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멤버, 환경운동연합 창립 멤버,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공동대표, 비례대표제포럼 공동대표 등 제도개혁·환경운동·여성운동·복지 등 우리 사회 진보 운동의 주요한 이슈들에 굵직한 역할을 맡아왔던 최병모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래, 정말 속상하다. 우리 사회가 왜 이리 각박하게 되었을까.
그러한 울분이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나 물어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볼 때 상당히 우수하다고 본다. 그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열어 합하면 진짜 괜찮은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지금까지 했던 운동들은 모두 괜찮은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던 그때그때마다의 시대정신이었고 이것이 나를 이끌고 갔던 것이다. 바로 그 옆에 내가 서 있었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나"라고 답한다.
지난 2011년 1월 20일에 열린 죽산 조봉암(1899~1959)의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유족 측 변호인으로 52년 만에 정부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조봉암 선생에 대해 무죄판결을 이끌어 내었을 때 마음이 어땠는지 묻자 "제 5공화국까지 인혁당재건위사건 등 여러 조작사건이 터져서 많은 사람들이 사형집행을 당했다. 당시 사형판결에 관여했던 검사들, 판사들은 모두 거기에 영달해서 대법원 판사가 되고 검찰총장도 했다. 그 누구도 참회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 하나 없는 게 우리 사법의 참담한 현실이다. 그때 했던 판결에 관여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처벌은 몰라도 제대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와 함께 "노동자가 1500만 명이고 그 가족까지 합하면 4000만 명이 넘는데 이제까지 검찰은 계속 재벌 편에 서서 노동자 탄압만 해왔다. '지난 20여 년간 왜 검찰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나왔을까?'라고 생각해보면 여기에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찰 개혁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개혁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요즘 가장 필요한 운동이 아닐까 한다"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제도적인 측면에서 사법권 독립을 실현하고자 하더라도 다른 정치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이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수하는 한 법원의 구성은 결국 대통령과 의회를 점령한 양대 보수정당에 의해 결정될 것이고 이렇게 구성된 법원이 진보적이거나 소수자 보호를 위한 판결을 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은 비례대표 중심의 의회가 구성되어 국민의 정치적·계급적 성향이 그대로 의회에 반영되고 그런 의회에서 구성하는 법원이 좀 더 진보적이고 소수자 보호에 앞장서는 법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땅에서 솟아 나오는 사법권 독립이란 것은 없다". 검찰 개혁이 근본적으로 이뤄지려면 정치제도 개혁과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자유와 평등이라면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어떻게 충분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평등도 실현할 것인가'하는 민주국가의 근본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민주의'와 '보편복지'가 우리 사회의 가야 할 길이고 지금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도 즉시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몇 년 안에 비정규직을 줄이겠다는 쪽으로 가야 된다. 비례대표 확대 등 정치개혁을 통해 의회중심주의를 실현시키고 그리하여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고 국민으로부터 통제받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 나아가 국가의 개입에 의한 보편적 복지국가의 실현을 제시하는 후보를 선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신을 가질 때까지 이 재판을 다 해보자. 그러고도 결론이 안 나면 무죄를 선고하자.' 청주지방법원 형사단독판사 시절 왜 그렇게 직권보석을 많이 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다. "다른 시스템을 놔두고 검찰 개혁만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검찰 개혁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판사, 이런 검찰, 이런 사법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결국 시민의 힘이다.
투표가 개혁이다. 투표가 힐링이다. 투표가 아름다운 이유다!
▲ 최병모 변호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1974년 사시 16회에 합격한 후 청주, 인천 지방법원 판사 시절 '증거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는 자'에 대한 '직권보석'을 1년 동안 무려 28건이나 내려 '보석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고 들었다. 당시 전국의 판사가 내린 직권보석 결정은 단 2건이었다고 했는데, 이 때 직권보석을 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었나? 그리고 그렇게 직권보석을 타 판사들에 비해 많이 내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워낙 오래된 일이다. 인천지방법원 판사 시절 때는 민사사건만 맡았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고 청주지방법원 형사단독판사로 형사사건을 맡으면서 직권보석을 많이 해서 들은 이야기다.(웃음) 형사소송법을 보면 구속된 피고인에게 필요적 보석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으면 법원이 직권으로 보석을 허가할 수 있게 돼 있다. 형사재판에서 만약 구속된 피고인이 결백하다고 주장할 경우에는 증거조사를 해야 하는데 이 증거조사를 할 경우는 재판이 상당히 지연되기 마련이다. 검사가 이미 조사해 놓은 증거에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만 있지 유리한 증거는 없어 이것을 번복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피고인은 구속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억울한 사건에서도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구속된 상태에서는 일을 못하니 소득도 없어지고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만약 계속 결백을 주장하게 되면 증인을 부르고 서너 달은 재판을 더 받아야 한다. 반대로 처음부터 유죄를 인정하면 선고를 받은 날로부터 2,3주 정도 후에는 집행유예 판결 등을 받고 나갈 수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피고인 중에는 "저는 무고합니다. 그렇지만 재판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므로 자백하고 검사가 제출한 증거를 모두 동의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대부분의 판사들은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재판을 그대로 종결하는데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보았다. 억울하다면 조사해봐야지, 안 한 것을 했다고 자백하고 형을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직권보석을 내린 사건은 주로 변호인이 없는 사건일 때가 많았는데, 이럴 때는 피고인의 전체 진술을 충분히 들어보고 이 사람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으면 피고인의 보석신청이 없더라도 보석을 허가했다. 직권보석을 해 준 사건들 중에 많은 사건이 결국 무죄 선고가 났다. 직권보석을 해 줬을 때 피고인 측에서는 결백을 주장할 만한 증거를 찾고 증인을 데려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이 없는 사건의 경우엔 주로 변호인을 댈 형편이 되지 못한 사회적 약자 계층들이 많았겠다.
