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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영정은 전부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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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영정은 전부 허상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6>

▲ 통영세병관, 눈보라를 뚫고 피어야 진짜 동백이다. ⓒ이상희

통영 가구 사려고 '계'까지 들었던 선비들

지난 회에서는 삼도수군통제영의 심장인 세병관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또 하나 통제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2공방이다. 통영이 예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근원에는 통제영 12공방이 있기 때문이다. 통제영은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12공방에서 비롯된 나전칠기 등 통영의 공예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2공방은 삼도수군통제영 안에서 군수품과 진상품을 조달하던 작업장이었다.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온 나전칠기나 통영소반, 통영 갓 등 통영 공예품의 역사는 12공방에서 비롯되었다. 12공방에서 시작된 통영의 공예품들은 통제영 밖에서 개인들이 운영하는 사방의 발전을 추동했고 그 때문에 통영은 전국적인 명품 공예의 산지가 됐다. 조선 시대 한양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장인이 활동하던 지방이 통영이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통영 소목장이 만든 가구를 가지려고 계 모임까지 만들 정도였고 통영 자개는 규방의 여인들이 선망하던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12공방은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통영으로 옮겨온 뒤 통제사가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 모으면서 형성됐다. 12공방이이라 해서 꼭 12개의 공방만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열두 달, 열두 시간, 십이지신처럼 12라는 숫자는 온전함, 완전함을 상징한다. 그래서 12공방이란 통제영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공방을 통칭해서 일컫는 말이다. 특히 영,정조 시대가 12공방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는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의 많은 장인도 통영에 들어와 정착했다. 통영은 일찍부터 활발한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12공방 안에는 상하 칠방(나전칠기), 소목방(가구, 문방구), 동개방(활·화살 제조), 야장방(철물주조), 화자방(신발), 안자방(말안장), 총방(망건,탕건 등), 입자방(갓), 화원방(지도·장식화), 은방(금은세공), 선자방(부채), 주석방(장석), 상자방(고리), 주피방(가죽제품) 등 많은 공방이 있었다. 이들 공방에서는 통제영에 필요한 물품만이 아니라 왕실에 올릴 진상품들도 생산해냈다. 12공방의 공예품들은 그 정교한 솜씨 때문에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은 통영문화가 번성한 이유를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아주 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대부분의 남자가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 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박경리 선생이 통영 공예품 발달의 뿌리가 12공방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선생은 그것을 더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박경리 선생이 자신의 소설들에서 통영 수공업의 번영에 대해 언급하고 있듯이 통영은 12공방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에도 양반 문화보다는 수공업을 하는 장인이나 공예품과 수산물 등을 거래하는 상인 문화가 번성했다.

다른 지역보다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져 신분 차별도 적었다. 일종의 '중인' 해방구였다. 항구가 번성하고 상업이 활발하니 주민의 기질도 개방적이었다. 통영에는 하동이나 사천에 땅을 가진 전통 지주층도 있었지만, 그들보다는 어장을 해서 큰돈을 벌어들인 어장아비(선주)들이 상업 활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일찍부터 자체적으로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타지의 몰락한 양반들이 통영에 올 때면 통영 입구 죽림 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 걸어 놓고 들어왔다고 한다. 통영에서는 양반 행세해봤자 별 이득이 없기에 그랬던 것이다.

1914년에 극장이 생긴 통영

통영은 서양의 문화를 가장 일찍 받아들인 고장 중 하나다. 개항장이었던 마산과 함께 경남 도내에서 가장 먼저 극장이 생긴 곳이 통영이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이름의 극장이 생겼다. 1930년대에는 통영에 영화사까지 있었다. 통영삼광영화사(대표:염홍근)에서는 1930년 카프 진영의 김유영 감독 작품 '화륜'을 제작했고,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으니 당시 통영 문화의 수준이 경성에 못지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공방 장인들로부터 이어져 온 예술적 전통과 통영의 개방적인 풍토가 근대에 와서도 통영문화 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그것이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 박경리, 전혁림,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를 길러 낸 배경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90년을 이어온 봉래(봉래좌)극장은 2005년 9월, 철거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극장이긴 했지만, 한 세기 가까이 통영 시민과 함께 해온 극장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봉래극장 건물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된 경위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국의 수많은 영화인과 영화팬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철거해버리고 주차장을 만든 것이 결코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 통영 한산도 세병관에 모셔진 이순신 장군 영정. ⓒ이상희

"이순신 장군 영정은 허상일 뿐"

세병관 앞 향토역사관 임진왜란 전시실에는 수많은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전시되어 있다. 청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정형모 등 유명 화가들이 그린 것부터 무명의 만화가들이 그린 것까지 초상화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장군의 얼굴 생김이 그림마다 다르다. 국가에서는 표준 영정을 제작해 제시했지만 어째서 화가마다 그리는 모습이 다른 것일까. 통영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인 김일룡 선생이 통영 향토역사관 관장으로 계실 때 인터뷰를 했었다. 그때 김일룡 선생이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저 많은 영정 중 어느 것이 진짜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진짜는 없어요. 닮은 것도 없지요. 왜냐면 전부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표준 영정을 엉터리로 만들었는데 그냥 도깨비 그림일 뿐이에요."

실상 이순신 장군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전래 사당에서는 영정이 없이 위패만 모셔져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군의 초상은 후대인들이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혈족인 덕수 이씨 문중 후손들의 얼굴을 기본으로 한 초상화도 있지만 그 또한 얼마나 실체와 가까운지는 알 도리가 없다. 사실이 그러한데 표준 영정 운운하며 나라에서 엉터리 초상화를 제작해 유포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화가마다 장군의 얼굴을 다르게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거도 없는 표준영정 자체가 난센스다.

