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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여행 되기를!

[오수연의 팔레스타인 명장면] <5>

예루살렘에 다녀온 날, 우리는 사진 전시회 개막식 초대를 받아 다음날 또 예루살렘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정을 기억했으면 그날 예루살렘에 갔다 올 필요 없이, 일을 몰아 다음날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태와 내가 서로 탓하고 있을 때 그날 저녁 우드* 연주회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잠시 뒤에 만날 약속을 정해놓고, 나는 그날 우리가 멍청한 짓을 했다고 넋두리를 했다. 전화 상대방은 웃었다.

연주회에 가기 전에 소파와 의자에 너부러져 있는데 다른 친구가 들렀다. 복태와 나는 그 앞에서도 같은 넋두리를 해가며 서로 쿠션을 던졌다. 그도 웃었다. 다음날 전시회를 여는 사진작가를 우리에게 소개시켜 준 이가 그였다. 그는 그 사진작가와 절친하여 팸플릿에 평을 썼다고 했으며, 우리에게 개막식 초대장을 갖다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전시회에 같이 갈 줄 알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안 간다고 했다. 뭐? 왜? 복태와 나는 동시에 물었다. 흥, 하고 그가 가벼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나는 예루살렘에 못 가니까."

복태가 귀신이라도 본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에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발행한 신분증을 가진 사람은 예루살렘에 갈 수 없다는 말은 들었으나, 실감하지는 못했다. 정말로, 검문소를 요리조리 피하고 장벽을 이리저리 돌아 몰래 숨어들어가지 않는 한, 어쩌면 일평생 동안, 거기 갈 수 없다는 걸. 팔레스타인 사람은 예루살렘에 갈 수 없다는, 근거도 설명도 없으므로 말이 안 되는 말이 쇠창살과 콘크리트 벽 같은 가장 무겁고 단단한 물질로 전화되고야 말았다는 걸. 그래서 개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그들의 일상과 운명을 결정한다는 걸.
▲ 동예루살렘 뒷골목. 벽에는 팔레스타인을 상징하는 알 악사 모스크 그림이 그려져 있고, 하늘에는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팔 분쟁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일 뿐이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쪽 서예루살렘을 요구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은 온전히 자기들의 성지요 심장이라는 이유로, 1967년 전쟁 이후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쪽 동예루살렘을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다. 설사 분쟁이라 한들 진행 중이지, 끝난 게 아니다.

팔레스타인으로서도 예루살렘이 자기들의 성지요 심장이기 때문에, 그 절반인 동예루살렘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팔 평화 협상의 첫 번째나 두 번째 안건은 항상 동예루살렘 문제이다. 그러나 이미, 어쨌든, 실제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갈 수가 없다. 우리가 3개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수십 또는 수백 명 중에 예루살렘에 갈 수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 거주권을 가진 3명뿐이고, 그 중 2명은 예루살렘에서 전시회를 연 사진작가와 그 어머니였다.

그날 저녁 우드 연주회에서 복태는 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연주에 심취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우리와 함께 와서 옆에 앉아 연주를 듣고 있는 팔레스타인 친구 또한 예루살렘에 갈 수 없을 터였다. 객석에 불이 들어왔을 때 복태의 눈이 벌갰다. 음악에 감동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연주회장을 나와 작별 인사를 할 국면에서, 복태가 친구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놓고 울먹울먹, 웅얼웅얼했다. 뭐야? 연주가 나빴다는 거야? 놀라서 내게 눈짓하는 친구에게 내가 대신 설명해주기로 했다. 지금 복태는 너에게 우리의 무신경함에 대해 사과하려는 것이다, 아까 너랑 전화할 때........

"사과하려는 게 아냐! 내 말은 이건 너무........ 괴상하다는 거야."

복태가 내게는 일갈하고 친구에게는 웅얼거렸다. 뭐가? 얘가 왜 이래? 더 놀란 친구가 내게 더욱 다급한 눈짓을 보냈으므로 나는 할 수 없이 또 끼어들었다. 지금 복태는 슬픈 거다........

"슬픈 게 아냐! 이 상황이 너무......얼토당토않은, 아니 망측한, 아니 부조리한, 아니......"

꼭 할 말이 있다면서 복태는 그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팔레스타인 학생 2명과 인솔 교사 1명이 외국 청소년 음악 축제에 참가하러 라말라와 예루살렘 사이 칼란디아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모든 증빙서류를 준비했는데도 검문소의 이스라엘 병사는 이들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외국 가는 비행기표까지 끊어놓았으므로 인솔 교사는 설득하고, 애원하고, 항의했다. 한 시간도 넘게 실랑이하다가 이스라엘 병사는 이런 트집마저 잡았다.

"그래, 당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 왜 서안 지구에 사는 거요?"

왜? 왜, 서안 지구에 사느냐구? 교사는 답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안은 60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살아왔던 예루살렘 토박이지만,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그날 가족이 아버지 직장을 따라 쿠웨이트에 있었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쫓겨났기 때문이요. 나는 예루살렘에도, 이스라엘에도, 팔레스타인에도 돌아올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레바논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발행한 신분증을 가진 덕분에 서안 지구로 올 수가 있었소.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아왔던 동예루살렘 집에 지금 이스라엘인이 살고 있소. 우리가 그에게 집을 판 적도, 그가 우리에게 집을 산 적도 없소. 우리 이모는 지금도 예루살렘에 사시는데 노환으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나는 예루살렘에 갈 수가 없어 병문안도 못 갔소."
▲ 하이파와 만을 건너 마주보는 유서 깊은 도시 아카에서 바라본 지중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지중해에 우리는 외국인이라서 갔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수천 년 전에 떠났던 유대인들은 돌아올 권리가 있다. 조상이 유대인이라는 일말의 흔적만 있으면, 동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세계 모든 곳에서 돌아올 권리가 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강제로 쫓겨났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집문서, 토지문서 등등 그 어떤 확실한 증거를 대봤자 돌아올 권리가 없다. 바로 옆 아랍국가에서 국경의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일가친척과 상봉하다가, 그 철조망을 넘지 못하고 늙어 죽는다.

"하이파에 다녀올 게."
"오, 하이파! 너희들이 분명히 좋아할 거야."
"글쎄."
"분명히 그럴 거라니까. 잘 다녀와!"

우리에게 잘 다녀오라고 말한 친구들 중에 집안이 하이파 출신이지만 쫓겨나서 본인은 난민촌에서 자란 이들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대개들 하이파에는 한 번도 못 가봤을 터였다.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하이파에, 우리는 외국인이라서 갔다.

"사해 가는 길이야."
"좋은 여행 되기를!"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 안에 있는 사해 역시 얼마 전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접근 금지였고, 요즘에는 주중에 갈 수 있다지만 주말에는 이스라엘 관광객 보호를 위한 임시 검문소에 걸려 되돌아와야 한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서도 풍광 좋은 곳은 반드시 이스라엘인들 차지다. 팔레스타인 친구들이 자기들은 못 가니 우리라도 갔다 와야 한다고 아무리 주장할지언정, 돌아서서 여행 떠나는 나는 걸음이 무거웠다. 지상의 어느 여행지가 아니라 바닥 없는 나락으로 한 걸음씩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느낌을 표현할 말이 도무지 없었다. 그런 말은 세상에 없는지도 모른다.

*우드: 아랍 전통 현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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