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이 발목을 잡는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두 나라가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 이것은 역대 정권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번 삼일절 담화가 이런 것을 의미했다면, 별로 특별한 게 못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담화는 분명히 과거와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고, 또 그렇게 보도가 되고 있다. 그 다른 점이란 뭘까? 그것은 결국 '역사의 진실을 묻는 것보다 미래로 나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어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미래로 나아가려면 과거사를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함께 미래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게 제대로 된 어법 아닌가? 반성은 미래를 위해서 하는 것.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퇴행이 아닌가. 그런데 MB 사전은 다르다. 그의 사전(私典)에 따르면, 외려 과거사를 반성하라는 게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발목을 잡는 짓이란다.
작년이던가?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캐나다 의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럽 연합 역시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발뺌하는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한다. 그럼 북미와 유럽은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저러는 걸까? 다른 나라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는 마당에, 한국에선 대통령이라는 이가, 그것도 삼일절에, 버젓이 저런 발언을 한다.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 어디서 많이 듣던 것 소리 아닌가? 맞다, 과거사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늘 일본총리들이 하던 얘기다. 그들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과거를 죄악으로 반성하는 게 아니라 영광으로 기억하려 한다. 이게 MB가 말하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다. 기껏 대통령 시켜놓았더니, 자기가 대한민국 대통령인지, 대일본국 총리인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이게 실용인가?
일본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려면, 과거를 분명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상식이다. 역사교과서 왜곡을 앞세운 일본의 우경화는 주변국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세계와 공조하여 일본의 우경화를 막는 게 한국외교의 전략적 목표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MB는 지금 일본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안겨버렸다. 대통령이 한 말이니 뒤집기도 어려워진 상황이다.
어느 멍청한 신문에서는 벌써 한국이 일본에 선물을 주었으니 일본도 무역역조를 해결하는 데에 성의를 보이라고 썰렁한 주문을 한다. 반성의 의무를 면해줬다고 일본이 우리한테 뭘 줄까? 반성의 요구를 포기했다고 일본에서 나랏돈 풀어 김을 더 사겠는가? 굴을 더 사겠는가? 도대체 무슨 실익을 얻는단 말인지. 게다가 선조의 고통이라는 게 어디 돈 몇 푼에 팔아먹을 고물인가?
일본을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없다. 불행히도 일본우익은 한국우익처럼 멍청하지가 않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는 한 가져갈 수 없는데도 독도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히는 게 그들의 외교다. 설사 독도를 못 가져가도, 그것을 카드로 다른 것을 따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부당한 요구도 집요하게 해대는데, 대한민국은 정당한 요구도 그냥 포기해 버린다.
오사카에서 자기 탄생비 세워준다니 화답이라도 하자는 건가? 아무리 대통령이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그런 발언까지 할 권한까지 준 것은 아니다. 누가 그에게 선조에게 고통을 모욕할 권리를 줬을까. 자기 임기야 5년으로 끝나지만, 한일관계는 그 후로도 계속될 문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그것에 대한 요구는 한일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실용'이라는 말의 용법
일단 과거사는 돈 몇 푼 걸고 흥정할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 두자. 설사 실용적 관점에서 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느 나라 외교가 그토록 중요한 협상카드를 스스로 버린단 말인가? 일본의 외교를 보라. 36년 간 동안 저지른 거대한 만행에 비하면 그저 에피소드에 불과한 북한의 자국민 납치 문제를, 얼마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가.
그가 좋아하는 '실용'이라는 말의 어법은 이미 장관 인선과정을 통해 드러났다. 그것은 '공직에 도덕성은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 말은 땅 투기, 위장전입, 논문표절 등 온갖 부덕한 방법으로 살아온 인생들을 변명하는 낱말이었다. 그 앞에 붙인 '일만 잘하면'이라는 표현은 그저 조건문, 한 마디로 입증되지 않은 사실의 가정법일 뿐이다. 일 잘 한다는 사람들이 제 집 하나 못 짓는 것을 보라.
'실용'이라는 말로써 그는 일본의 부도덕까지 변명해준다. 경제적 실익만 준다면, 일본의 도덕성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얘기. 여기서도 '경제적 실익만 준다면'이라는 표현은 그저 조건문, 한 마디로 기약 없는 약속의 가정법일 뿐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게 이명박 정권의 외교식성인 모양이다. 상대가 누군가? 외교 스타일 더럽기로 소문난 일본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게 통할까?