그렇다. 하지만 심지어 변호인이 있는 경우에도 변호인이 오히려 피고인에게 허위자백을 권고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그러나 형사재판은 민사재판과는 달리 직권탐지주의이기 때문에 피고인이 재판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허위자백을 한다고 판단되면 법원은 직권으로 증거조사를 해야 한다. 이로써 억울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방지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억울하면서도 구속 상태를 지속하기 힘들어 유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우리나라가 구속 중심으로 재판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사실 구속은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을 경우에만 해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판사 앞에 서는 것 자체가 피고인에게는 상당히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상의 권력관계가 피고인과 판사 사이에 형성된다. 그래서 판사라는 위치가 권위적이 되기 쉬운 자리 같은데 피고인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한 것 같다.
판사는 객관적으로 검찰과 피고인, 변호인의 주장을 듣는 제 3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판사가 권위적이면 안 된다. 형사단독판사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생각한 것은 '확신을 가질 때까지 이 재판을 다 해보자. 그러고도 결론이 안 나면 무죄를 선고하자'였다.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가를 끝까지 조사하고 그러고도 유죄라는 확신이 안 서면 무조건 무죄라는 결론을 내리자는 것인데, 사실 이것이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이다. 이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것을 지키게 되면 일이 많아지고 재판이 길어지는 것은 당연하다.(웃음) 피고인이 진술하는 것을 다 들어야 되고 증인신청을 하면 받아주고 하니까 보통 재판이 밤 9~10시까지 흔히 갔다. 그때 관여검사가 재판 좀 빨리 끝내달라고 항의하기도 하고 그랬다.(웃음)
결국 피고인을 대하는 마음의 문제, 태도의 문제인 것 같다.
그렇다.
김대중 정권 때 '옷 로비 사건'의 특검을 맡기도 했었는데, 특별 검사로 활동하며 '로비가 없었다'는 검찰 수사 결과를 뒤집고 권력층의 사건 축소 은폐 사실을 밝혀냈었다. 모든 사회의 관심이 최고로 집중되었던 사건이었고, 최고 권력층들이 층층이 연루되었던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라 부담감이 컸을 것 같은데 이때 가졌던 수사의 원칙이 있었다면?
특별검사는 검사장 역할만 하는 것이라 직접 수사를 진행하는 양인석 특별검사보와 그 수사진들에게 최대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주는 게 내 원칙이었다. 나는 청와대 등 외부로부터의 영향이나 압력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려고 했다. 수사진에게는 사건을 진짜 있는 그대로 아무런 선입견 없이 파헤쳐 보라고 했다.
진보적인 정부라 하더라도 한국의 최고 권력층과의 밀고 당기는 관계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 권력이 진보적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권력에 거스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때에도 상당한 긴장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청와대 측 전화기도 꺼놓고 일부러 안 받기도 했었다.(웃음) 그럴 수밖에 없었다.(웃음)
'옷 로비 사건' 등을 경험하며 부패로 인해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어떻게 잃게 되는지 가까이에서 느꼈을 것 같다. 권력형 비리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부패가 생긴 다음에 해결하는 것은 사후적 해결 방식이다. 그전에 부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이 제 기능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 언론이 문제다. 언론을 입법, 사법, 행정부와 함께 제 4부라고도 하지 않는가. 이러한 언론이 비리에 대해 생명을 걸고 심층 취재를 하고 보도하면서 감시 기능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주요 언론은 그렇게 하는 것 같지 않다. 정부가 발표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쓰는 것에 불과하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비리를 척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광주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5.18 시민법정'의 재판장을 맡기도 했었는데 이 때 재판장으로서의 가졌던 마음에 대해서 듣고 싶다.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그 때 민변 변호사들이 재판 준비와 변호인 역에 모두 참여했는데 모두가 정말로 진지하게 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미국을 변론하는 변호사들에게 정말 미국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에서 변론을 하라고 주문했다. 그래야 긴장감 있는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미국 측 변호인을 맡은 변호사들은 정말로 미국이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변론을 이끌어 가니 방청을 하고 있던 광주지역 원로 한 분이 "저 변호사들은 진짜로 미국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민변 변호사 중에 저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나?"하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웃음) 정말 재미있는 재판이었다.
