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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걸릴 줄 알았으면 시작 안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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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0년 이상 걸릴 줄 알았으면 시작 안했을 겁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2/07] '조선왕조실록' 만화로 엮는 박시백 화백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총 1893권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 기록으로 우리나라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기록문화유산, 바로 조선왕조실록인데요. 실록 원전을 바탕으로 한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만화로 엮어내고 있는 박시백 전 한겨레신문 화백이 최근 제11권 광해군 일기를 발간했습니다. 무엇보다 박시백 화백은 역사를 중계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고 말하는데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박시백 화백을 초대해 그가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게 된 계기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사회의 모습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박시백 화백입니다!

박시백 화백은 1964년 제주 출생으로 1984년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면서 총학생회 신문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독학으로 만화를 공부하다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한겨레 신문에 박재동 화백의 뒤를 이어 만평과 그림세상을 연재했습니다. 저서로는 '박시백의 그림세상'이 있고 지난 2001년부터 만화로 그리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집필해 지난달 제11권 광해군 일기를 출간했습니다.

박인규 : 무자년 첫 손님으로 박시백 화백을 모시게 됐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신 지가 올해로 8년째인데요, 11권을 추가하셨어요.

박시백 : 올 초 11권이 나왔는데요 광해군편이 되겠습니다.

박인규 : 전체를 스무 권으로 예상하신다고 했는데 11권이 나왔으면 이제 반환점을 돌았어요.

박시백 : 그렇죠. 반환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인데 사실 그동안엔 과연 이걸 제가 끝까지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상당히 걱정도 되고 스스로 의문점도 생겼는데 10권 11권이 나오게 되면서부터는 그래도 좀 완간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자신감이 좀 생깁니다.

박인규 : 완주에 자신감이 붙은 거군요. 2001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셨어요. 그 당시 한겨레신문사의 화백이셨는데요. 어떤 생각이 들어서 신문사 화백 자리도 때려치우고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겁니까?

박시백 : 단순한 계기라고 한다면, 그 당시 제가 조선왕조를 다룬 사극들을 보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배경지식이 제가 너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좀 관련한 책들을 좀 봐야겠다 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게 저한테 재밌더라구요. 삼국지를 읽는 것처럼 조선 사회를 만들어갔던 사람들의 이합집산이라든가 권력투쟁이나 이런 것들이 시사만화가여서 그런지 굉장히 재밌게 느껴졌고 어느샌가 이걸 만화로 작업하면 어떻겠는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한겨레신문에서 작업하고 있던 시사만화 작업 자체가 그때즘 굉장히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겹치면서 그럼 진짜 이걸로 한 번 남은 만화가 인생에 승부를 걸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박인규 : 사실 시사만화는 하루하루가 마감 아닙니까. 마감하는 것이 어떤 스트레스 전문 학자 말씀으로는 수명에도 안 좋다는데, 조선왕조실록은 500년이 넘어요. 하루하루 마감을 하시다가 500년짜리를 그려야겠다, 쉽지 않은 건데.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하면 과연 작품이 될 것인가. 또 현실적으로, 이게 팔릴 것인가, 그런 걱정도 하셨을 것 같은데...

박시백 : 제가 일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시작하면 굉장히 잘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아직 도전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고, 오히려 염려했던 것이 제가 늑장을 부리다가 다른 사람이 시작해버리면 어떻게 되나. 그런 걱정이 될 정도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작하고 나니 예상했던 대로 잘 풀리진 않더라구요.

박인규 :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다고, 첫 권 나오기까지 2년 걸렸다고 들었습니다만

박시백 : 예. 아무래도 제가 조선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을 뿐더러 특히나 복식이나 건축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평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고. 또 이것을 머릿속에선 대충 어떻게 끌고 가야지 생각이 있었는데 시안을 만들어 보니 또 맘에 안 들고, 다시 작업해 보고 이런 과정이 한 2년 걸렸던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어쨌든 총 20권 이상 중에서 11권이 나왔으니까 사실 뭐 이제는,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고 틀이 잡혔기 때문에 앞으로는 쉬울 것 같아요. 언제까지 완간할 생각이십니까?

