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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군대폐지 국민투표가 가능합니까?

['헌법9조 세계대회' 리포트] ④ 스위스 평화운동가에게 듣는다

일본 헌법 9조의 핵심은 군대보유를 금지하는 것이다. 복무기간만 조금 줄인다고 해도 국가위기론까지 나오는 우리가 보기에 일본이 그런 헌법을 가지게 된 것은 태평양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한 대가로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죄를 진 나라가 당해야 할 벌로서의 군대 폐지.

그러나 헌법 9조 세계대회에서는 9조의 정신을 세계에 퍼뜨리자고 한다. 군대보유 금지를 전쟁책임의 대가가 아닌 인류가 추구해야할 새로운 가치로서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직위원회는 세계 각지에서 군대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개인적 차원의 저항이 한국의 병역거부라면, 아예 대놓고 군대를 폐지하자고 국민투표 운동을 벌이는 것이 스위스의 군대해산 운동이다.

1989년부터 군대가 없는 국가를 방문하며 연구해왔다는 크리스포터 보베(Christophe Barbey) 스위스 군대해산 운동을 대표해 이번 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현재 '분쟁과 국가의 비무장화를 위한 연합'(www.demilitarisation.org)에서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변호사이다.
▲ 스위스 군대 폐지 운동가 크리스포터 보베 ⓒ임재성

나라마다의 독특한 맥락이 있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군대폐지 운동을 국민국가 안에서 벌일 수 있는 것일지 궁금했다. 어떤 차이도 인정되지 않는 한국의 징병제 현실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랬다.

보베는 1989년과 2001년에 있었던 두 번의 군대폐지 국민투표를 주도한 그룹의 일원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89년에는 36%가 군대폐지를 지지했고, 2001년도에는 21%의 지지율을 기록했다고 했다.

하지만 보베는 이후 또 다시 군대폐지 국민투표를 발의할 계획에 대해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또한 앞으로 3~4년 사이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군사 이슈에 대한 투표는 2년에서 5년에서 사이에 보통 1번씩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스위스 안에서 다시 무언가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의 지지율이 89년에 비해 떨어진 이유에 대해 그는 89년에는 제안된 지 50일 후에 바로 투표에 들어갔지만 2001년에는 제안된 지 2년이 지날 때까지 지지부진하게 논의되었던 것이 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과거에 비해 약화된 풀뿌리 운동과 2001년 당시 정부가 5개의 매우 좌파적인 사안을 같은 국민투표에 붙였던 것 역시 실패의 원인으로 봤다.

스위스는 국민들이 직접 발의한 법안 등을 국민투표를 통해서 결정하는 제도가 130년간이나 존재했을 만큼 민주주의가 성숙한 국가이다. 한 예로, 2003년 5월 18일에 실시된 스위스 국민투표에서는 '군병력 감축안', '예비군제도 개선안', '70만 장애인에 대한 공공건물 접근가능시설 마련', '원자력발전소 폐쇄' 등 9개의 안건이 상정되어 투표에 붙여졌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군대폐지 같은 문제까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논리로 군대폐지를 지지하도록 했을까? 아무리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라고 해도 국민국가인 이상 군대 폐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과 같은 분단대치상황, 수십만의 군대, 강력한 군사주의 문화라는 조건을 가진 나라에서 활동하는 필자에게는 너무나 궁금한 부분이었다.

그가 답한 핵심은 이렇다. 군대로 인해 인권이 침해되고 그것이 어떤 문제를 만드는지만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군대를 폐지하는 것이 그렇게 급진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다른 나라의 역사를 언급했다. 도미니카에서는 1981년 경찰과 군대가 서로 싸웠고, 경찰이 이겨 군대를 폐지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혁명 직후인 1949년 군대를 해체하는 헌법이 통과되었다. 아일랜드와 파나마 역시 군대를 폐지했다. 그 과정에서 공통점은 민중들이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해체하는 것보다 많은 문제를 가진다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스위스의 우익들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며 독립국으로서 스위스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한다. 즉 스위스에서는 군대를 없앤 비무장 중립국이 될 것이냐, 아니면 독립적인 군사력을 가진 중립국이 될 것이냐 하는 두 입장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 이날 인터뷰에는 칼럼니스트 홍기빈 씨(왼쪽)가 함께했다. ⓒ임재성

군대폐지 운동은 현재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스위스에서 병역거부 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스위스는 1996년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 전까지는 병역거부자들을 6개월에서 1년 반 동안 감옥에 보냈었다.

대체복무제 역시 89년 국민투표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91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 했고, 개헌의 절차로 인해 96년에야 비로소 '시민봉사법'(Civil service law)에 의해 대체복무제가 시행되었다.

