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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대가 오면 그 시대를 또 살아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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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낯선 시대가 오면 그 시대를 또 살아가야지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1/25] 등단 50주년 맞은 고은 시인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꼽히며 한국 문학의 대표 주자, 바로 고은 시인인데요 올해 고은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맞았습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서온 고은 시인은 민족, 민중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그의 시는 스웨덴을 비롯한 해외 각지에서도 번역돼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고은이라는 이름은 유럽의 세계문학전집과 세계 시인전집 목록에도 올라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등단 50주년을 맞는 고 은 시인과 함께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고 은 시인입니다. 고 은 시인은 1933년 군산 출생으로 58년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해 시, 수필, 평론을 넘나들며 140여권의 저서를 냈습니다. 또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해.. 1987년 6월 항쟁 중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을 지냈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됐습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조국의 별> <전원시편> <아침이슬> <백두산> <만인보> 등이 있고.. 고 은 시인의 시는 스웨덴 등 전 세계 십 수개 나라에서 역 출판돼 호평을 받았으며, 국문학상과 만해문학상, 은관문화훈장과 시키다상, 그리핀 시인상 평생공로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박인규 : 우선 축하드립니다. 연말 연초에 많은 언론에서 고은 시인께서 문인으로 등단하신 지 올해로 50주년이라는 인터뷰를 한 걸 봤는데요, 어떠십니까 50주년을 맞는 소회가?

▲ ⓒ프레시안

고은 :
한국 근대시가 공교롭게도 올해에 100주년에 해당되는 해입니다. 아마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가 세상에 발표되는 걸 출발점으로 한다면 100년이죠. 이런 100년의 절반인 50년을 나는 한국시 100년 속에서 살아온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많은 시인이 아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인들과 함께 나 역시 한국 시사 속에서의 한 시인으로서의 일정한 감회가 있지요.

박인규 : 현재 우리가 고은 시인이 계시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실에 와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어떤 일을 주로 하고 계십니까?

고은 : 지금 여기 앉아계신 것처럼, 우리 민족이 그동안 사용해온 모국어, 겨레말을 그동안 우리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되면 언어가 서로 달라지는, 말의 위기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 위기를 극복해서 하나의 언어로 결집해야 되겠다는 과제가 주어졌죠. 그래서 남과 북이 함께 만나서 하나의 모국어사전을 만들자 하는 제안에 서로 합의해서 이 일을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 편찬의 법을 통과시켜 줘서 거의 만장일치에 버금가게 통과해서 말하자면 북쪽과의 사업을 우리 국회가 이렇게까지 승인해준 유일한 예가 되죠. 그런데 이것과 함께 우리는 근대사 100년을 전후해서 우리말이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연해주에 가 있는 우리 동포라든지 스탈린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에 가 있는 우리말도 있고 일본이나 미주에 건너가 있는 것도 있고, 이런 흩어져 있는 말이 거기서 그 나름대로 뭘 또 새로 발생하는 수도 있고 파생된 것도 있고 해서 이런 걸 이번에 함께 다 아울러서 한 번 대 민족의 언어사전을 결집해보자 하는 이런 뜻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남과 북의 우리말뿐만 아니라 러시아라든가 미국, 중국에 계신 동포의 말까지 다 하나로 합친다. 말씀 듣고 보니 굉장히 큰 사업인데, 사실 죄송스럽습니다만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사업회라고 해서 사무실이 좀 작은 줄 알았습니다. 와봤더니 굉장히 크네요. 굉장히 큰 사업이란 생각이 들고, 일단 굉장히 큰 사업인 만큼 사전은 언제 나오게 됩니까?

고은 : 사전은 몇 사람이 어휘 몇 개 모아서 뭘 바로 벼락이 치듯이 만들 순 없는 것이고. 사전이야 말로 오랜 시간이 거기에 고민이 투여돼야 되는데 아마 최소한으로 잡아서 7년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전은 사실 영원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완성돼 있는 사전이란 건 이 세계에 하나도 없고, 늘 언어는 변하고 하면 수록해야 되고 없어지는 건 정리해야 되고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사전은 늘 현재진행을 시켜야 되는 거죠. 하지만 이건 일단 7년 안에 하나의 물건으로서 우리 민족의 제전에 바치는 일로 하면 그 다음엔 고치고 변화시키는 일도 다음 사업으로 누군가가 또 하겠죠.

박인규 : 일단 첫 작품은 제가 알기론 2013년이라던데, 기대를 해보겠습니다.
고은 선생님이 시인으로 등단할 때의 얘기 좀 해보죠. 58년도에 미당 서정주 선생 추천으로 현대문학이란 잡지에서 '봄밤의 말씀'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신 걸로 돼 있습니다.

