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崇禮門), 단지 문화재가 아니라 국정철학이다
누군가 우스개로 그랬단다. "숭례문은 저렇게 타고 말았지만, 남대문은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우치게 된 것이 많은 우리 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숭례문의 위상이다. 그건 단지 숭례문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과 자신에 의해 진행되어 온 역사의식의 말살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숭례문이 오늘날에야 "문화재" 또는 "문화유산"으로 불리지만, 어디 애초에 문화재로 세워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선조 창건의 근거지로서 선택된 한강 유역의 서울이 성곽에 둘러싸인 채 4대문과 4소문이 구축되는 가운데 붙여진 이름인데다가, 그 이름도 조선의 국정철학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던 것이 아닌가?
돈의문(敦義門), 흥인지문(興仁之門),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숙정문(肅靖門)은 그 하나하나가 동서남북 4방위에 위치하면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뜻하고, (숙정문은 북한산 자락에 있어 사람이 그리 드나들지 않아 "지(智)"자를 굳이 넣지 않고 달리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본래 그 의미는 "지"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 한 가운데에는 보신각(普信閣)이 있어 조선조가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는 왕조시대의 유교적 도덕과 통치이념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그대로 수용할 바는 아니라고 논쟁할 수 있지만,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서 성찰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1907년, 일제가 이 나라를 공식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이전에 이미 숭례문의 성곽은 헐린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역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1915년 돈의문은 도로확장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사라진다. 게다가 4대문의 이름은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등으로 바뀌고 만다. 당시 이 나라 백성들이 가졌던 조선조에 대한 민족적 애착을 소멸시키면서, 의병(義兵)이나 의사(義士)를 떠올릴 "의"자가 붙은 돈의문은 아예 없어지고, "인(仁)의 정치"로 흥왕하려 했던 조선의 국정철학도 매장시키는 식민통치의 의지가 관철된 결과이다.
숭례문 현판은 이미 오래 전 떨어진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숭례문은 단지 오랜 세월의 기억을 간직한 문화재만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국정철학이나 역사의식이 담긴 엄중한 존재로 다가서야 하는 과제가 된다. 게다가 이번 화재 이전과 이후 숭례문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체의 일들은 우리 사회가 자신을 운영하는 방식과 발상, 그리고 능력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숭례문 화재사건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다층적인 뜻을 제대로 잘 짚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미래의 지침에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숭례문은 비록 타고 말았지만, 미래를 향해 나가는 새로운 문이 우리의 정신 속에 든든하게 구축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기술적 복원 논쟁을 넘어서서 우리의 의식, 정신, 그리고 자세가 복원, 개축되어가는 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토대 위에서 우리의 문화재도, 우리의 정치도, 우리의 경제도 그리고 우리의 교육과 사회도 진정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면서 살아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의 과정을 떠올리면, "도덕과 윤리가 밥 먹여 주냐? 경제가 제일이지," 했던 상황은 "예"를 높이 떠받든다는 의미를 가진 "숭례(崇禮)"의 품격을 우리 스스로 내팽개친 셈이나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우린 이미 그렇게 오래 전부터 살아왔고, 이번 화재로 숭례문의 현판이 떨어지기 전에 우리의 의식 속에 그 현판은 땅에 떨어진지 벌써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이만큼이라도 숭례문이 버텨왔다는 것이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생각조차 든다. 숭례문이 살아 있는 인격체였다면 이렇게 냉대 받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마지막으로 그 존재감이나 세상이 알리고 가자,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화(鎭火)의 물줄기를 스스로 거부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책임의식이 없는 책임자들
기이하게도 민심은, 이번 화재가 있고 나서 잡힌 방화 혐의자에 대한 비난보다 관계 당국에 대한 비난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불을 지른 책임도 당연히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지만, 그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더 무섭게 따지고 든 것이다.
그러나 불똥이 튀는 것에 대한 방어본능만 살아 있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이 문제를 대하는 책임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는 국가 최고 지도자라는 점에서 무한책임을 지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건만 떠나는 이나 이제 그 자리로 가려는 이나 모두 그 무한책임의 무게를 실은 고백과 책임토로를 일체 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의 집권 기간 중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피해를 입힌 역사적 사건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도 사죄를 하고 배상의 의무를 지는 것이 최고 지도자의 역할일진데 하물며 자신의 집권기간이나 자신이 치적으로 내세운 일과 관련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당선자는 책임 없는 책임자들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국정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최고위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
직접적인 관계 당사자들은 그런 무한책임까지 질 수 없겠지만, "이런 점에서는 적어도 저희들의 책임이 너무나 큽니다."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태수습에 대한 성실성과 진지한 의지를 보였어야 했다. 책임의 소재를 따지고 논쟁하는 것은 사후징벌의 두려움 때문에 당연하게 발생하는 반응이기도 하고, 그 진상의 규명차원이 있다 해도 그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고 과학적 입증에 필요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자세이다.