박시백 : 2011년 정도로 잡고 있는데요 건강상의 문제가 안 생긴다거나 이런 조건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나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2001년부터 2011년까지. 21세기의 벽두 10년을 완전히 조선왕조실록에 바치셨군요. 보니까 11권 중에 별권으로 인물사전도 있더라구요.

박시백 : 이건 10권을 작업하면서, 10권이 나오게 되니까 말 그대로 절반인데.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그냥 드리기에는 좀 섭섭한 것 같고, 인물사전을 생각했었는데 전반적인 방향과 감수는 제가 했고 실제 집필은 저희 편집자 분께서 작업을 해주셨습니다.

박인규 : 조선왕조실록은 제가 앞에도 소개해 드렸지만 국보 151호고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데, 굉장히 방대하죠. 그동안 만화작업을 위해서 조선왕조실록을 많이 읽어보셨을 것 같은데 어떤 특징, 장점, 어떤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박시백 : 하여튼 보면 볼수록 정말 위대한 역사기록물이란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조선왕조실록도 다른 모든 역사기록물들이 다 그러하듯이 작성한 사관의 주관이 상당히 개입돼 있고 또한 보통 우리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조선왕조실록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당파투쟁이 격화되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승리한 당파의 시각이 고스란히 개입되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이 여타 역사기록물과 대별되는 장점이자 유일한 점이라면, 일단 기록 자체의 풍부함과 아주 정밀함에 있다고 봅니다.

왕과 신하들과의 관계, 주변에서 이뤄지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이 그야 말로 우리가 TV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는 부분이 많고, 그 외에도 어디에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셋이었더라, 내지는 어디 지진이 있었다. 또 어디에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런 것까지 전부 기록된 굉장히 풍부한 기록이다. 이것이 첫 번째구요. 또 한 가지는 잘 아시겠지만 조선왕조실록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처음의 사관들이 작성한 걸 사초라고 부릅니다. 이 사초를 당시 나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이 볼 수 없게 시스템화했다는 거죠. 만약 왕이 자기에 대한 기록을 본다면 사관들이 아무래도 소신껏 기록하기 어려웠겠죠. 그러나 이걸 제도적으로 못하게 했 을 뿐더러 간간이 왕들이 자기가 권력자고 하니까 보고 싶어서 갖고 오라고 명을 내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올바른 역사기록이 안 된다는 점을 설득하고 주장하면서 끝내 왕이 보지 못하게 하는 원칙을 지켜나간 것.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을 위대하게 만든 요인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으로 기록의 풍부함과 정밀함과 객관성을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만 열심히 봐도 조선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광해군까지, 적어도 중기까지 보셨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열심히 보시면서 느낀 조선사회의 모습은 어떤 거였습니까?

박시백 : 제가 정치사 위주로 보게 되니까 아무래도 그쪽에 관심이 집중되는데요. 조선의 정치 자체는 요즘의 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사대부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잖아요. 그런 전제를 갖고 출발해서 본다면 굉장히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면들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인규 : 적어도 정치에 참여한 그룹 안에서는

박시백 : 가령 우리나라 현대 모습만 보더라도 대통령에 대한 비판들이 자연스럽게 누구나 할 수 있게 되고 이런 것들이 그렇게 오래지 않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초기 건국에서부터 망하는 그날까지 언론 역할을 담당했던 언론 3사라고 해야 되는 사관원, 사헌부, 홍문관 이런 데의 관원들만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었던 승정원 비서들, 그리고 정승들 심지어 저 지방에 있는 유생들 누구나가 자기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서 발언하고 왕을 비판할 수 있었거든요. 이런 권력에 대한 견제가 오히려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견제시스템이 잘 마련돼 있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고. 또 그만큼 어떤 하나의 사안에 대한 결정이 왕의 독단으로 되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물론 태종이나 세조, 연산군이라든가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던 시절에는 아무래도 왕의 말이 곧 법이 됐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선 중요한 안건들은 끝없이 토론을 거치고 이 토론을 통해 공론이 모아졌을 때 통과되는 구조였거든요. 이게 지금 바라봐도 참 놀라울 정도의 장점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또한 그 시대에 너무나 모든 것들이 토론과 의견수렴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이런 것 자체가 좀 위기상황이라든가 이럴 때는 굉장히 비효율을 낳는 점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런 때는 빨리 결정해서 대응해야 하는데 논의만 하고 있는 모습들도 보이긴 하죠.