민변 창립멤버, 환경운동연합 창립 멤버,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공동대표, 비례대표제포럼 공동대표 등 제도개혁, 환경운동, 여성운동, 복지 등 우리 사회 진보 운동의 주요한 이슈들에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맡아 왔다. 각각의 운동들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특별한 계기는 없다. 모두가 필요한 일들이었고 주변에서 함께 하자고 요청했을 때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한 것이다. 또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변호사 일만 하는 것보다는 그 일들을 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웃음)
환경운동연합은 지금은 고인이 된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최재현 교수의 제의로 1986년 8월에 최 교수와 서진옥 회장이라는 분이 주축이 되어 거기에 내가 끌려들어 가 변호사라 비용도 대고 정관도 만들면서 시작했다. 2년 뒤인 88년에 최열 총장이 들어오고 90년에 환경연합이 되었다. 지금도 내가 환경운동연합의 공익법률센터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그것을 내놓으려 하는데 맡을 사람이 없다고 계속 모른 체하고 있다.(웃음) 민변은 '정의실천법조인회(이하 정법회)'에서 시작했다. 86년 5월 10일 변호사 사무실 개원식 때 당시 인천법원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정영일 판사가 조영래 변호사를 데리고 개업식장에 왔다. 거기서 인사를 하고 그러고서 며칠 후에 조영래 변호사 측에서 정법회 창립식이 있다고 오라고 해서 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2년 뒤 88년에 민변이 되었다.
2006년 하반기에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 FTA를 체결하면서 '이제는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우리나라를 장악하는 상황까지 왔구나. 큰일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앞장서서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었지만,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사회가 점점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화도 나고 짜증도 많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을 한번 마련해보고자 노무현 정부 초기 의료보험공단 이사장을 한 이성재 변호사와 몇 사람들 더 모아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만들었다. 사실 나는 말만 꺼냈지 방관자인 셈이다. 나한테 연락도 잘 안 하고,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다 일군 거다.(웃음)
2007년 초부터 많은 토론회 끝에 '북유럽식의 보편주의 복지국가 정책'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그해 7월 4일에 국민일보 빌딩 1층에서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출범식을 했다. 그러면서 <복지국가 혁명>(도서출판 민 펴냄)을 출간했는데 거기에 총론과 각론을 포함하여 '복지국가 소사이어티'가 지향하는 정책적 목표를 제시했다. 10월에 국회감독 사단법인으로 등록이 되는데 출범 당시부터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공동대표 겸 이사장을 떠맡게 되었다. 누가 대신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도 내가 하고 있다.(웃음) 올해로 5주년이 되는 동안 15권이나 되는 책도 내고 많은 일을 했다. 이제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까지 복지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복지에 대해 많이 알린 것은 맞는 것 같다. <한겨레> 조사에 따르면 5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식 사민주의가 옳은 대안이다'는 비율이 약 30%였는데, 3년 전에는 67% 정도까지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20년쯤 후에라도 우리 사회에 사민주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사민주의자라고 생각한다'라고 쓴 글을 읽었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터부시해온 상황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아니지 않나. 그것만 해도 큰 진전이다.
맞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런데 특별히 사민주의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2006~7년을 지나면서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 박사도 "앞으로 5년 안에 한국이 중남미 국가처럼 될 건지, 아니면 유럽의 의회중심국가처럼 될 건지 결정될 거다"라고 했던 것 같다. 이것은 소수의 자본가 계급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될 것인지, 다수의 서민들이 결정권을 갖게 될 것인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본다. 만약 우리 사회가 좀 더 평등한 사회로 되지 않으면 국민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사회는 분열될 것이며 성장 잠재력은 고갈되고 가까스로 올라선 선진국 문턱에서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져 중남미 국가처럼 될 것이다.