고은 : 그게 이렇습니다. 조금 정정, 보태야 될 게 있는데요. 그 해에 나는 현대문학에 앞서서... 한국시인협회가 전쟁 후에 최초로 설립됐습니다. 그때는 한국시인협회가 다른 문학인과 함께 그냥 끼여 있었는데 독립해서 시인협회가 최초로 만들어졌죠. 그게 아마 조지훈 시인이 초대 회장을 했죠. 1957년 아마 후반기에 발족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기관지를 창간호를 내는 거예요. 현대시라는 걸. 난 그것을 몰랐는데 내 친구가 내 시를 갖고 있다가 거기다 보냈어요. 그래서 '폐결핵'이라고 하는 시인데 그 시가 신인작품이라는 걸로 거기 나왔습니다. 나는 몰랐죠. 나중에 알았죠. 그리고 나서 내가 서울에 와 있을 때 어떤 인연으로 서정주 시인에게 연결이 돼서 내 또 다른 시 3편이 한꺼번에 추천이 됐어요. 1958년에 그렇게 복수로 문단에 나온 셈이죠.

박인규 : 말하자면 시인으로서 처녀작은 폐결핵이란 작품이고. 문단에 계신 분의 평가를 들어보니까 우리 시의 거목이라고 할까요? 서정주 선생, 김수영 시인 이렇게 꼽는데 그 두 분이, 많은 분들이 스타일이나 성향이 다른 걸로 보고 계시잖아요. 두 분으로부터 인정받은 유일한 시인이다, 그런 평가를 하던데...

고은 : 그건 뭐, 앞서 있는 시인들이 뒤에 오는 시인을 사랑하는 건 언제나 어느 세대나 있는 법이죠. 그런 것 중 하납니다. 하지만 나는 두 시인과는 또 다른 나 자신의 세계가 따로 조직돼 있다, 이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시는 분명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틀림없지만 또한 어떤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문학은 그런 점에서 교사가 필요 없는 것이죠. 자기가 최초로 시를 쓴다고 하는 그런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될 때 한 시대의 독자적인 세계가 다른 세계와 이어져서 시의 역사를 이룬 것이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박인규 : 선생님의 첫 시집이 1960년도에 나온 '피안감성'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 그 전의 또 시집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고은 : 그 전에 시집 하나가 있었는데 '불나비'라는 시집 제목도 있고. 그땐 잡지들에 예고도 나갔습니다. 출간한다는 광고도 나오고 그랬는데, 그게 한 60편 70편 정도 되는데 그게 인쇄소... 종로구 와룡동이라는 데에 인쇄소가 있는데 그곳이 불이 났어요. 그때는 원고를 미리 하나 써두지도 않고 그냥 거기다 맡긴 거 그냥 다 없어지고. 한두 개 남은 게 있는데 그게 나중에 간추려진 건데, 시집 하나가 없어진 셈이죠. 그리고 나서 피안감성 이건 사실 두 번째 시집이지만 그렇게 되죠.

▲ ⓒ프레시안

박인규 :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로는 고은 선생님께서 시를 쓰겠다고 결심한 게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를 보고 생각하셨다고 알려졌는데 맞는 얘깁니까?

고은 : 본래는 내가 해방 직후 최초로 우리 한글로 된 교과서를 중학교 들어가서 만났습니다. 그 전엔 시가 뭔지도 몰랐죠. 물론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 한자로 된 시경이라든지 이런 거 몇 편이야 만났지만 그냥 그때 어릴 때 본 거지 시란 게 이런 거다 하는 걸 내가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해방돼서 최초로 교과서에서

박인규 : 한글로 된 것

고은 : 네. 그게 바로 이육사 시인의 '광야'였습니다.

박인규 : 저희도 배웠습니다.

고은 : 그래서 이런 것이 시구나, 최초로 실감하게 됐는데 거기에는 아주 커다란 세계가 펼쳐집니다. 광야라는 것은 이런 좁은 공간이 아니라 탁 트인 아주 광활한 거대한 공간 아닙니까. 거기에 또 천고라고 하는 아주 거대한 시간이 있죠. 천 단위의, 천만 년의 시간을 천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시간이 거기 있고. 또 하얀 말을 타고 나타난 초인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보통 인간이 아니라 커다란 규모의 인간. 이것이 나중에 니체의 초인사상과 연결되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이렇게 커다란 세계, 시간, 커다란 공간, 커다란 인간이 말하자면 약동하는 세계입니다. 이걸 최초로 어린 소년이 만났을 때의 그 벅찬 감격, 그리고 또 이전의 식민지시대에 일본말로 공부하다가 최초로 우리 모국어로 된 시세계와 만났다는 것. 그래서 가슴이 아주 벅찼죠.