박인규 : 좋은 토론문화일 수도 있고, 강력한 리더십을 나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그런 측면이 있네요. 역사 하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한 7권까지 읽어봤는데 우선 굉장히 재밌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까지 어떤 원칙으로 만화작업을 하셨는지요.

박시백 : 원칙이라면 제가 이 작업을 처음 진행하면서 보니까 그 이전에 조선 사회에 대한 이런저런 단행본들을 공부하고 그래서 시작했는데, 사전지식으로 공부했던 것들이, 실록을 보면서... 어, 이건 아닌데, 그런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상당히 야사에 편중된 글들이 많았고

박인규 : 우리가 알고 있던 거싱 실록을 보니까 아니더라

박시백 : 예. 그런 것도 많았고 또한 해석이 이건 좀 오버한 해석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많이 찾게 됐는데. 제가 주안점을 둔 것은 우선 사실 자체에 대한 기록에 충실하자. 이것이 첫 번째 주안점이었고. 또 한 가지는 저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개입하되 이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실록에 충분히 근거를 두고 해석한다라고 하는, 이것이 초점을 둔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모든 사실들은 진짜 논픽션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네요.

박시백 : 100%는 아니지만 90% 정도는 그렇게 봐도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인규 : 실록이라고 하더라도,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고. 그런 면에선 실록에 있는 기록이 그 당시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전달한다고 볼 수 있겠느냐. 이런 반론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시백 :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실록의 위대함을 얘기하면서 기록의 풍부함과 정밀함을 말씀드렸는데, 실록에 여러 가지 유형의 기사들이 있습니다. 우선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생중계하듯이, 속기록을 작성하듯이 고스란히 옮겨놓은 기록들이 있고. 또 그런 사건들을 사관이 쭉 종합해서 쓴 해설기사 같은 기사들이 있고. 또 사관의 자기 주관이 강력히 개입되는 논평, 이런 글들도 있거든요. 이런 각각의 것들을 어떻게 보느냐 어떤 것에 무게를 두고 당시 정황을 고려해서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지만, 진실의 접근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제가 해석한 것이 진실이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보다 더 연구하고 들어간다면 충분히 진실의 접근이 가능한 사실들, 팩트들이 기록돼 있다고 하는 점이죠.

박인규 : 실록에 있는 사실을 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나름대로 비판적인 안목으로 봤다, 그렇게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한 인터뷰에서는, 지금 8년째 하고 계신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다면 손도 안 댔을 것이다, 약간 후회의 발언도 하신 것 같은데, 그동안 병원도 가시고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박시백 : 한 마디로 예측을 잘 못했던 거죠. 처음 시작할 때는 한 권당 한 3개월, 길게 잡으면 4개월 정도 해서 빠르면 5년이고 늦어도 7년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늦게 잡은 7년 동안 반밖에 못하지 않았습니까? 애초 이게 한 10년 이상 걸릴 작업이다, 이랬으면 아마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박인규 : 만화작업을 유명만화가랄까 이런 분들은 분업을 해서 큰 틀은 만화가가 그리고 밑그림이나 이런 것들은은 제자 시킨다는데 박화백은 직접 다 그리셨다고요

▲ ⓒ프레시안

박시백 :
네. 일단 성격 자체가 이것이 공부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지 않습니까. 공부를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공부를 해야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 공부하고 스토리를 구성하는 게 전체로 보면 반 정도가 소요되거든요. 이건 그야 말로 저 혼자만의 일이고. 그런 다음에야 그림 작업에 들어가는데 그림에서도 만약 누굴 고용해서 한다 하더라도 배경이라든가 컬러라든가, 이런 몇몇 파트만 맡길 수 있는 것들이지, 다 제성격상 문제기도 하겠지만 다 맡기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혼자 하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고 하다 보니까 편한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저희 기자들끼리 하는 얘기지만, 기사를 쓰는데 취재가 80%고 쓰는 건 20%다, 하는데 실제로 그림그리는 건 많이 걸리는 게 아니죠. 그리기까지의 구상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까 말씀하시면서 조선시대 복식이나 건축양식, 이건 그림으로 보여야 되니까, 그걸 잘 몰라서 어려움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과 함께. 예를 들어 이성계, 태종, 세종 이런 그림을 그리시려면 얼굴을 마음대로 그릴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나름대로 근거랄까 그게 있을 텐데 얼굴들은 어떻게 그리셨어요?