바로 그렇게 진솔하게 책임을 표명할 때, 그 책임의 무거움을 절감하는 사회가 되어가면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사태예방을 위한 철저한 대응의 치밀함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 발생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책임자들로 해서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게 마련이지 않을까?
과실은 따먹고 피해는 전가하고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정치권은 노무현 탓이다, 이명박 탓이다, 라는 공방이 벌어졌다. 별로 근거도 없는 정치적 비난 수준에 불과한 말들의 교전(交戰)이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에 진실하게 다가서는 자세는 제대로 갖추지 못해 도리어 질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대통령 노무현과 당선자 이명박 두 사람이 보여준 태도는 간단히 지나칠 일은 아니다. 사건 발생의 책임을 묻자는 것이 아니라 수습의 책임에 필요한 성찰을 떠올려보자는 뜻에서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임기가 마쳐지는 마지막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에 대해 깊이 있는 고뇌의 소회가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사건에 담겨 있는 의미를 심도 있게 짚고, 그 책임을 통감하는 동시에 이런 재앙이 되풀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나름의 희망을 밝히면서 이번 일을 차기 정부 출범 축사의 의미를 담은 메시지로 전환시켜나갈 지혜는 왜 없는 것이었을까? 그랬다면 그 나름으로 품격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모습을 남기고 퇴임하는 기회를 얻지 않았을까?
이명박 당선자의 경우, 지난 2006년 3월 숭례문 개방의 결정을 내리고 누각에 올라가 사진까지 찍은 당사자이다. 잠시, 그 개방을 놓고 논박이 있었지만 문화재 개방 자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당연한 처사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시민들이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깊어져가는 것이며 어떻게 시비를 걸더라도 그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개방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가 나왔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개방을 통해 치적의 성적표가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고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대응한 주도면밀한 방책의 마련에는 소홀한 후과다. 그러면 이런 때에 당선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야 했을까? 가령 이런 것은 어떤가? "당시 숭례문 개방에 환영하는 시민들의 기쁨만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철저하게 따져 준비하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따로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을 두루 살펴, 국정전반의 철학과 발상, 지침에 막중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민들은 이런 일이 생길 때 최고 지도자의 입에서 수습 대책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대하는 국정철학을 듣고 싶은 것이다. 실제적인 현장의 문제는 행정 관료를 비롯해서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이들을 사회적으로 응원할 수 있도록 하며 커다란 맥락 속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대통령의 역할 아닌가?
과실은 챙기고, 책임 져야 할 결과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한다면 이 나라 장래에 희망을 가지기 어렵게 된다.
한미 FTA와 대운하, 그 재앙은 어찌할까?
이번 일이 이토록 국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숭례문의 복원이란 새로운 구조물의 재건축을 의미할 뿐 본래의 역사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은 이미 글렀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복원, 복구하려 해도 본래의 가치를 되찾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문제이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도 숭례문 개방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중한 것을 지켜낼 장치와 방도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법이다. 오늘을 숭례문이지만, 내일은 또 뭐가 될까?
한-미 FTA 협상 조건으로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면서 한국 영화는 투자가 메말라가고 있다. 영화산업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한번 무너지면 그 복구는 엄청난 시간과 인재의 수급이 요구된다. 문화의 능력은 축적되어가는 것이지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문화적 횡포를 노무현 정권은 저지르고 말았다. 이명박 차기 정부는 그 연속선에서 한-미 FTA를 다그치고 있다.
광우병 우려가 있는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는 국민건강과 관련된 사안이다. 한번 훼손되는 국민건강이 어느 대에 이르기까지 문제를 일으킬 지 아무도 모른다. 숭례문과는 달리 이는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삶에 타격을 입힌다.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책임진다고 만일에 발생하게 될지 모를 광우병이 그 순간에 사라지는가?
한-미 FTA로 인한 농촌의 미래는 이미 예고되고 있다. 심화되어갈 사회적 양극화의 비극 역시 경고의 대상이다. 불이 나고 난 뒤에, 누구 책임인가 하고 그제야 토론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대운하 계획은 또 어떤가? 숭례문은 말하자면 유명 인사니까 그래도 이런 대접이나 받지, 한번 삽질하기 시작하면 그 무수한 무명의 매장 문화재를 포함해서 하천의 생태계는 또 어찌하는가? 당장에 한강유역의 풍납토성은 풍비박산이 될 지경이다. 숭례문은 6백년의 역사지만, 풍납토성은 1800년 이상의 역사유적이다. 강줄기가 바뀌면서 생존의 위기에 몰릴 생태계의 현실은 나 몰라라 아랑곳하지 않을 작정인가?
영어교육이 교육의 전부로 착각하는 듯 한 차기 정부의 교육관에서 과연 역사, 문화, 철학의 소중함을 발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발상부재의 정책 사고에서 숭례문 화재에 버금가는 재앙과 상실은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건의 전조이다. 조선조였다면, 숭례문이 불타고 현판이 떨어지는 것을 본 백성들이 나라가 망하나 하고 수근 댈 사건이지 않은가?