지금이 아주 중요한 기로라고 생각한다. 합계 출산율이 1.12명 수준으로 세계 최저이고 노인 자살률, 노인 빈곤율도 OECD 최고다. 빈부격차도 미국이 최고였는데 우리나라가 거의 따라잡았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나라가 제대로 가겠는가. 신기루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많은 연구들에서 나오듯이 조금이라도 더 평등한 사회가 성장률과 성장잠재력도 높고 행복지수와 국가경쟁력도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최고의 국가경쟁률, 성장률, 국민소득 수준을 자랑하는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등의 북유럽 국가들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사회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서로 길항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자유를 가장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권력을 억제하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그런데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면 미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를 만들어 내고 힘 있는 자들은 그 힘을 가지고 계속 부를 축적한다. 한편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1인 1표로 거리의 노숙자도 대통령도 모두 한 표씩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가치가 같다는 말이고 평등한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길항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돼버리는 거다. 소련에서와같이 만약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되면 결국 지배자들은 자기들만은 이 평등으로부터 예외로 두고 국가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가 되려면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평등이 거의 없어졌고 자유만 팽배한 매우 위험한 상태다. 사회 통합은 안 되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1500만 명 노동자 중에 870만 명이 비정규직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오직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비정규직을 60%까지 늘린 것인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개입을 해야 하는 것인데 사민주의가 하나의 해답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국가가 모든 것에 독점권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았다. 양말을 몇 켤레 생산하는 것까지 국가에서 결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놓으면 잘 될 것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이 실패한다는 것도 1930년대의 대공황 사례에서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방임도 완전한 국가통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중간으로 가는 것, 즉 중용(中庸)의 도로 가는 것이 맞다.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하여 생산은 개인이 하도록 하고 상품의 거래는 시장이 하도록 맡겨두되, 소득 분배에 있어서는 국가가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 이것이 사민주의라고 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있다. 독일은 전통적인 사민주의 국가와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대표적인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등과 같이 거의 같은 수준의 복지를 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성장률이 미국보다 더 높고 국민소득도 5만 달러 수준이다. 이런 나라들이 우리에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도 못 할 이유가 없고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진짜 이렇게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웃음)
여러 운동들에 거의 항상 창립 멤버로 참여해왔는데 개척자적인 마인드가 있는 것 같다. 시민운동을 함에 있어서 원칙이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볼 때 상당히 우수하다고 본다. 그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열어 합하면 진짜 괜찮은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지금까지 했던 운동들은 모두 괜찮은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던 그때그때마다의 시대정신이었고 이것이 나를 이끌고 갔던 것이다. 바로 그 옆에 내가 서 있었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나.(웃음)
지금까지의 해온 시민운동의 궤적을 보면 항상 소수의 기득권 편이 아닌 진보적 가치의 그룹에 서 있었다. 사실 변호사로서 편하게 살면 살 수도 있는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불편하고 거친 삶을 살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다면?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오히려 재미있게 잘 살았다.(웃음) 누구나 측은지심이 있고 염치도 있지 않은가. 요즘 신문을 보면 답답하고 울화가 치민다. 노인이 치매를 앓는 부인을 죽이고 자살했다느니, 뇌성마비를 앓는 손자를 죽이고 할아버지가 같이 목매 죽었다느니 하는 소식들 말이다. 어떻게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이런 일을 방치할 수 있는가 속상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돌아보면 솔직히 이름만 걸고 제대로 해낸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도 이사장을 맡고 있지만, 정말 이름만 걸고 있지 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만두고 싶다.(웃음)
거기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통일마당에 같이 살고 있는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내 손을 잡고 좋아하시는데, 내가 오히려 민망하다. 저들에 비하면 나는 무엇을 하는가 싶다. 누군가는 나더러 빨갱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과거에 어떤 사상을 가졌든 정말 순수하고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50년 전부터 지금까지 자기 신념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밖에도 주변에 운동하시는 분들이나 쌍용차 노동자분들을 보면 그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은 '체' 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다.(웃음)
정치 쪽에서 여러 가지 제의를 많이 해왔을 것 같은데 국회의원이나 기타 제도권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 초기에 제안이 있긴 했다.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비례대표 자리를 내어 줄 테니 들어오라고 했는데, 내가 사양했다. 정치인은 성향이 맞아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욕을 먹어도 밤에 잠도 잘 와야 되고 어떤 때는 덤빌 수도 있어야 되는데, 나는 그런 게 잘 안 되는 편이다.(웃음)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직업 분포도를 보면 변호사 비율이 가장 높다. 사회 다양한 계층들의 이해가 반영되어야 할 국회에서 특정 직업군이 과대대표 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으로도 이 비율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은데, 정치를 생각하고 있을 예비 법조인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법률전문가인 변호사가 입법기관에 진출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전공이냐는 것과 의원으로서 적절한 사람인가와는 크게 연관이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소선거구제, 제왕적 대통령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이다.
