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모두 강북의 오래된 동네에 있고 어떤 형태로든 마당 혹은 정원이 있었다. 집주인의 정원이나 화초를 다루는 다양한 취미들을 접할 수 있었다. 골목길 안에 꿈이 담긴 듯한 고도의 심미적 정원이 노출돼 있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귀한 식물 책을 모으는 것으로 화초사랑을 하는 남성도 있고 돌을 쌓아 조경하는 솜씨가 뛰어난 정원도 구경했다. 세검정 일대에서는 인왕산 바위 언덕의 흰 화강암과 살구나무, 소나무, 파란 하늘이 어울린 봄경치가 서울 시내 어디보다 좋았다. 다녀보면 볼수록, 서울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한옥이 모여있는 가회동, 삼청동 일대에서는 대문과 중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조그만 안마당이 흥미를 끌었다. 11평짜리 한옥은 댓돌 놓은 기단을 돌로 깐 뒤 남은 책상크기만한 세모꼴 자투리 땅이 '정원'이었다. 여기는 언덕받이라 말쑥한 기와담 안에 눈높이 정도의 앞집 기와지붕 너머로 툭 트여진 하늘이 펼쳐져 답답한 느낌이 없었다. 이 작은 땅을 철따라 어떻게 가꿀지, 재미나는 방법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굳이 이 작은 부분을 흙땅으로 남겨둔 주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담벼락은 정원대용이었다. 건축가 이문규씨는 크고 작은 한옥마다 화초담을 세워서 창문밖 50센티 떨어진 담장벽도 정원처럼 설계했다. 16평 한옥 쌍희재는 30대의 미술가 주인이 직접 무늬 놓은 화초담에 조그만 사각형 안마당을 가꾸며 쓰는 1인사무실이다. 한옥에 들어서면 보게 되는 이 사각형 안마당은 집집마다 그 활용에 개성이 드러나 보였다. '아늑한 데서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을 이뤄가려고 하지요' 하고 집주인은 말했다. 오래된 대추나무가 손바닥만한 마당 한가운데 서있던 삼청동의 한 집은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는데 고치면서 나무를 없애고 평면 공간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동안 드나들던 삼청동의 오래된 집들이 모인, 차도 들어가지 않는 미로같은 골목길에서 뜻밖에 뛰어난 정원을 만났다. 모두 집 외부 길에 면해 있어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철문의 어느 집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양옆에 꽃나무들이 많이 있는데 개나리는 거의 지고 앵두인지 살구나무 흰꽃잎이 지면서 흩날렸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랄까 돌계단마다 눈내리듯 쌓인 꽃잎하며 주변의 거센 바윗돌, 조용한 주택가 분위기와 어울려 이런게 한국의 마당이지 하는 생각이 났다.
또다른 작은 집 앞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다. 창문 아래 자투리 땅에 조그만 세모꼴 단을 쌓고 두그루 공작단풍과 창포를 심고 돌확을 놓았다. 단풍나무 아래엔 큰 고무자배기를 묻어 연못을 만들었다. 한겨울인데도 정원은 완벽한 미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집의 생김새에도 강한 개성이 느껴지고 소박하면서도 깊은 심미안이 그대로 배어나오는 탁월한 정원이었다. 거의 선정원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멘트 일색인 골목길에 이런 천국같은 국면을 만들어놓은 집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부근에 또 한 집은 담벼락에 동화에 나오는 그림같은 창문을 내어 집안이 조금 들여다보이게 했다. 커다란 문패같기도 했다. 창문 아래 반평쯤 되는 '정원'도 확보는 되었으나 마당을 꾸미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담장에 회를 바른 솜씨나 대문에 장식한 짝짝이 타일 두 개까지 예사 집은 아니게 보였다.
세 번째 집은 자전거나 지나갈 만한 골목길 안에 있는데 많이 낯익은 화가의 초상화를 마당에 매달아 놓았다. 커다란 소나무둥치가 산에서 나와 그 골목길 담 위에 걸쳐있어서 그윽한 분위기를 냈다. 무시무시할 만큼 섬세한 흰 브라우스의 젊은 여성과 청년이 산책 중인 듯 그 길을 지나갔다. 밝은 표정으로 사진을 허락했다. 여기는 세상을 내려다 보는 예술가들이 와서 사는 동네인가 싶었다.
또다른 길로 갔더니 오래된 한옥 대문앞에 달랑 돌확 하나가 놓였다. 얼마나 오래 거기에 있었는지 돌확엔 이끼가 잔뜩 끼었다. 정원이라고 생각되었다. 중국 돌확이 아닌 한국 화강암 돌확. 요즘 북촌을 뒤덮어가는 중국 석물과는 비교가 안되는 한국적 순수가 느껴진다. 현대적이기도 하고 전통적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누구를 흉내낸 아류가 아니라 창의적인 미의식이 느껴지는 이런 풍경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세간에 소개되어 속물화되고 닳아빠진 느낌을 내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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