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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땅, 배드랜즈 국립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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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땅, 배드랜즈 국립공원에서

[최창남의 '흐르는 강물처럼'] <2> 희망의 땅

배드랜즈(Badlands)의 밤은 깊고도 무더웠다. 그러나 밤하늘을 지나는 별들은 아름다웠다. 어렵게 찾아 든 배드랜즈 인(Badlands Inn) 너머로 별빛이 이 땅을 비추고 있었다. 버려진 땅 위로 별이 빛난다. 몇 백 만 년 동안 쌓이고 깎이며 형성된 회색의 침적물로 이루어진 땅이다. 달빛에 스며든 별빛을 통해 바라보는 배드랜즈(Badlands)의 깊은 밤은 아름답다. 하늘은 깊고 별은 빛나고 있었다. 온갖 모양의 회색의 침적물들도 별빛을 받아 저마다 빛나고 있었다.

별이 땅에 내려와 앉은 듯하였다.
이 땅이 정말 버려진 땅 절망의 땅인가.

밤의 옷을 입어서일까.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땅, 버려진 땅, 절망의 땅'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슬픔이 일었다. 메마른 땅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난 울림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때론 공허하고 때론 낮은 바람처럼 고요한 울림이었다. 그 울림이 내게 슬픔을 주었다. 그 슬픔은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이들의 슬픔이었다. 이 땅이 슬픈 것은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죽은 땅이어서가 아니라 수 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아오다 내쫓긴 인디언들의 슬픈 삶 때문이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이 땅을 바라보며 더욱 슬픔을 느끼는 것은 흙 한 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스치는 바람에서 흐르는 냇물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모두를 사랑했던 그들의 사랑을 이제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 땅과 제 삶과 제 가족과 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수(Sioux)족이 흘린 깊고 깊은 피눈물 때문이었다. 그들의 한 서린 죽음 때문이었다. '네가 살 땅이 어디에 있느냐'는 백인들의 조롱에 '나의 땅은 내가 죽어 묻힌 곳이다(My lands are where my dead lie buried.)'라고 말하던 수(Sioux)족의 위대한 추장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의 죽음이 묻힌 땅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혼이 머물러 있는 땅이다.

그래서 이 땅은 슬프다.
그래서 이 땅은 아름답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그들의 사랑과 삶과 죽음으로 인해 이 땅은 슬픔을 품은 채 아름다운 땅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어쩌면 그들의 삶과 죽음을 그리워해서 밤은 어젯밤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품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아침 햇살이 안개처럼 메마른 땅을 덮기 시작했을 때 어둠은 안개와도 같은 아침 햇살 속으로 물러났다. 아침이 왔다. 배드랜즈(Badlands)의 아침은 뜨거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열은 살 속으로 젖어들었다.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 South Dakota 평원의 오후ⓒ최창남

방문자센터(Ben Reifel Visitor Center)를 찾았다. 트레일(Trail)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를 받아 들었다. Window Trail, Tree Trail, Cliff Shelf Nature Trail, Fossil Exhibit Nature Trail을 걸었다. 약 6,500만 년 전 로키산맥이 융기하면서 형성된 땅, 몇 백 만 년의 세월이 흐르며 흙과 모래가 쌓여 만들어 놓은 회색의 땅, 바람이 지나고 물이 흐르며 만들어 놓은 결과 결을 따라 갖은 문양과 무늬를 만들고 있는 회색의 침적물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 땅, 지금도 흐르는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가고 있는 땅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을 흐르며 침식하고 있는 화이트 리버(White River)는 회색으로 물들어 흐르고 있다.

새 날 아침 밝은 햇살 아래서 바라본 땅은 아름다웠다.
누가 이 땅을 버려진 땅이라고 했던가. 누가 이 땅을 절망의 땅이라고 했던가.
누가 이 땅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라고 했던가.
누가 이 땅을 황량하기 그지없는 절망의 땅이라고 했던가.

잿빛에 가까운 회색빛이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손을 뻗는다. 회색의 흙벽에 손을 댄다. 물기 하나 없는 메마른 흙들이 바스러져 내린다. 바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간다. 그 모습도 아름답다. 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한 소녀가 울며 서있다. 소녀의 엄마가 소녀를 달래고 있다. 이른 아침이지만 벌써 더위에 지치고 짜증도 나겠지.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메마른 땅을 밟는 것이 재미도 없겠지. 햄버거 가게 하나 없는 이 땅이 소녀에게는 정말 절망적일 수도 있으리라.