그러나 내가 이런 시인이 되겠다는 꿈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쯤에 이제, 나는 화가를 지망해서 미술부에서 방과 후 그림그리다가 집에 돌아오면 해가 지죠. 아주 컴컴한 돌아오는 길에, 한하운 시초라는 시집을 거기서 습득한 겁니다. 아까 말씀하신 보리피리 이전의 시집이죠. 이걸 보니까 이건 나병환자, 문둥병에 걸린 사람의 시에요. 그래서 이걸 밤새 읽고 들어가서 결심을 했습니다. 울면서 나도 이런 문둥병에 걸릴 거다. 그래서 천국을 떠들면서 발가락이 하나씩 떨어져나가고 눈썹이 빠지고 이래요. 시 보면. 아, 나도 이런 처절한 비극 속에 있어야 될 것, 이것을 결심하고 또 가능하다면 나도 이 분처럼 떠도는 시를 써야 될 것. 이걸 결심했죠.

그런 결심이 있은 다음에 전쟁이 나버렸습니다. 전쟁이 나니까 시인 될 생각, 한하운 세계 이런 것도 다 어디로 날아갔어요. 왜냐면 서로 형제처럼 지내던 오랜 공동체사회가 다 파괴됐고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서로 적이 되고 서로 죽이고. 피를 내가 봤습니다. 이런 전쟁의 비극을 통해서 아무 것도 문학에 남겨진 것이 없죠. 꿈이라는 게. 폐허에서 하나의 고아로 있다가 떠돌면서 다시 시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왔죠. 그래서 그게 아마 1950년대 후반 이런 때에, 어느덧 내가 시인이 돼버렸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겠네요.

박인규 : 전쟁 후에는 선생님이 승려생활을 하시면서 전국을 돌아다니시기도 했고 1950년대라는 책을 통해서 그 당시의 분위기를 알리시기도 하셨는데, 최근에 인터뷰에서도 스스로를 고아시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어떤 그런 전쟁의 충격에 따른 허무랄까, 그런 것들이 선생님이 시작을 시작하시는데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나보죠?

고은 : 물론입니다. 내 문학의 고향은 폐허입니다. 전쟁이 나서 지금 이런 건물이 그때는 하나도 있는 게 아니고, 아마 서울에도 명동 카톨릭성당이 있죠. 그거하고, 총 맞은 중앙청 건물이 있었고, 또 화신건물 몇 개 있었지 거의 잿더미가 많이 돼 있었죠. 북쪽 역시 폐허가 되고, 융단폭격에 의해서 옛날 건물 서너 개밖에 남지 않은 폐허였고, 우리 한반도 전체가 폐허였다고 말할 수 있죠. 이런 데서 모든 과거는 다 소멸돼 버리고 또 미래는 아직 아무 것도 오는 것이 없고, 이런 폐허의 제로상태, 거기서 시가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박인규 : 정확한 표현인지를 모릅니다만 60년대까지 선생님의 시는 약간 허무주의적이랄까 그런 성향이 있었다면 70년대 이후로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시고, 참여시라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말씀하신 걸 보니까 전태일 열사의 분신, 저희들도 학교 다니면서 조영래 변호사라든가 장기표씨 같은 분들이 전태일씨의 분신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말씀을 하시던데 선생님도 굉장히 큰 충격을 받으셨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고은 : 허무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슨 세기말의 서구 니힐리즘 이런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랜 동양에 있어왔던 노장사상에 있는 무위라든지 불교의 무의 세계라든지, 이런 것과도 사실은 닿지 않은 상탭니다. 폐허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무니까 아마 그런 데서 당연히 인간의 내면에도 그런 폐허가 자리잡아서 그게 허무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고 볼 수가 있죠. 그러니까 내 시대가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허무라고 하는 건.

박인규 :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은 : 네. 그런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질 리가 없고 하나의 상처처럼 남아있다가 한 10년쯤 지나면서 치유되거나 다른 걸로 변화하거나 이렇게 된 상태였죠. 그러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죽음, 폐허, 허무, 이런 것에 늘 강박돼있는 상태였습니다. 승려생활을 10년 동안 하는 동안 어느 정도 치유는 됐다고 하지만 흔적은 남아있는 상태로 유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한 노동자의 비극, 분신자결하는 것을 봤습니다. 신문에서 보고, 이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 나 같은 이런 죽음과 어떻게 이것이 대비되는 건가 자연스럽게 견주어졌죠. 그러면서 그 분신사건을 좀 더 다가가 보니까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모순, 또 시대의 현실, 이런 게 보여요. 그러면서 그 죽음이 나를 현실로 끌고 간 거죠. 너는 이런 세계가 아직 네게 없으니까 네가 이런 세계를 너의 세계로 가져라. 이런 아마, 어떤 강력한 힘을 그 죽음이 나에게 줬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아까 장기표씨 조영래씨 이런 사람 얘길 했지만 그 당시대학생들이나 많은 시인들이 그 죽음에서 영향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도 그 중 하나였죠.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어떤 의식이 생기고, 그러면서 사회에 대한 발언도 하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20년 이상 그렇게 몸담고 왔었죠.