이게 다 박정희 체제의 유물이다. 4. 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로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대통령제로 다시 바꾼 게 아닌가. 국회가 여러 다양한 계층의 이해를 균형 있게 반영해야 하는데 대표성이 구현되지 않는 소선거구제로는 불가능하다. 소선거구제의 결과는 양대 정당이 의석을 독점하여 비슷하게 보수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정하자고 할 정도로 비슷한 정당이고 이것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독일에서는 7% 득표율의 녹색당이 주장하는 원자력 발전소 폐기가 반영이 된다. 일본이 후쿠시마 사태가 나고도 원자력 발전소를 폐지하지 못했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일본은 의원내각제이긴 하지만 소선거구제이기 때문에 자민당과 민주당이 다양한 계층의 이해를 반영하기보다는 보수화되어 의석을 독점하고, 국회의원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이권을 쥔 세력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실정이다. 변호사가 정치영역에 진출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정치체제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하여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가 대변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지난 2011년 1월 20일에 대법원이 1959년 7월 31일 진보당의 당수로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죽산 조봉암(1899~1959)의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 측 변호인으로 이 사건을 담당했었는데, 52년 만에 정부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조봉암 선생에 대해 무죄판결을 이끌어 내었을 때 마음이 어땠는지 듣고 싶다.
역사적인 사건을 맡았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이 사건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작사건으로 진상규명 결정이 났으니 재심에서 무죄가 날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다. 다만 대법원 법정에서 공개변론을 했는데 유신 독재 시절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검찰의 논고가 놀라웠다. 한마디로 조봉암 선생은 간첩이고 검찰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다. 정말 참담했다.
당시 조봉암 선생은 간첩죄와 무허가불법무기소지로 기소가 되었는데, 워낙 이승만 쪽에서의 협박과 위협이 난무하다 보니 비밀리에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허가불법무기소지에 관해서는 당시 미군정법령에서는 한국법의 처벌규정에 따른다고 되어 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무기불법소지에 대한 처벌법이 아직 없었다. 그 법은 조봉암 선생 죽은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간첩죄 유죄 판결을 취소하면 무허가무기소지도 다시 판단해서 공소를 기각하거나 무죄를 선고야 하는데 이번 재심판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유죄로 인정하면서 선고유예를 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에는 간첩죄가 무죄로 판결됐다는 것만 부각이 되었는데 나로서는 상당히 실망했고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입수한 그때의 재판 기록이나 국무회의 회의록, 각종 신문 기사물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사법살인을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국무회의 발언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를 겨냥하여 "어떻게 이런 판사가 있을 수 있나? 나는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은 그냥 방치할 수 없고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맹렬히 비난했고, 이 후 항소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이번에는 그 판사가 제대로 판결을 내렸다"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것만으로도 탄핵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본인이 민주당 당원으로서 민주당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로 탄핵을 당했는데 말이다.(웃음)
이 사건을 필두로 제5공화국까지 인혁당재건위사건 등 여러 조작사건이 터져서 많은 사람들이 사형집행을 당했다. 당시 사형판결에 관여했던 검사들, 판사들은 모두 거기에 영달해서 대법원 판사가 되고 검찰총장도 했다. 그 누구도 참회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 하나 없는 게 우리 사법의 참담한 현실이다. 단순히 죽은 사람을 재심해서 무죄판결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때 했던 판결에 관여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처벌은 몰라도 제대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게 전혀 없다. 연구도 없고 전혀 언급도 되지 않는다.
해외에서는 누가 어떤 사건을 어떻게 판결했다는 것들이 공개가 되나?
우리나라도 공개는 된다. 그러나 일종의 카르텔 비슷하게 법원이나 검찰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게 관행이 돼버렸다. 이러한 과거 청산이 없으니까 자신이 내린 판결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이제까지 역사적 문제를 재평가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이번 대선에서도 사법개혁안은 대선 후보자들에게 주요한 이슈였는데, 그만큼 사법부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높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치검찰' 혁신과 고위 공직자를 수사할 독립기구 신설 등 문재인 후보 및 주요 대선후보자들의 사법개혁안이 주로 검찰 개혁에 맞춰져 있다. 이러한 사법개혁안의 방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문제는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핵심적인 개혁과제로 제시되었고 민변에서도 지속적으로 여러 토론회를 거쳤다. 검찰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그렇다면 이 검찰의 내부 개혁과 함께 독립관청으로서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구성원은 선거를 통해서 선출을 하든지 혹은 기관 자체가 아주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문민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만 강조하면 자칫 잘못하면 검찰을 견제할 방안이 없어 오히려 검찰이 무소불위한 사법 권력을 휘두르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면서 검찰에 손대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검찰은 본래 행정부처의 하나인 법무부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고 법무부는 그 정부의 법적 시스템을 책임지는 것으로 정부의 통치 이념에 복종해야한다. 다만 이것이 과도하게 작동하는 것이 문제다. 검찰이 정부의 통치이념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홀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검찰이 스스로 자제를 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정부의 통치이념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검찰 고위직을 선출직으로 하고 대검찰청 중심의 중앙집권화 된 구조를 분권화를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중요한 것은 검찰은 공소권을 갖고 경찰은 수사권을 갖는 형태로 상호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 통해 검찰과 경찰이 상호견제를 하게 할 필요가 있다. 소위 민주정치체제에는 정답이란 것이 없다. 그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삼권분립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견제장치를 만들어서 다양한 개혁 방안을 강구해봐야 할 것이다. 현 정치체제에서는 검찰 중립, 검찰 개혁을 요청해봐야 공염불이다. 대통령이 임명하고 검찰 총장이 밑에 사람들을 임명하고 징계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검찰이 독립할 수 있겠는가.