삼일절 담화는 김경준한테 사기 당한 것보다 더 멍청한 일이다. 그저 쓸 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국익을 해치는 발언이다.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삼일절을 택해 그런 발언을 한 데서 어떤 조급증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국민에게 약속한 7%의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데에 어떤 식으로든 일본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대한항공 747기, 일본 관제탑에 비상급유 요청. '과거는 묻지 않겠다. 연료만 넣어 달라. 로저.'
한일 우익동맹
사과를 면해주면 일본이 뭘 해줄까? 일본으로서는 이미 얻을 것을 얻었다. 그러니 따로 뭘 줄 이유도 없다. 사과를 면해준 게 고마워 박정희 시절처럼 원조라도 해준단 말인가? MB는 이런 것을 '실용'이라 부른다. 설사 그것으로 실용적 이득을 본다 해도 문제다. 일본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들이 베풀어줄 이익이란 과자 값 수준을 넘지 못할 게다. 근데 대한민국이 일본에 빌어먹는 거지냐?
이건 경제적 '실익'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 '이념'의 문제다. 한 마디로, 일한 동맹으로 북한을 고립시킨다는 냉전적 사고의 화석이다. 남북문제는 민족문제만이 아니라 국제문제라고 한 발언은, 한 마디로 남북관계보다 일한관계를 앞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 또한 일본우익의 바람이고 염원이라는 것이다.
제 발로 걸어와서 제 민족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나라가 있다. 일본의 입장에선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그런 것을 바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라 부른다. 미국과 중국이야 남북한과 특수한 관계에 있어서 그런다 치고, 도대체 남북문제를 논하는 책상에 왜 일본을 앉혀야 할까?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건 실용이 아니라 냉전의 '이념'이며, 과거의 '관성'이다.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독재정권은 미일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그 대가로 한반도에서 두 나라의 이권을 보장 해주었다. 명색이 우익이라는 자들이 제 나라 국익조차 못 챙겼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집권하자마자 일본의 국익부터 챙긴다. 북한을 향해선 미국 매파보다 한 술 더 뜬다. MB정권이 북핵 해결 없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은 없다고 외칠 때, 뉴욕 필은 버젓이 평양에서 연주를 한다. 코미디가 아닌가?
뉴라이트 역사관
이번 담화의 바탕에 어떤 이념적 맥락이 느껴진다.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 담화에는 MB의 당선에 기여한 뉴라이트 측의 역사인식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뉴라이트가 일으켰던 역사교과서 파동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식민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한국우익의 형님이신 일본우익의 논리다.
이런 맥락에서 계속 신경에 거슬리는 게 담화 속에 든 "밝은 면"이라는 표현이다. 물론 지난 정권에서 했던 과거사 청산작업을 비판하는 구절로, 한 마디로 과거에 친일과 독재를 했던 이들에게서 밝은 면도 좀 보자는 얘기다. 그런데 이게 몇 문장 뒤에서 바로 한일관계에 관한 언급으로 이어지면서 개운치 못한 고약한 뒷맛을 남긴다. 혹시 근세 한일관계에서도 '밝은 면'이 있었단 얘길 하고 싶었던 걸까?
예년과 현저히 달라진 이번 담화. 거기에는 일정하게 일본우익과 한국 뉴라이트가 공유하는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이루어졌던 역사 바로 세우기를 보며 그 동안 쌓여갔던 우익세력의 이념적 불만. 한국역사에 대한 그들의 이념적 반격이 '실용'이라는 간판으로 위장한 채 조용히 시작된 것이다.
(뉴라이트가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교과서를 만들었던 것은 그저 사적 취향의 발로가 아니라, 앞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겠다는 공적 제안이었다. 현 정권에서 이들이 이념적 사제의 역할을 하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이념을 공적으로 관철시키려 들 것이다. 이는 물론 '실용'도 아니고 '선진'도 아니고, '후진'적 이념의 노출, 즉 정치포르노일 뿐이다.)
아무리 우익이라도 그 동안 민족 문제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독재자 전두환, 노태우도 못 했던 일을 MB는 취임 며칠 만에 전격적으로 해치워 버렸다. '실용'이라는 마법의 주문 덕분이다. 불도저는 역시 업적도 빨리 세운다. 삼일절을 졸지에 친일절로 바꿔놓은 것. 2MB 정권의 첫 업적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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