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행사장 근처에 다다르면서 마치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줄이 향하는 곳이 우리가 가는 그곳임을 확인했다.
행사조직위에 문의한 결과, 이날 헌법9조 세계대회 참가자는 1만 2000명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행사장 안에 들어온 사람들만 그렇고, 행사장 밖에서 돌아간 이들의 숫자는 3000명 정도로 집계하고 있었다. 순서가 끝난 연사들 중에 몇 명이 입장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외부 무대에서 같은 발언을 반복하기도 했다.
행사장 안은 그야말로 숨이 막혔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마쿠하리(幕張) 이벤트 홀은 모든 통로 바닥에 사람들이 앉아서 무대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다. 바닥에 털썩 앉은 머리 하얀 노인들부터 상당수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모를 하고 있는 모습까지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곳에 모이게 했고, 이렇게 진지한지에 대해 궁금증이 밀려왔다. 이 행사의 참가비는 1500엔, 우리 돈으로 1만5000원에 달했다. 행사 시작 전 편의점을 통해서 팔린 티켓이 5000장 이상이라고 했다.
스스로가 지켰던 헌법 9조를 계속 지키기 위해서
1960년 미일안보조약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본 내의 투쟁은 흔히 '역(逆)코스'라 불리는 전후 일본의 재무장을 둘러싼 것이었다. 재무장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던 일본 보수파와 동아시아에서 확실한 반공라인 구축을 위해 일본이 필요했던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던 것이 미일안보조약이었다.
그러나 전후 패전의 기억이 압도적이었던 당시 수십만의 일본 시민들은 국회 의사당을 몇 겹으로 둘러싸는 시위를 벌였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진주만에 폭격을 가했던 일본 보수파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렸던 미국이 서로의 이해를 위해 손을 잡고 다시 무기와 군대를 만드는 것을 일본 시민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평화헌법에 대한 많은 도전에 맞서 싸우면서 일본 평화운동은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광범위한 저항의 경험과 성취를 만들었다. 1980년 광주항쟁과 87년 6월항쟁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후 일본 내의 진보진영은 급격히 하강세를 그렸고 지금은 상당히 위축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헌법 9조는 당시 평화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상징이고 자신이 지켜낸 결과물이며 결코 내놓을 수 없는 마지노선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여전히도 절반이 훨씬 넘는 이들이 개헌을 반대하는 이유이며 이곳에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그곳에 모인 이유였다.
축하가 넘치면 어색한 법
오후 1시 반 경에 시작된 행사는 저명한 인사들의 연설과 문화 행사가 번갈아 가면서 진행됐다. 1910년 노벨 평화상을 탄 국제평화사무국(International Peace Bureau)의 전 대표였던 코라 위스(Cora Weiss)는 기조연설을 통해 군대가 부재한 코스타리카나 파마나의 사례를 언급하며 일본의 헌법 9조가 세계로 확산되고 있고, 자신은 모든 나라에 헌법 9조의 정신을 넣는 활동을 하겠다고 연설했다.
ⓒ임재성 |
코라 위스는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적은 지구온난화, 인권유린, 새로운 질병 등인데 군대는 이와 싸우고 있지 않고 있으며, 그 어느 나라도 교육과 복지에 국방비보다 많은 돈을 쓰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또한 평화는 DNA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며 평화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마린 루터 킹의 정신을 이어 받아 군대의 힘이 아닌, 도덕의 힘으로서 유지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화헌법을 지키는 운동이 맥락을 잃고 군대 금지 법안이라는 보물을 함께 지키자는 정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이미 일본의 반핵운동을 통해서 확인되어왔던 점이다.
반핵평화운동의 성지가 된 히로시마는 원폭 투하 당시 천황의 군대가 제2사령부를 두었던 곳이었다. 1894년 일본이 청일전쟁을 벌일 때 일본군은 히로시마에서 승선했고 메이지 천황이 사령부를 그곳으로 옮긴 후 조선과 여타의 외국을 침략한 일본 군대는 모두 히로시마에 모여 떠났다.
그러나 핵무기에 대한 반대는 핵을 절대악으로 승격시켰고, 역사적 맥락을 지운채 평화로운 주민들이 살고 있던 도시에 어느 날 내려온 악마로 여겨졌고, 그것이 만든 처참한 고통만이 반복되고 기억되었다. 물론 히로시마가 핵무기가 투하될만한 장소였다는 것도 아니고 핵무기의 사용이 정당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핵무기는 절대악이고 그래서 반대해야 한다는 논리만으로는 진정한 아픔과 고통에 연대할 수 없다.
히로시마에서 일본인들은 자신을 피해자와 동일시하며 기억을 구성하지만 홀로코스트에서 독일인들은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구성한다. 전자에서는 피해자로서의 분노가 만들어진다면 후자에서는 가해자로서의 죄책감과 성찰이 만들어진다. 그 차이가 전후 일본과 독일이 보여준 모습의 차이를 만들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평화헌법은 태평양 전쟁을 벌인 일본이 전후 다시 아시아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가해자로서의 참회와 반성 아래 교전권과 군대를 포기하는 과정이었다. 평화헌법의 지켜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맥락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맥락을 잃은 평화는 듣기 좋고 말하기 좋은 평화로 전략될 위험이 크다. 미스코리아들도 늘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쉽게도 대회 첫날의 발언에서는 평화헌법과 함께 공존하는 세계 군비 5위권이라는 일본의 현재 모습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나, 위안부를 비롯한 전쟁 시기의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집권세력의 후안무치한 언행들에 대한 비판이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물론 세계인이 한 목소리로 전쟁과 군대를 없애자는 이야기는 감동적이었지만, 진정 9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박수 받는 평화헌법을 넘어 전쟁의 피해자들 앞에 고개 숙이는 숙연함까지 필요한 것이다.
일본 쪽 연사였던 츠치아 코켄 변호사는 현재의 자위대의 모습으로 인해 일본이 평화헌법을 가졌다면 믿겠냐는 질문을 던지며 자랑보다 부끄러움으로 연단에 섰음을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성찰적 일본인들의 존재와 노력이 평화헌법을 지킨 원동력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헌법 9조를 이야기하자는 것만큼의 무게로 더욱 철저히 9조의 등장 배경이었던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고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초청 연사였던 한국의 이석태 변호사(前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독일과 프랑스와 비교하며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 사이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양국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고 이야기했다.
이 변호사는 태평양 전쟁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등장한 평화헌법은 평화의 보증증서이기에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러한 증서 아래에서만 일본이 평화적 원칙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이라크 전쟁과 일본의 관계를 논하는 토론회와 유명 가수들의 문화행사가 이어졌다. 밤이 깊어갔지만 행사장의 사람들은 모두 차분하게 자리를 지켰고, 다음날 예정된 분과별 워크숍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10시가 다 되어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코스타리카는 헌법 12조에서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는 카를로스 피자로(Carlos Vargas Pizarro) 변호사의 발언 중 한 대목이었다. 코스타리카가 현재 가진 문제점들이 생략된 채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 다는 점만이 강조된 것이 역시 불편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인 점은 확실했다.
'우리는 군대가 없습니다. 우리 육군은 개미이고, 우리 공군은 새이며, 우리의 해군은 물고기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