검찰이 권력에 대해서 중립적인 것이 중요하지만 검찰 역시 시대정신과 큰 통치 이념에 대해서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의 검찰은 어떤가?
지금 현재의 검찰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조직논리에 갇혀 있다. 자기 조직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임명권을 가진 권력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고, 여기서부터 검찰이 모든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검사 중에 실수를 저지른 경우는 많았지만 최근의 김광준 검사처럼 구속된 케이스는 별로 없었다. 이번에는 경찰이 파고드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검찰 개혁을 근본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사실 다른 시스템을 놔두고 검찰 개혁만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국회가 비례대표 중심으로 개혁된다면 큰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각각 20% 정도의 의석을 차지할 것이다. 거기에 환경, 청년, 노인, 노동, 자본가, 기업가, 종교인 등의 다양한 계급들이 의회에 진출하여 집권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만약 진보 계통의 정당들이 연정을 하여 집권을 했다고 하면 그 안에는 거대 진보 정당 외에 노동당, 청년당, 환경당, 모자보건당 등이 속하게 될 것이다. 이 중 하나의 세력이라도 빠지게 되면 연정 체제는 무너진다. 때문에 연합을 한 4~5개의 진보계열 정당들이 머리를 맞대고 공동으로 윈윈 전략을 짜낼 것이다.
노동당이 노동법 개정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이 모두 동의하고, 대신 녹색당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폐지 법안을 다룰 때 다른 정당들이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 것이다. 모자보건당에서 교육개혁안에 동의하라고 요구할 수 있고, 청년당에서는 청년 실업 문제 해결에 다른 당들이 함께 나서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네 가지 분야가 함께 해결될 수 있다.
검찰 개혁 문제도 그 안에서 논의될 수 있다. "노동자가 1500만 명이고 그 가족까지 합하면 4000만 명이 넘는데 이제까지 검찰은 계속 재벌 편에 서서 노동자 탄압만 해왔다. 그러니 검찰을 근본적으로 고치자. 국회에서 검찰총장 임명하는 것도 생각해보자"라는 의견들이 모아지면 개혁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못할 것이 없다. 사람이 만든 제도는 사람이 만든 집과 같아서 1년이라도 수리하지 않으면 탈이 생긴다. 끊임없이 고쳐야 되는데 여기에 일정한 원칙은 없다. 만약 내각제로 개혁이 되고 총리가 국회의원 중에 임명이 된다면 국회가 검찰총장을 임명하고 이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인지 국회에서 검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찰 개혁이 정치제도 개혁과 같이 가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지난 20여 년간 왜 검찰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나왔을까?'라고 생각해보면 여기에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찰 개혁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개혁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요즘 가장 필요한 운동이 아닐까 한다.
법원은 사회적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인데 그 법원이 공정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 우리를 매우 불안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권력지향적 검찰보다 권력지향적 판사가 더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판사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더불어 판사가 사회 전체를 꿰뚫어보고 깊은 혜안을 담은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어떤 점들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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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인 측면에서 사법권 독립을 실현하고자 하더라도 다른 정치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이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수하는 한 법원의 구성은 결국 대통령과 의회를 점령한 양대 보수정당에 의해 결정될 것이고 이렇게 구성된 법원이 진보적이거나 소수자 보호를 위한 판결을 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은 비례대표 중심의 의회가 구성되어 국민의 정치적·계급적 성향이 그대로 의회에 반영되고 그런 의회에서 구성하는 법원이 좀 더 진보적이고 소수자 보호에 앞장서는 법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땅에서 솟아 나오는 사법권 독립이란 것은 없다.(웃음)
진보적인 판결을 했던 이유로 뒷조사도 당했다고 했는데 그런 압력들에도 불구하고 소신을지키는 것엔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용기랄 것도 없다. '나가라고 하면 사표 내고 변호사 하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한 거지.(웃음) 생계에 대한 걱정으로 따지자면 법관이 받는 압력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일반 회사원 같은 경우 해고당하면 꼼짝없이 실업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은 변호사 수가 워낙 늘어서 변호사로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만 해도 사표 쓰고 나오는 일이 별일은 아니었다. 1986년 5.3 인천사태 직전인 4월 19일에 인천에 있으면서 사표를 냈는데, 그때는 정말 법원에 있는 게 곤혹스러웠다. 인하대, 인천대생들이 캠퍼스 담장 안에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하는 모습을 경찰들이 담장 위에 올라가 사진 찍어다 교문에서 잡아 구속시키곤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한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적 위험성은 없다고 판단되어 영장을 기각하곤 했다. 그러면 또다시 영장이 다른 법관에게 재신청 되어 발부되고, 이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니 차라리 법원에서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표 낸 날 날아갈 듯이 기뻤다. 지금도 그 기분이 아주 생생하다. 그 뒤엔 그렇게 즐거울 일이 없더라.(웃음)
(5.3 인천사태 : 신한민주당이 1986년 2월 12일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서울, 부산, 대구에서 대회를 열던 중 4월 29일 당고문인 김대중 민추협공동의장이 소수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이민우 총재가 좌익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발언을 하면서 이를 추진하던 재야와 운동권 세력이 분개해 시위를 벌인 사건. 시위대는 신한민주당의 각성을 요구하고 이원집정 개헌 반대를 외치며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319명이 연행되고, 129명이 구속되었으며 전두환 정권이 운동권 탄압을 본격화한 계기가 됐다.-편집자)
곧 대선이다. 2012년 대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준과 마음을 가지고 대선에 임해야 할까?
