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폭로' 기자 회견에서는 비리를 저지른 당사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는다. 불법과 탈법을 일삼으며 법망의 밖에 있는 사람을 고발하면서 굳이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제단은 '미안하다'고 했다. 그들이 '미안하다'고 되뇐 까닭을 알아야 왜 신부들이 삼성 비자금 조성을 고발하는 기자 회견에 나섰는지 알 수 있다.
"'3차원적 권력'이 된 삼성"
한국방송(KBS) 1TV <KBS스페셜>은 지난 8일 방영된 '삼성 트라우마, 우리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편에서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삼성이 흔들리면 국가 경제도 위태롭다'는 주장에 공감하느냐를 물었더니 '공감한다'는 응답이 총 77.3%(매우 공감 28.8%, 대체로 공감 48.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에 대한 인식'을 묻자 '불법 상속이 드러났다면 승계를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36.6%, '합법, 불법에 관계없이 경영권 승계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8.6%를 차지했지만 '이사회, 주주총회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35.3%), '경영권 보호를 위해 어느 정도 위법은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17.8%)는 대답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애나 파이필드 <파이낸셜타임스> 서울지국장은 "한국이 곧 삼성이고, 한국과 삼성은 한데 얽혀있다는 신화가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도 "삼성의 비리나 모순을 외부에서 개혁하는 데에 이성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반대해 결과적으로 삼성이 지켜지는 묘한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삼성 비자금 특검으로 삼성이 흔들린다'는 주장은 삼성 측이 중심이 되어 유포하는 것일 뿐, 별다른 근거도 없다. <KBS스페셜>은 증권 애널리스트의 말을 인용해 "가장 민감한 주식시장에서도 삼성 관련주는 흔들림이 없고 오히려 특검 시작 이후 상승세"라며 "특검에 따른 삼성 주가 변동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주가를 결정한 변수는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KBS스페셜>은 한국 사회에서 삼성의 지위는 '경제적 위세'보다는 이를 확대 포장한 '신화화된 권력'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분석을 전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스티븐 룩스는 이를 "3차원적 권력"으로 규정했다. 그는 "3차원적 권력은 사람의 의식까지도 권력자들의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라며 "진정한 권력의 방식은 손가락 하나 치켜들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과 '공동정범'의 한국사회, 사제단의 일침
이러한 분석은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폭로할 때마다 우리 사회가 보인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잘 설명해 준다. 또 한발 더 나아가면 어느새 한국사회가 삼성과 '공동정범' 관계에 놓이게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제단은 지난 5일 청와대 금품수수 인사 명단을 폭로하면서 이 점을 바로 지적했다. 이들은 "오늘의 부패상은 지도층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는 점을 성찰하시면서 상대방에게 미움이나 원망을 돌리는 일이 없이 저마다 영혼의 내면을 살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결국 삼성이 '일개 기업'과 한 사회의 법과 질서를 좌우하는 '왕국'의 수준을 넘어 사람들의 의식까지 흔드는 '신화화된 권력'에 이르렀다는 현실이 사제단을 움직이게 만든 셈이다. 사제단은 단순한 기업의 비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한 '미신'을 폭로했다.
삼성의 '공동정범'인 사회에서 삼성의 비리를 폭로할 수 있는 곳은 사제단 밖에 없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사제단을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김 변호사는 사제단을 찾아가기 전 KBS, 문화방송(MBC), <조선일보> 등을 찾았으나 모두 '삼성과 싸울 수 없다'며 제보를 거절했고 여타 삼성 문제를 다룰 만한 몇몇 시민단체들도 역시 '힘들다'는 답변만 내놨다고 한다.
이는 꼭 20년 전 1987년 5월에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발표하면서 민주화의 횃불을 올렸던 것을 연상시킨다. 공교롭게 김용철 변호사를 처음 만난 사람은 20년 전 고문치사 사건 진실 폭로를 주도했던 함세웅 신부였다. 함세웅 신부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발표하며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발표할 때의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사제단의 고발을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다. <중앙일보>를 필두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보수신문들은 늘 사제단에 "찔끔찔끔 내놓지 말고 한번에 다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중앙일보>는 지난 5일 청와대 금품수수 명단 공개에 사설에서 "사제단은 정의가 아니라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맹비난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인국 신부의 답변은 간명하다. 그는 "다 내놓으면 삼성 측에서 수사 기관에서 말할 거짓말을 다 만들어 놓을 텐데 왜 우리가 다 내놔야 하느냐"며 "우리가 리스트를 전부 공개하면 당사자들은 엄청 창피해 할 텐데 그런 모욕은 주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이러한 신문들의 시각과 달리 사제단의 목적은 '삼성을 올바르게 개혁하는 것'이지 개개인을 '징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답변이다.
"영혼을 판 사람들, 부끄러운 줄 알아야"
사제단에서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는 김인국 신부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1조 원을 가진 사람에게 1억 원은 얼마겠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1만 원" 이라고 자답하면서 "1조 원 가진 사람에게 1억 원을 받은 사람들은 1만 원에 영혼을 판 사람들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 질문은 한국 사회는 무엇에 영혼을 팔았느냐는 질문으로 확대된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광고 게재 거부에 대해 다른 언론들은 일언반구 보도 하지 않을 정도로 언론은 광고에 영혼을 팔았고, 법조계는 소위 '떡값'에 영혼을 팔았다. 그리고 일반 시민마저도 집단적으로 과장된 삼성 신화, 3차원적인 권력에 영혼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제단 신부들은 이런 '영혼'을 팔아넘기려는, 아니 넘긴, 한국 사회를 고발하고자 나섰다. 그들이 개개인을 응징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이 비리 의혹의 당사자에게 굳이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은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는 그 사제단 신부의 행동에 어떻게 화답해야 하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