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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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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꽃잎

[도종환이 보내는 '시인의 엽서'] <12>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대신 비가 밤새 왔다
이 산 속에서 자랑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산벚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운 연분홍 꽃그늘과
꽃 사이 사이를 빈틈 하나 없이 파랗게 채운
한낮의 하늘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젖은 꽃들은 진종일 소리 없이 지고
나무는 천천히 평범한 초록 속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오후 내내 도라지 밭을 매었다
밭을 점점이 덮은 꽃잎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함께 묻혔다
그댄 지금 어느 산을 넘는지 물어볼 수도 없어
세상은 흐리고 다시 적막하였다

-「젖은 꽃잎」


제 시 「젖은 꽃잎」입니다. 봄에 피었던 꽃들이 지고 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렸던 꽃들은 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꽃잎도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거기 함께 묻히는 걸 바라봅니다. 꽃이 필 때도 가슴 설레지만 꽃이 질 때는 더 가슴 떨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붙잡을 수도 있지만 지는 꽃은 잡을 수도 없습니다.

며칠만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은데 그 며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꼭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꽃이 피어 있는 동안 더 가까이 가 바라보고 사랑해 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그대와 함께 이 꽃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대에게 연분홍 꽃과 꽃 사이를 가득 채운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대와의 인연은 멀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꽃잎이 먼저 스스로를 버리는 날 비가 내렸고 세상은 온종일 흐리고 적막하였습니다. 어디에 계시는지요, 젖은 꽃잎 같은 그대는.

(매주 화,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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