일행 보빙사를 안내한 미국인. 천문학자)도 서울에 왔다가 '엄청나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일본인 동료의 말을 듣고 세검정에 왔다. 그는 여기서 '세상에서 이제껏 본 여성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다'고 썼다.
▲ 단기4292(1959)년 이화여중 1학년의 세검정 봄소풍. 이때만 해도 세검정은 소풍장소이고 물놀이가 가능했다. 세검정의 현대 인물사진 중 제일 예쁜 모습 아닌가 한다.ⓒ이온실,김옥희

1988년 여름 큰 비가 내려 홍지천 물이 넘쳤다. 그때 세검정 부근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서울시가 2007년 홍지천을 되살리는 공사를 했다. 제대로 된다면 인공적 청계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연의 경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시멘트 담벽으로 양안을 막은 속에서 흐르는 개천이 되었지만 복개하고 서있던 건물이 없어지고 물살이 드러나고 맞은편 산이 보이게 된 정도로도 좀 낫다. 세검정 정자가 있는 장소만큼은 가능한 한 자연그대로 복원됐으면 하지만 바로 옆에 도로와 주택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어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김홍근의 별장이자 흥선대원군 별장이던 석파정말고 이 근처에 또 몇집 야산을 낀 큰 집이 있는데 45도쯤 경사진 산비탈 마당이 담밖에서도 드러나 보인다. 아름드리 목백일홍과 진달래 소나무 철쭉 벚나무와 잔디밭이 호사가의 정원같아 보이고 아름답다. 이곳이 온통 빌라주택으로 에워싸이기 전에는 북한산 한적한 동네에 자리잡은 별장같은 주택이었다. 지금은 동네사람들이 이 집 담을 따라 지날때 마당 한끝을 보며 좋아한다.

올 봄 4월 구파발 꽃나무 단지에 갔더니 중년의 남성이 수양사과나무와 해당화 등을 수십그루 사고 있었다. 길동 자기 집에 심으리라고 하는데 '굉장해요, 올 기회 있으면 와보세요' 했다. 의외로 구석구석에 정원과 산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좋은 정원은 참 귀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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