박시백 : 말씀하신 대로 초상화가 전해지는 경우가 썩 많지 않습니다. 태조 같은 경우는 있으니까 노인장의 얼굴이잖아요? 그걸 기초로 해서 젊었을 땐 어떤 모습일까, 이런 골격에서 어떤 모습이 나올까. 그리고 주인공이니까 폼도 나야 되고 무장으로서의 카리스마 이런 게 느껴지는 디자인이 돼야 되잖아요. 그렇게 접근했고, 대부분의 경우 말씀하신 대로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으니까 실록에서 한 줄이라도 얼굴이나 신체에 대한 묘사가 있는 경우 그걸 참고합니다. 가령 세종대왕의 경우 비중했다고 표현되거든요. 살이 찌고 몸이 무거웠다. 덩치가 있는. 이것에 기반하고, 또 우리가 만원짜리에 나와 있는 세종대왕의 초상화는 현대에 그려진 거잖아요.

이걸 전적으로 따를 수 없지만 그래도 세종대왕 하면 이 얼굴이다 하는 게 있으니까 아주 무시하기도 그렇더라구요. 그런 골격을 많이 살리되 저는 세종대왕이 갖고 있는 영민함, 뚝심 이런 걸 얼굴에 넣고 싶었어요. 분위기를 좀 더 만원짜리 초상화보다는 더 강단진 이런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그런 기록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죠. 그런 건 아무래도 인물에 대해서 제가 느끼는 이미지를 위주로 작업할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면 세종편에 보면 허조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박인규 : 상당히 원칙적이고 보수적인

박시백 : 아시네요. 그 분을 정치인 조순형 의원의 얼굴을 좀 차용했습니다.

박인규 : 민주당 조순형 의원이요? 미스터 쓴소리

박시백 : 네. 왜냐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꼬장꼬장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에서 느낌이, 이런 얼굴이면 어떨까 해서 사용을 했는데. 이런 식의 접근도 하고. 곽재우 같은 경우는 문인이지만 무장 같은 강개함이 느껴지는 인상으로 접근하려고 했고.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합니다.

박인규 : 태종 이방원 같은 경우는 왕자의 난도 일으켜서 굉장히 건장할 줄 알았더니, 만화에는 작게... 원래 체구가 작으셨나보죠?

박시백 : 이건 태종의 발언을 통해서 기록에 잠깐 나오는데요, 아들 양녕대군, 세자를 평하면서 자기보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건장해서 정말 제왕의 상이다. 그에 비하면 자기는 군왕의 얼굴이 아니다, 이런 묘사가 나오는데 이 기록을 참고하면서 또한 말씀하신 대로 권력을 위해서라면 형제도 거침없이 칠 수 있는 비정함. 이런 걸 좀 담고 싶었죠.

박인규 : 김종서 같은 경우는 북방을 개척했다고 해서 많은 분들이 무장의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실제로 만화를 보니까 유학자 출신이고 굉장히 왜소했다고 나오더라구요.

박시백 : 이건 실제 기록에 그렇게 나오고. 또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이에요. 고려사도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편찬을 주도했고. 세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서를 등용한 건, 북방개척이라는 일 자체가 야인들, 여진인들과 끊임없이 상대해야 되고 때론 힘으로 제압하고 때론 또 다독거려야 되고. 이런 무인적인 강단과 문인적인 포용력을 같이 요구하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세종이 김종서를 픽업하거든요. 실제 체구가 아주 작았습니다.

박인규 :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기록으로만 막연하게, 혹은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조선시대의 사실을 그림, 만화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그려내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산군 같은 경우는 얼굴 한쪽에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나오던데 어떤 의미입니까?

박시백 : 연산군을 보시고 제가 그린 캐릭터 중 제일 맘에 든다는 소릴 많이 들었는데. 연산군에 대해선 야사에 아마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해요. 키가 크고 턱이 좀 길고 되게 마른 체형이었다. 이런 걸 당시에 봤던 분이 자기 개인 문집에 남겨놓은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다가 실록에서는 보면 세자 때부터 얼굴에 자꾸 종기가 나요. 종기가 한 번 나면 또 다시 나고.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표현될 정도로 자주 나는데. 이후 연산군의 이미지가 폭군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량한 이미지를 풍기면서 종기를

박인규 : 연산군은 피부가 안 좋았군요. 만화를 보니까, 아까 복식도 말씀하셨는데 사모라고 합니까? 양반들이 머리에 쓰는 뒤에 뿔 같은 게 나온 게 있는데 초창기에는 한자로 팔자 모양이었다가 나중에 일자로 바뀌는데 그것도 실록에 나오는 대로 고치신 겁니까?