▲ 통영향토역사관에 전시된 통영 옛 지도. ⓒ이상희

세병관 앞에 교회가 들어서는 것을 막아낸 통영 사람들

통영 향토역사관은 단순한 향토 유물 전시관이 아니다. 향토역사관은 통영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증거물이다. 본래 건물은 교회가 들어설 계획으로 지어졌었다. 하지만 통영 사람들은 통영 역사의 성지인 삼도수군 통제영 터 바로 앞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됐으니 통영 사람들의 성전을 가로막고 다른 종교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민의 민원이 잇따르자 통영시는 결국 건물을 매입하여 리모델링한 뒤 향토역사관으로 개장했다.

아무리 좋은 건물이 있다 해도 그 자체로 역사관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유물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개관 당시 그 유물은 오롯이 김일룡 선생 혼자서 채운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수십 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인 유물의 수집도 수집이지만 그것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지 않은 것이야말로 더욱 놀라운 일이다. 물론 향토역사관이 생긴 이후에 새로 수집된 유물도 있다. 하지만 향토역사관의 시작은 오롯이 김일룡 선생 개인의 수집품에서 비롯됐다.

향토역사관 전시실에는 역사관 소장 유물 3000여 점 중 1000여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전시실이 협소해서 전시하지 못하는 유물과 자료들이 더 많다. 전시실에서는 총통, 조총, 창, 거북선도 등의 임진왜란 때 유물부터 통제영 12공방에서 생산했던 부채와 갓, 목가구, 장석, 말안장 등은 물론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통영의 다양한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 통영 강구안 바다에 전시 중인 거북선. ⓒ강제윤

곧 문을 닫게 될 향토역사관

김일룡 선생은 유물과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고초가 많았다 한다. 20대 초 잠깐의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3년 남짓 골동품 가게를 했다. 폐품수집상이 가져온 물건 중 통영 관련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사들였다. 그 후에는 화랑을 경영하며 고서화 등을 수집했다. 무엇보다 통영이 워낙 좁은 고장이라 처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가져가라고 주는 것들도 비용을 지불하고 가져왔다.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유물들을 가져간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토바이를 타고 통영 시내 고물상을 돌았다. 그렇게 사 모은 고문서, 고서화가 부지기수다. 김 선생은 어느 한 분야나 한 시기만이 아니라 통영의 역사유물이면 모든 것을 다 수집했다. 그래서 선사시대 유물부터 현대의 유물들, 심지어 연극 포스터까지도 수집했다. 애초부터 작은 박물관 건립을 목적으로 역사, 민속 유물들을 모았던 것이다. 30대 초반부터 수집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35년 동안 수집을 계속하고 있다. 향토역사관이 생기기 전에도 개인적으로 15차례나 통영 향토사료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김 선생의 집은 통영 시가지에 있었다. 왼편은 시외버스터미널이고 오른편에는 여객터미널이 있으니 교통의 요지였고 중심가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다. 그러면서 통영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됐고 그것이 유물과 자료를 모으는 길로 그를 이끌었다. 김 선생은 실상 유물보다는 문헌자료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학문적 욕구가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향토사 관련 논문도 20여 편이나 썼다. 김 선생은 과거 통영에는 유림이 없었다고 본다. 통영은 군사도시였고 고관들은 중앙에서 파견됐다. 통영에 상주하며 사는 사람들은 통제영 관아의 아전이나 장인들, 중인들이었다. 그러니 유림이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조선 시대 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통영에 생긴 것이 조선이 망해가던 1904년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유림이 없으니 당연히 전해오는 문헌 자료들도 대부분 통제영과 관련된 군사문서들이다. 군사문서는 보안이 생명인 까닭에 필사본으로 단 1점밖에 전하지 않는 희귀문헌들도 많다. 선생은 이제 남은 생은 문헌들을 연구하는 데 쓰고 싶다. 안타깝게도 통영 향토역사관은 조만간 문을 닫을 예정이다. 1997년부터 14년을 관장으로 재직하던 김일룡 선생도 근자에 그만뒀다. 리모델링 공사 중인 옛 통영군청 건물이 통영시립박물관으로 개장하면 향토역사관은 시립박물관으로 통합될 계획이라 한다. 통영에 와서 세병관과 향토역사관의 유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통영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없다. 세병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나 세병관에 가기 전에 반드시 향토역사관을 찾아가 보시라. 통영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강제윤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섬학교>와 <통영학교> 교장. 도서출판 호미 기획위원.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 등단. 문화일보 선정 평화인물 100인.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250여개의 섬을 걸었다. 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2011년 3월부터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 거주하며 통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일도 병행해 왔다. <통영학교>는 2012년 12월 22일 개교 예정이다.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섬을 걷다><그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자발적 가난의 행복 (문광부우수문학도서)><보길도에서 온 편지><올레 사랑을 만나다>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이상희

사진가. 향토 음식 연구가. 통영에 살면서 20여 년간 통영과 통영의 섬들을 사진으로 기록해 오고 있다. 지난 5월 통영 거북선호텔 아트홀 개관 초대전 '별 하나 떨어져 섬이 되다'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오랫동안 통영의 섬들을 카메라에 담아온 온 이상희의 아름다운 사진들은 개발의 바람으로 원형이 사라져 가는 섬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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