시민봉사법에 따르면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복무제를 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 입증할 책임을 가진다. 자신의 가치관과 경험, 병역거부를 결심한 계기 등에 대해 긴 설명을 해야 한다.

보베는 그러나 그 양심을 검증하는 과정이 매우 인위적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개인의 양심을 검증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그 과정이 지식인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시험에 통과를 하면 병역기간의 1.5배에 해당하는 기간을 대체복무해야 하는데 대부분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을 하고, 아주 적은 숫자만 NGO나 평화 관련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대체복무를 선택한 이들을 보는 사회적 시선이 궁금했다. 감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복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차별이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된 초창기에는 병역거부자들에게 '겁쟁이'라는 사회적 비난이 컸다. 그런 이유로 소방업무에서 복무했던 병역거부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위험한 화재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적지 않은 순직자를 내기도 했다.

스위스에서는 50년대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계속 있어왔다고 한다. 91년에 헌법개정과 함께 병역거부 문제가 나왔을 때 국민들 92%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의 기회를 주는 것에 찬성했는데, 이는 법개정 전에 이미 병역거부자에 대한 편견이 극복되었음을 의미한다.

대체복무제 시행 이전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직장에 취직하는 과정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보베는 한 병역거부자가 산악 가이드에 취직하고자 했는데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고 취직을 할 수 없다고 하자, 소송을 해 승소한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그 소송을 계기로 지금은 병역거부자들을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작년 12월 스위스 정부는 병역거부와 관련된 아주 새로운 제안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시험을 통해 병역거부자를 가렸는데 시험 시행 비용이 너무 컸고, 효과적인 검증 역시 불가능했다. 또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결국 과거처럼 감옥에 가야 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자신의 신념을 이유로 군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선언만 한다면 모두 대체복무제를 택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스위스 정부는 대체복무 자체도 1만 가지 정도의 업무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폭을 넓히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병역거부 시점 역시 현재 군복무를 하기 이전에만 가능한 것을 군복무 중이나 군복무가 끝난 이후라도 가능케 하도록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제안이 나온 이유를 보베는 실제 대체복무가 현역복무기간보다 1.5배에 달하기에 병역거부 신청자가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대체복무가 사회적으로 큰 이익이 됨을 정부가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작년 9월 한국의 국방부에서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를 통해 감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기상조라는 논리로 꾸준히 반대해 온 이명박 정권의 출범으로 2009년 3월 병역법을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겠다는 당시의 계획이 불투명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위스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로서 다가왔다. 얼마나 더 감옥에 가야 시기상조가 아닐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조금 더 논쟁적인 질문을 해봤다. 근대 국가는 일정한 지역에서 폭력을 독점하는 체제로서 여타의 다른 조직체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근대 국가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러한 독점권을 행사했는데 이는 교전권, 경찰권, 처벌권으로 구성된다. 일본의 헌법 9조는 교전권을 포기했다. 군대폐기 운동 역시 교전권 행사의 도구인 군대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또 다른 폭력인 경찰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군대 폐지 이후에는 경찰력 역시 없어져야 하는가?

보베는 이전까지의 단호한 모습과는 다르게 쉽게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그는 먼저 자신은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즉, 경찰이 즉각 없어져야 한다거나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극단 사이에서 현실적인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경찰이 두 개의 분명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봤다. 하나는 사회를 안정화하는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를 억압하는 기능이다. 그는 이 두 가지가 역할이 동전의 양면처럼 물려있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토피아적 가치로만 이야기한다면 어느 날엔가 경찰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만약 사회적인 억압이나 위계가 없어지고 연대가 강화된다면 어떨까? 그는 만약 여성들이 사회에서 보다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보다 적은 경찰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학교에서 비폭력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하는 것 역시 경찰의 필요성을 줄일 것이다.

그는 경찰들에게도 무제한의 폭력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스위스의 경우에는 경찰에게 비폭력 관찰자로 행동하라는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으며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영국의 '무기 없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그는 경찰을 인정한다고 해서 경찰이 꼭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 역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편견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번 대회에서 한국의 병역거부에 대한 발표를 하면서 부모님의 반대가 병역거부자들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일본인이 어떻게 부모가 자식에게 군대에 가서 총을 들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 공감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필자 역시 자신의 경험과 시각에서 스위스의 운동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 따라서 뭔가 대단한 논리나 전략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베의 대답은 간결했다. 군대가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라. 그러나 그 논리에 공감하기 위해선 그들의 역사와 경험, 갈등과 미래를 충분히 알고 느껴야 할 것이다. 일본의 평화헌법에 공감하기 위해, 한국의 병역거부에 공감하기 위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간명한 논리나 사례에 대한 정리가 아닌 서로의 삶과 기억에 대한 연대와 공감, 이 느린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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