박시백 : 그렇죠. 고려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팔자였는데, 실록에서 본 기억은 없고. 아, 실록에서 봤던 것 같긴 한데, 쭉 전해져 오는 영정들이 있는데 조선 초기 영정들이 보면 다 팔자 모양을 띠고 있고, 언젠가부터 일자형 사모가 등장하기 시작하더라구요. 그 시점을 적절하게 설정해서 사모를 바꿨습니다.

박인규 : 나름대로 고증에 많이 신경쓰신 셈인데, 그래도 건축양식이나 복식이 좀 틀렸다, 이런 지적도 들어온다고요.

박시백 : 그렇죠. 사실 어떻게 보면 되게 미흡하다고 할 수 있거든요. 처음 작업을 시작하면서 1권 작업할 때 2년 걸렸다고 했는데, 그 2년 기간도 시안 잡고 하는데 시간이 가면서 사실 고증 이런 것을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스스로 마음이 쫓기는 게, 이러다가 과연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 좀 부족하더라도 시작부터 하자,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고 그래서 고려말 조선 초기에 이를테면 무장이나 지방 수령들의 관복을 조선 후기에 입었던 복장으로 그렸거든요. 이걸 어느 독자분이 지적해 오시면서 관련된 사진자료까지 많이 보내주셔서 그 이후에 고치고. 아직 그 앞에 것은 그냥 뒀습니다.

박인규 : 아직도 조선왕조실록 만화는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개정을 많이 해야겠네요.

박시백 : 그렇죠.

박인규 : 흥겨운 우리가락 한 곡 들으시겠습니다. 강권순이 부릅니다. 강원도 아리랑
* 강권순 - 강원도 아리랑

조선왕조실록을 열심히 보시다 보니까 우리가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중 많은 부분이 야사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대표적인 게 양녕대군 같은데,양녕대군이 동생 충녕대군이 워낙 똑똑한 걸 알아서 일부러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게 아니라면서요?

박시백 : 아니죠. 요즘에 사극으로 세종대왕편을 다룬 사극도 나오고 있는데 저도보질 않아서 거기거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양녕대군은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는 괜찮았나봐요. 외모도 출중하고, 태종도 상당히 기대를 가졌는데 사냥에 빠지고 여색을 알게 되면서 이때부터는 지적을 받으면 반성했다가도 유혹을 떨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사건을 치거든요. 그런데 태종이 생각보다 굉장히 오랫동안 다시 기회를 주고 다시 기회를 주거든요. 이 와중에 도저히 고쳐지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조정 내외에서 양녕과 대비되는 충녕대군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르게 되거든요. 또 재밌는 것은 충녕대군도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왕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양녕대군한테 직접 면전에서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또 양녕과 신하들이 두루 있는 자리에서 자기를 어필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고. 사실 이런 것들이 형제니까 괜찮은 차원이 아니고 왕조시대엔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거든요.

▲ ⓒ프레시안

박인규 :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박시백 : 그렇죠. 양녕대군이 무사히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면 양녕은 살려준다고 해도 측근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거든요. 그런 행동을 봤을 때 충녕 역시도 왕권에 대해서 나름대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저는 판단하고. 또한 양녕 또한 이런 충녕의 모습에 대해서 경계심을 많이 드러냅니다. 태종 앞에서, 충녕은 똑똑한지 모르지만 무인적 기상이 없다든가, 이런 식의 비판을 하기도 하고. 또 직접 충녕에 대해서 대놓고 얘기하기도 하거든요. 이런 것으로 봤을 때 태종의 뜻이 충녕에 있으니까 일부러 미친 척했다는 야사의 얘기는 뒤에 호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얘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인규 : 박시백 화백의 만화를 보니까 태종 같은 경우 형제 간의 무력싸움을 통해서 왕이 됐는데 충녕과 양녕도 총칼만 안 들었지 막후에서 왕위를 둘러산 경쟁이랄까, 전쟁을 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박시백 : 전쟁까진 아니어도 경쟁은 분명히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아요

박인규 : 또 하나는, 신숙주 부인이... 사육신은 단종, 문종을 위해서 죽었는데 신숙주는 살아남아서, 숙주나물이란 이름도그래서 나왔단 얘기도 있지만, 부인이 남편의 변절을 꾸짖고 자살했다.그것도 사실은 아니라면서요?