트레일(Trail)을 따라 걷는다. 듣던 것과는 달리 생명이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난 밤 의 첫 인상과는 달리 생명 가득하다. 소나무와 소나무 과의 침엽수들이 기슭마다 얕은 골마다 자라고 있다. 소나무는 햇살이 강해도 물이 많지 않아도 뿌리를 내리고 잘 자란다.
▲ Badlands의 국립공원에 들어서며ⓒ최창남

바위 틈에서도 당당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나무이다. 소나무들만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연한 풀들도 골골 처처마다 움터 자라고 있다. 제법 수풀이 우거진 작은 숲도 이 보인다. 숲으로 들어간다.

수많은 생명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나뭇가지들 아래로 연두색의 작은 열매들이 줄지어 달려 있다. 저것은 무슨 열매일까. 연이어 뻗어있는 가는 가지들에 산 앵두 열매 같기도 하고 붉은 머루 같기도 한 열매들이 촘촘히 달려 있다. 저것은 또 무슨 열매일까. 숲 길 곁으로 나무 한 그루 비틀리고 비틀려 쓰러져 있다. 뜨거운 햇볕에 살이 뒤틀리고 뒤틀려 껍질이 실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뿐인가. 등 딱딱한 갑각류의 무리도 보이고 작은 벌레들도 보인다. 내가 분명하게 이름을 알 수 있는 개미들도 보인다. 뱀을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뱀도 제법 사는 모양이다.

이처럼 가혹한 환경의 땅에서도 살아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느라 아름다운 모양을 지니고 있지 못하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아름답다. 살아 있음은 곧 희망이다. 삶은 희망이다. 나는 이름 모를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본다. 희망을 만난다.

삶도 이런 것이 아닐까. 삶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삶이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고만 있다면 어긋난 인생길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희망이 삶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 척박한 땅에서도 풀과 나무가 자라듯이 말이다.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히듯이 말이다.

배드랜즈국립공원(Badlands National Park)은 내게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희망의 땅이었다.
그 희망을 안고 US-44번 일주도로를 따라 자동차를 몰았다.
길을 따라 길을 떠났다.

* 배드랜즈 국립공원에 대하여
미 대륙의 중북부 사우스 다코다(South Dakota)주의 남쪽, Interstate 90번 도로 Exit 131로 나가면 자연의 숨결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는 배드랜즈(Badlands) 국립공원을 만날 수 있다. 약 7,500만 년 전 이곳의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로부터 1,000만 년이 흐른 6,500만 년 전 바다 아래에 있던 땅이 융기하면서 로키 산맥과 블랙힐스(Black hills)를 만들었다.

그 후 블랙힐스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에 실려 온 모래와 흙들이 수 백 만 년 동안 쌓여 1,500피트가 넘는 두께의 침적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과 바람은 그 침적물들은 지속적으로 침식시키고 쓸어내며 갖가지의 기묘한 층층의 형상들과 황량하나 아름다운 절벽들, 단순하나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협곡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 침적물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 Badlands의 국립공원ⓒ최창남

물론, 이곳에는 침적물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생명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화석이다. 이곳에서는 8천만 년 전후의 고대 해양 동물의 화석에서부터 2천만 년 전까지의 많은 고대 동물들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공원을 거닐면 지금은 멸종된 크고 작은 포유동물들의 사진들과 화석들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이 공원은 적은 강수량, 극심한 바람, 잦은 화재를 이겨낸 약 56종류의 목초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북미에서 가장 큰 혼합대목초지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이 아니라 다양한 야생 생태계를 형성한 아름다운 땅으로 들소(Bison)와 로키 야생 양(Bighorn sheep)과 검은발담비(Black-footed ferret) 등도 만날 수 있다.

또한 이곳의 Stronghold 고원은 1890년 인디언들의 마지막 '고스트 댄스'(Ghost Dance-춤을 추며 행했던 인디언들의 운동)가 열렸던 곳이다. 그 후 150일이 지난 후 인디언 보호거주 지역으로 이동 중이던 수(Sioux)족의 여인들과 아이들 160여명이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미국 정부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 당한 슬픈 땅이기도 하다.

* 자세한 정보는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미국여행가이드>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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