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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길동이의 웃음을 빼앗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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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길동이의 웃음을 빼앗았을까

[TV와 수다] 종영 앞둔 <쾌도 홍길동>의 한계, 혹은 운명?

노란 색안경 아래 홍길동에게는 두 가지 눈빛이 있다. "전부 귀찮아!"라는 흐리멍덩한 양아치의 눈빛이 있는 반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번뜩이는 영웅의 눈빛이 있다. 마지막 한 회를 남겨두고 있는 KBS2TV <쾌도 홍길동>은 스물 세 번의 방영동안 길동의 두 가지 눈빛을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하지만 드라마는 어느 순간 흐리멍덩한 눈빛의 양아치 길동을 놓아 버린다. <쾌도 홍길동>은 유쾌한 춤판에서 "백성이 원하는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심각한 '민중 영웅담'으로 변해버렸다.

이상한 드라마 <쾌도 홍길동>

<쾌도 홍길동>은 이상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한없이 가벼운 겉포장 속에 <이산>이나 <대왕 세종>은 관심조차 없는 무거운 이야기를 안고 있다. 길동은 혼자 힘으로 1인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백성이 스스로를 돕고 스스로를 구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알려주며 어떻게든 그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화끈하게 악덕 사채업자를 두드려 패 벌주기보다는 피해자들이 힘을 합쳐 스스로 사채업자를 벌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뿐이다. 대신 빚 갚아준 영감이 길동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감자 나눠준 할머니가 호미로 길동의 머리를 내리찍어도, 힘이 없어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으며 다시 한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훌륭한 왕이 세상을 구한다'는 명제를 보여주기 급급한 대부분의 사극과 <쾌도 홍길동>은 미친 왕과 길동이 만큼 큰 차이가 있다.
▲ KBS2TV <쾌도 홍길동>의 한 장면. ⓒKBS

백성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와중에 노란색 색안경을 쓰고 저자 거리를 천방지축 휩쓸며 '개와 홍길동은 출입금지'를 일상으로 만들었던 양아치 길동이는, 백성이 선택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현실과 맞서는 영웅 홍길동으로 변한다. 이런 영웅의 성장담은 필연적으로 극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며 이 드라마를 코미디에서 정극으로 혹은 비극으로 변형시켰다. 발랄하던 드라마는 후반으로 갈수록 부담스러운 대사와 과한 눈빛이 오고 가는 참을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린다. 하늘을 날고 바람을 일으키던 길동이는 어느 순간, 칼을 들고 왕과 맞서는 홍길동이 되며 웃음을 잃어버린다.

웃음을 잃은 길동이

생각해 보면 홍정은, 홍미란 작가(홍자매)의 드라마는 언제나 비극을 안고 있었다. <쾌걸 춘향>, <마이 걸>, <환상의 커플>로 이어진 홍자매의 드라마는 가벼운 코미디 속에서도 정극과 비극을 근사하게 보여주었다. 남편인 빌리에게 버림받은 나상실의 이야기가 밝혀질수록 마냥 웃을 수 없었던 <환상의 커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홍자매의 드라마는 항상 웃음과 비극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웃음이 주 요리고 비극은 양념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은 점점 그 기본 관계가 역전되며 웃음이 주변으로 밀려난다.

<쾌도 홍길동>은 홍자매의 최고 걸작 <환상의 커플>의 성과를 잇지 못하고 있다. 코미디와 극이 분리되었던 홍자매의 전작에 비해 <환상의 커플>은 멜로와 코미디의 절묘한 배합 속에 유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예를 들어, "지나간 자장면은 돌아오지 않아" 같은 대사는 단순히 웃긴 대사로 쓰이는 게 아닌 빌리와 나상실의 관계를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복선으로 사용되었다. <환상의 커플>은 단순한 패러디 혹은 웃긴 상황의 묘사 정도로 쓰이던 <쾌걸 춘향>, <마이 걸>의 개그 장치를 발전시켜 극의 흐름에 자연스레 녹여내는 성과를 이루어내며 '멜로'와 '코미디' 양쪽 모두의 걸작이 되었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은 다시 <환상의 커플> 이전으로 돌아간다. 이 드라마는 종종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코미디와 극을 분리한다. "약을 지을 때는 (허)준, 장사를 할 때는 생, 이야기를 지을 때는 균, 그리고 운동을 할 때는 허잽니다. 허, 참!" 같은 재치 있는 대사와 세상이 바뀌는 이야기는 극중에서 전혀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청나라 명품'과 '외제 말'은 양반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웃음의 장치로 사용되지만 그 이상 이야기에 들어오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런 부조화는 드라마가 이야기를 강조하며 결론을 향해 갈수록 웃음이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마음껏 웃을 수 없는 현실의 무게
▲ KBS2TV <쾌도 홍길동>의 한 장면. ⓒKBS

이런 부조화는 필연적인 것일지 모른다. '어쩌다' 혁명을 시작한 길동이는 세상을 자세히 알아갈 수록 웃을 수 없다. 신분차별, 초고리의 사채업자, 일방적인 청나라와의 무역협상, 병역비리와 비밀 장부 등 길동이 마주하는 세상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비극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난장을 벌이는 것이 아닌, 힘을 키우고 세를 확장해 직접 칼끝을 겨누는 치열한 싸움뿐이다. 그래서 홍자매의 이 유쾌 발랄하던 설화는 세상을 바꾸면 바꿀수록 무거운 민중 영웅담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결국, 이런 현실의 무게는 보는 사람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소국이 잘 살기 위해서는 대국을 믿고 따르라"며 무역협상을 강요하는 청나라 사신의 얼굴을 발로 차버리는 길동을 보며 통쾌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통쾌함은 현실의 '무역협상'을 환기시키며 마냥 웃을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떠올리게 한다. 이건 삼부자 상회의 비리장부를 '철저하게' 수사하고 양반의 병역비리를 '집요하게' 척결하는 길동의 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양아치 길동마저 웃음을 잃게 하는 세상이, 하라는 대로 잘 따르는 모범생인 우리에게 어떤 웃음을 줄 수 있을까.

<쾌도 홍길동>의 마지막 회는 길동과 길동이 왕으로 만들어준 창휘의 대결이다. 끝까지 백성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한 창휘가 길동과 백성에게 칼을 돌리고, 그를 믿었던 길동과 백성이 그 칼을 받아 싸워야 하는 이 상황은 안타깝지만 예상했던 것이다. 그 결말이 어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결국, 길동이는 답답한 조선 땅을 떠나 어딘가에 율도국이라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그리고 백성과 함께 만들어가는 새 세상을 열 것이다.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길동이는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가 길동이의 웃음을 빼앗고 이 땅을 떠나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400년 후에도 여전히 다시 이야기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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