지난번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국민들에게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당선되었다. 747 공약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처음에 그 공약을 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반도 대운하 공약도 마찬가지다. 결국 남은 것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 아닌가. 적어도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면 돈을 벌어 주겠다는 식의 공약보다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자유와 평등이라면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어떻게 충분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평등도 실현할 것인가'하는 민주국가의 근본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민주의'와 '보편복지'가 우리 사회의 가야 할 길이고 지금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후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여기에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은 "시기상조다, 점진적으로 시행하자"라고 다른 의견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사민주의와 보편복지가 이루어지려면 우선은 정치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례대표 확대라던가, 의원내각제로의 개헌 등의 비전을 제시하고 국가개입에 의한 보편적 복지를 순차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보육 복지 같은 경우에는 즉시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의료보험의 경우 주식회사 병원에는 강력히 반대한다. 현재 우리의 의료보험 시스템은 총 의료비용에 비해 세계 최고의 효율을 가지고 있다고 유럽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그런 현 의료보험 제도를 왜 민간 보험으로 바꾸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 보험 제도에도 개선할 점이 많다. 62~3%의 보장률을 85%까지 올리고 행위수가제를 포괄수가제로 고치고 분산된 진료 기록을 의료보험공단에서 통합 관리해야 한다. 지금의 진료 기록 체제로는 동네 병원에서 X선 촬영하고 대학 병원 가서 찍고 큰 병원에서 또 찍어야 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오히려 이것 때문에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이렇듯 의료보험과 같은 복지제도를 즉시 강화하는 동시에 보육이나 다른 복지제도를 순차적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도 즉시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몇 년 안에 비정규직을 줄이겠다는 쪽으로 가야 된다. 비례대표 확대 등 정치개혁을 통해 의회중심주의를 실현시키고 그리하여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고 국민으로부터 통제받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 나아가 국가의 개입에 의한 보편적 복지국가의 실현을 제시하는 후보를 선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극화 문제 심화, 역사청산에 대한 악의적 무시, 이명박 정부의 들어 생긴 민주주의 후퇴, 무리한 민영화 추진 등의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율은 30~4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론 개혁진보 세력이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세력으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싶은데, 개혁진보세력이 대중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핵심 과제를 몇 가지 꼽는다면?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프레임에 갇히는 것인데 새누리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반드시 개혁진보세력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서 온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일 청산을 못한 상태에서 현재까지 이어진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폐와 여기에 친일 세력이 장악한 언론의 작용이 결합한 허위의식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개혁진보세력이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했을 때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서나 보수 세력에 대한 지지가 30~40%가 유지된다는 것은 현상이 변하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그 정도 된다는 것이니 거꾸로 개혁·진보를 원하는 나머지 세력도 결집되면 그 이상의 비율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항상 진보는 분열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보수는 현재의 상태를 바꾸지 말자는 입장이기 때문에 견해가 하나이지만 진보는 늘 현상을 바꾸자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가자, 저 방향으로 가자, 천천히 가자, 빨리 가자" 등의 견해가 여러 개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정치체제의 유무인데 의원 내각제와 비례대표제야말로 그에 적합한 제도인 것이다. 가령 스웨덴처럼 100% 비례대표제를 시행한다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반수를 넘는 정당이 등장하지 않는다. 5~6개의 정당이 분점을 하게 되고 비슷한 이념의 정당끼리 연정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의 연합이 가능하게 되고 이것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의견들의 합리적이고 균형 있는 타협이 가능해진다.