박시백 : 사실이 아니고요. 지금 제가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그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 신숙주가 명나라에 서한사로 갔다가 서한사로 간 도중에 부인이 죽어서 돌아오고 나니까, 세조가 신숙주한테 이렇게 돼서 참 안됐다고 위로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박인규 : 부인은 이전에 죽었다. 또, 한양 수도. 한양 천도에서도 왕십리 답십리 이런 말도 나옵니다만 무학대사가 정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고요.

박시백 : 네. 무학대사가 관여하는 것은 워낙에, 태조는 워낙 천도를 강력하게 희망했습니다. 왜냐면 고려 수도인 개경에서 자기가 왕씨들을 무참하게 제거했기 때문에 빨리 개경을 뜨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바로 측근들, 이를테면 정도전 같은 사람들은 천도를 별로 찬성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새롭게 새 왕조가 건설된 마당에 민심을 사야 되는데 천도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토목공사를 일으켜야 되고, 개경의 수많은 사람들이 옮겨가야 되고. 그래서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의사를 계속 피력하는데요, 태조는 하루라도 빨리 천도하고 싶은 마음에서, 처음에 무학대사의 권유에 따라서 계룡산자락에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죠. 이걸 지켜보다가, 당시 경기관찰사로 있었던 것 같은데, 하륜이 현장을 들여다보고는, 또 문제는 하륜 이 양반이 풍수, 음양에 되게 능통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바로 상소를 올리는데 이건 수도할 자리가 아니라는 상소를 올리고, 서운관 관리들과 의논해 보니까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재검토에 들어가죠. 그때 하륜이 추천한 데가 무악이라고 지금 신촌 일대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무악으로 도읍지를 옮기기 위해서 사전답사를 떠납니다. 태조와 주요 대신들과 풍수를 담당하는 서운관 관리들이 함께 무악을 답사하는데 여기선 정도전이 강력하게 반대를 해요. 땅이 좁고 해서 제왕의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 다음날 이동을 하는데, 경복궁 자리는 고려시대에도 숙종 때인가서부터 여러 번 천도 후보지로 거론돼서 기초공사가 아마 돼 있었나봐요. 거기를 보고는 태조가 여기는 어떠냐, 물어보거든요. 그래서 정도전이 개경보다는 못하지만 무악보단 낫다. 굳이 해야 한다면 여기가 좋은 것 같다, 동의해서 다른 신하들도 동의하면서 한양 천도를 하게 되죠

박인규 : 그렇다면 무학대사는 한양 천도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안 한 겁니까?

박시백 : 동행했고 태조가 난 여기가 맘에 든다는 의사표현을 했을 때 혼자 결정하지 말고 대신들과 의논해 보시죠, 이렇게 권유하죠.

박인규 : 우리가 양녕대군의 경우, 신숙주 부인의 경우, 한양 천도 이런 식으로 민간에서 알고 있는 상식과 실제 역사기록에 차이가 있는 건 왜 그럴까요? 우리 역사기록에 문제가 있나요?

박시백 : 추측인데요, 조선 후기에 넘어오면 실제 야사들도 거의 실록의 기록과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어쩌면 실록의 기록을 보충해 주는 성격으로서 상당히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박인규 : 적어도 후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

박시백 : 네. 그런데 전기엔 당대에 기록된 자료들이 많지 않고, 사건이 지나고 100년 200년 지난 다음에 이후에 채록되거나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돼서 아무래도 윤색이 많이 되지 않았나. 그래서 전기의 야사들은 어찌 보면 사료보다 상당히 문학성이 있는 기록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박인규 : 네. 오늘 말씀은 여기서 끊고 내일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는 박시백 화백을 초대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사회의 모습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내일도 박시백 화백과 함께하겠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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