위험사회의 문제와 사회적 소통의 단절
사실 문화재 관리란 완벽할 수 없다. 아무리 철통같이 지켜도 세계적 명화나 명품이 도난당하거나 훼손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관련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만으로 이런 일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화유산이 딛고 서 있는 자리의 문제이다.
사회적 불만이 소통의 창구가 없을 때, 극단적 상황에서 그 당사자는 자신의 목숨을 겨냥하거나 공격적 사회 행위로 돌입한다. 사회적 범죄가 되는 것이며 그 피해는 사회 전체가 입게 된다. 이번 일도 다르지 않다. 노숙자들을 범죄자로 모는 논조가 일부 언론에서 한때 있기도 했지만 바로 그런 태도가 사회적 소통이 막힌 절망감을 가중시켜, 이런 사회적 범죄를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가 된다. 노인문제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로 빈곤의 궁지에 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들의 선택은 어디를 향해 갈까? 사회적 소통이 막히면서 그 삶의 곤고함을 풀 방도가 없게 된다면, 무차별 다수에 대한 공격이나 국보급 재산에 대한 분풀이가 또다시 생겨나지 않을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런 일은 범죄이며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그 같은 상황이 생기면 피해는 집단적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러나 다만 사회적 소통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서 봐야 할 사회적 고통, 불만, 절망이 더 중요한 현실이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가 보여준 것처럼 벌써부터 일방주의적으로 밀어붙이기에 몰두할 때 사회적 소통이고 뭐고는 기대하기 어렵고, 사회적 양극화의 현실은 따라서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게 된다.
생존의 절박한 지점에 몰리는 이른바 위험사회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가고 소수의 독점적 안전지대만 확보하는 특권의 정치가 지배할 때 그 사회는 안에서부터 심각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1915년, 우리의 돈의문에 일제에 의해 철거되던 해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는 작품 <라쇼몽(羅生門)>을 발표한다. 이른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시기에 그는 명치유신의 근대적 변혁의 과정에서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을 통해서 증언하고 있다.
그 작품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되고 작가는 그걸 스스로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 어느 날 해 저물 녘의 일이다. 한 미천한 백성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필자는 앞서 "한 미천한 백성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 백성은 비가 그친 다음에도 딱히 뭘 어떻게 하겠다는 작정이 없었다. 평소에 하던 대로라면 당연히 주인집에 돌아가야 할 참이었다. 그러나 사나흘 전에 그 주인에게서 이제 그만 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쿄토는 예삿일이 아닐 만큼 쇠퇴해 있었다. 이 백성이 오랜 세월 일해 왔던 주인에게 그만 오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그 쇠퇴의 작은 여파였다. 그러니 "한 미천한 백성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기보다 "비에 몰린 한 미천한 백성이 갈 곳이 없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
8세기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교토의 중앙에 있는 이 대문은 그 뜻이 여럿 있지만 "그물(羅)에 걸린 인생(生)들이 빠져나가는 문"이라고 해서 불교적 인생관과 함께 희망을 상징해주고 있었으나 정작 그곳에는 노숙자와 도둑이 들끓었고, 갈 곳 없는 한 백성의 처연한 현실이 존재할 뿐이었다. 문은 그럴싸하게 서 있었지만 정작의 출구는 없는 세상에 대한 아픔이 작품 <라쇼몽>에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가 그친다고 그 미천한 백성이 갈 데가 또 있을까?
최근에 나온 최기숙 저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는 조선조 18세기, 이 땅의 성문 밖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을 향해 열린 문은 문만 열렸을 뿐 갈 곳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테의 <신곡>은, 연옥의 문 위에 "이 문을 들어서는 자, 누구든 희망을 버릴 지어다"고 적혀 있음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은 전시 하에서 쫓기는 한 반 나치스 외과의사 라비크를 통해 ,진정 인간에게 승리란 무엇일까 하고 우리에게 묻는다. <문>이란 성찰에 따라, 우리에게 적지 않은 담론을 제공해준다.
높은 가르침에 옷깃을 여미며
숭례문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타버리고 말았으나, 그 이름대로 높은 가르침을 주고 떠났다고 해야 할까?
이 시대가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는 세상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국가의 품격이 바로 서고,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 받들고 인생사의 아픔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그런 세상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위험한 지경에 몰리는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늘어나서, 그물에 걸린 새처럼 되어버리는 신세가 되어서는 아니 되지 않겠는가?
숭례문을 다시 세워도 그 역사적 가치는 본래대로 복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을 다시 세우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정신, 역사 속에 희망의 문을 세울 수는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고, 하나를 통해 열을 배우는 것이 현명한 백성이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 내일 모레로 다가왔다. 부디, 저 숭례문의 꺼지지 않았던 불길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이 후손들에게 온 몸으로 깨우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너나 할 것 없이 성찰한다면, 우린 잃은 것 못지않게 얻게 되는 바가 더욱 클 것이다. 높은 가르침에 옷깃을 여미는 마음에, 새로운 문은 열린다.
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많고, 비가 내려도 마음의 비는 이미 그치며 그 문을 지나면 희망을 만나는 그런 세월, 간절히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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