또한 개혁진보세력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대중 속에 파고들어 대중의 의식을 각성시켜야 한다. 지역별 소모임을 통한 토론회 조직, 중등학교 수준부터의 정치적 자각을 일깨우는 교육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교육과정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정치에 대해 특별히 연구하는 학과가 아니면 의원 내각제나 비례대표제에 대한 얘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개의 보수정당이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노르웨이에서는 중학교에서부터 정치교육을 한다. 중학생 때부터 어떤 정치제도가 좋은가 토론할 수 있게 하는 거다. 이처럼 시민들이 먼저 정치적 자각을 할 때 그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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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의 최병모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농촌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형과 함께 자취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두드러지게 똑똑하지도 않았고 공부도 하기 싫어서 잘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운 좋게 고시에 붙은 거다.(웃음) 형님이랑 같이 고시 준비를 하다가 형님은 그만두고 취업을 하고, 그럼 너라도 하라고 해서 끝까지 해본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남보다 편하고 자유롭게 산 것 같다. 다만 중·고등학교, 대학 시절 학교 공부보다는 다른 책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진보적인 가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영향을 준 분이 있다면?
아버님이 굉장히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분이셨다. 비록 초등학교도 안 나오셨지만 한글을 깨치셔서 책을 많이 읽으셨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도 여름엔 낮에 하루 종일 독서하시고, 들에 다녀오시면서도 책을 들여다보시곤 하셨다. 또 전라도라는 지역적 특성이 있어서인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렇게 미워하셔서 시골에서 항상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으셨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놈들 등쌀에 못 이겨 40년대 초반에 길림성으로 이민을 가셨다가 해방되어 강진에 내려오셔서 평생 농사를 지으셨다. 1908년생으로 2001년에 93세로 돌아가셨는데 이런 아버지 영향이 컸던 것 같다.(웃음)
변호사로 개업하고 '법조계의 먹이사슬'에 염증을 느껴 91년 서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내려갔었다가 99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서울에 사는 게 복잡해 싫고, 스킨 스쿠버를 좋아해서 제주도로 갔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를 선택한 것은 여러 면에서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86년에 서울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원하고 서소문 본원, 동부, 남부, 서부, 북부 지원까지 모두 5개 법원을 돌아다녀야 했다. 변호사는 말로 벌어 먹고산다고 하는데 전혀 아니다. 발바닥으로 벌어 먹고산다.(웃음) 1인 5역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호사는 할 일이 많은데 법원에서 변론하고 사건 당사자 만나서 상담자 역할도 하고 준비서면도 써야 되고 기록 검토도 하고 심지어는 현장 검증까지 나간다. 사건이 많든 적든 정신없이 바쁘다. 정말로 지긋지긋한 생활이었다. 매년 교통상황까지 나빠져서 처음엔 아침 8시에 나와도 법원에 도착했는데, 1년 후에는 7시 반에 나가도 늦더라.(웃음)
그렇게 7년 정도 변호사 생활을 하니 더 이상 서울에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을 수 있게 법원이 한 곳만 있는 곳에 산도 있고 바다도 있는 곳을 찾으니 제주밖에 없었다. 가족들을 전부 데리고 제주도로 가서 9년 정도 전원생활을 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다 서울로 학교를 가고 집사람까지 서울로 오니 나 혼자 떨어져서 지낼 수가 없어 2000년에 다시 서울로 왔다. 군대에 있으면서 결혼해서 이후에 가족과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는데, 혼자 있으려니 못 있겠더라.(웃음) 법조계 먹이사슬에 염증을 느꼈다는 말은 과장된 것 같다.(웃음)
최병모에게 자유란?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마음이 편한 것이 참 중요한 것 같다. 가능한 한 돈 같은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나라처럼 사회안전망이 전무하다시피한 각박한 사회에서는 일정한 정도의 재산을 갖는 것도 세속적 자유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 같다. 나도 사실은 노후가 상당히 걱정이 된다. 아내도 가끔씩 걱정을 하는데 그때면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하면서 넘기곤 한다.(웃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당장의 생존과 취업, 결혼의 문제들로 막막한 심정들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관심사에 매몰되기 쉬울 테다. 그러나 세상을 바꿔가려면 우리 국민이 정치체제를 바꿔야 하는데 여기에 청년들이 먼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는 잘못된 정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잘못된 정치는 정치인의 자질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제대로 된 정치제도를 갖추지 못한 데에도 큰 원인이 있다.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대표성이 구현되지 않는 소선구제로 선출된 의원들과 6분의 1에 불과한 비례대표로 구성되는 국회로는 국민의 다양한 정치지향을 결코 반영할 수 없고 지역분할구도도 극복할 수 없다. 이는 결국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체제가 현재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결과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례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의원내각제로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식 정당명부제도 차선의 대안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청년들도 이러한 정치제도 개혁운동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의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을 제대로 꾸려서 사민주의 전파 같은 운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김민희)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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