박인규 : 아까 말씀하시면서 시는 역사 속에서 쓰여져야 되지만 또 역사를 벗어나는 것... 역사 속에서 쓰여진다는 건 어떻게 보면 그때 시작되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고은 : 나는 지금쯤은 아마 그 두 가지가 다 하나의 물줄기가 돼서 또 다른 세계를 지금 지내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물론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이건 어떤 시대의 것, 이건 어떤 시대의 것이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좀 규제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 편의상 자기를 몇 개의 풍경으로 나눠서 이야기할 때는 지금은 어떤 종합의 세계, 이런 것이 아마 역사로부터 초월한다든지 그런 것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박인규 : 선생님께서는 7,80년대에 정말 치열하게 민주화운동도 하셨고. 그러시다가 제가 알기론 90년대 이후로 외국도 많이 나가시면서 뭔가 제가 기억하기로는 '우리가 너무 우리 얘기만 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 선생님 시도 많이 스웨덴이라든가 유럽에 많이 번역되고 있고. 외국의 독자들, 편견도 만나셨을 것 같은데요 외국에 나가서 본 우리의 한국문학이랄까 본인의 문학, 어떤 느낌을 가지셨습니까?

고은 : 최초로 나간 게 네덜란드 노트르담의 유서깊은 국제시인대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초청이 와서 가보니까 아일랜드의 시인 '시머스 히니'도 있고 또 남아연방의 '브리튼 바흐'도 있고 아주 세계의 문학사상 빛나는 존재들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처음 만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면서 나는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의 문학에 갇혀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다른 수많은 지구상의 문학들과 만나면서 아, 내 문학은 그들 문학의 한 부분이다라고 하는 자각이 생겼죠. 그러면서 내 문학 역시 세계의 모든 문학과 함께 있어야 아마 더 의미가 커지겠다 하는 걸 또 알게 됐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세계의 여러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 그래서 어떻게 한 16, 17개 나라 말로 내 시가 소개됐고. 영어판 같은 것은 3판 나간 것도 있고. 독일어판도 그렇고 스페인도 그렇고 반응들이 좀 있습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민주화운동이라는 시대가, 민주화가 시대적 과제였던 시대가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 정권이 보수정권으로 바뀌고 하면서 이른바 민주진보진영이라는 분들이 우린 뭘 해야 되는 거냐라는 고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민주화를 기치로 해서 운동을 했던 분들이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든가 최근의 정치상황을 보시면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좀.

고은 : 그런 세력들이 가진 정치적 문화적 가능성이 참 많이 담보돼 있었습니다만, 그걸 온전하게 세상에 구현하진 못했습니다.

박인규 : 뜻은 높았으나...

고은 : 그들은 그동안 살아오는 동안 더 깊은 고민을 했어야 되는데 고민이 결핍돼 있는 그런 진보의식을 가졌었습니다. 이걸 앞으로 크게 반성을, 성찰을 해야 될 것이고 또 하나는 한 시대 깨끗이 가면 가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시대가 오면 그 시대를 살아야 되는 것이죠. 그 시대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아까워하고 하는 건 나는 사람의 다른 시대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낯선 시대가 오면 그 시대를 또 살아가야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세칭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그런 쪽에 대해서 생명 제로로 돌아가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생명과학에서 세포 제로, 생명 제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생명의 원점이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지요. 그렇게 해야지 그냥 그동안 가졌던 관념이나 이런 데서 머물고 있었던 진보적 가치 이런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다 벗고 벌거숭이가 돼서 새 시대의 옷을 입어라. 이렇게 얘기하고 싶네요. 나 자신 역시 그런 세력에 친구가 많이 있고 자유롭지 않은 상태지만 난 지금 하나의 원점에서 서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박인규 : 마지막으로 청취자들에게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은 : 너무 우리가 지금 가치를 갖지 않고 시장의 어떤 생존방식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아 내가 누군가, 내가 지금 무엇인가라고 하는 이런 자기성찰. 이런 걸 함께 나눴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나 자신도 거기에 포함되는 대상이죠.

박인규 : 고은 선생님의 시작 50주년을 다시 축하드리면서 앞으로도 계속 좋은 시로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은 : 모르겠습니다. 좋은 시를 쓸지 나쁜 시를 쓸지 걱정입니다.

박인규 : 앞으로도 쓰시긴 쓰시는 거죠?

고은 : 물론이죠.

박인규 :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고은 :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등단 50주년을 맞는 고 은 시인과 함께 의 삶과 문학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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