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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처럼 일했는데"…이제와 '알아서 협상하라'고?

외교부, 故 황정일 공사 사망사건 5개월만에 '협상 포기'

지난해 중국의 한 병원에서 치료 중 숨진 황정일 주중 한국대사관 정무공사 사건과 관련해 병원과의 보상 협상을 해오던 대사관과 외교통상부가 사건 발생 5개월여 만에 협상을 사실상 포기했다.

그간 '모든 협상을 대사관에 맡기라'며 유족들이 직접 나서는 것을 한사코 막아오던 대사관과 외교부는 이제 와서 '유족들이 개인 신분으로 직접 교섭하라'고 통보해 유가족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고 있다.

유족들은 "자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대사관에서, 더구나 본인들과 다를 바 없는 동료 외교관의 죽음에 대한 직원들의 태도가 믿기지 않는다"라며 "유족보다는 중국 정부의 심기를 더 중시하는 대사관의 태도는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와 같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관련 기사 : 외교부 사망사건, 외교부 "정부가 나설 성격 아니다")

날벼락 같은 진정서 회신

외교부는 지난 9일 황 공사 유족의 대리인인 홍길선 씨에게 보낸 공문을 통해 △중국 국내법 절차에 따라 민사소송이나 중재절차를 개시하거나 △유족이 병원과 직접 협상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유족이 심사숙고한 후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안을 택하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이 입수한 이 공문에서 외교부는 "주중 대사관에서 병원과 협의를 진행했으나 그 결과에 대해 유가족들이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같이 통보했다.

이 공문은 유족들이 지난달 31일 외교부 장관 앞으로 보낸 진정서에 대한 답변으로, 대사관이 앞으로는 병원과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유족들은 진정서에서 "병원과의 협상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자료들로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양지하고 있는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진행해야 마땅하다"고 요구했었다.

외교부의 이같은 입장에 대해 유족들은 "대사관이 책임지고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유족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만들 테니 믿고 맡기라며 장례식을 치르게 하더니 이제 와 발뺌을 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 지난해 8월 14일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영결식 장면 ⓒ연합뉴스

협상 전권위임장을 써 달라고?

대사관이 이해하기 힘든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건 발생 2개월이 지난 해 9월 말부터였다.

대사관의 한 직원은 9월 28일 병원과의 협상 내용을 유족들에게 전하며 최종 협상에 관한 전권위임장을 써달라고 요구했다. '어떤 협상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상식 밖의 단서가 달린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사실상 모든 것을 위임하며 대사관에 의지해왔던 유가족들은 최소한 마지막 협상 결론만큼은 자신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위임장 서명을 거부했다.

대사관 직원이 알려온 협상 내용은 더 황당했다. 그간 비공식적으로 의료사고를 시인해오던 병원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최고 60만~70만 위안(7800만~9100만원)의 '위문금(慰問金)'을 지급하는 대신 유가족들은 차후 이 문제를 재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같은 협상 내용은 이 대사관 직원이 그보다 보름 전 유족들에게 전달했던 것에 비해서도 한참 후퇴한 것이었다. 그 직원은 9월 13일 유가족을 만나 병원 측이 서울로 와 유가족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보상금' 명목으로 미화 10만 달러(9400만원)를 지급하며 대신 유족들은 차후에 이 문제를 재론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주길 원한다고 전했었다.

유족들은 병원이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지급하는 것은 부당할뿐더러 그 액수 또한 납득할 수 없다고 판단, 사실상 '협상 포기각서'인 협상 전권위임장을 거부한 채 대사관에 추가 협상을 요구했다.

한 유가족은 "이천 화재사고의 중국인 사망자 배상금이 1인당 195만 위안(약 2억 4000만원)"이라며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귀하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고위급 외교관의 목숨값이 60만~70만 위안이란 건 개인의 명예는 물론이고 국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사인은 제대로 밝혀졌나?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는지, 아니면 '위로금'만으로도 되는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사망 원인이다. 그러나 사인 규명을 위해 한중 양국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그간 2번 열리긴 했지만, 양국이 합동으로 내린 결론은 현재까지 없다.

다만 베이징시 위생국은 지난 8월 31일 직접 사인은 심근경색이라는 부검 결과를 대사관에 통보했다. 하지만 이는 중국 측의 일방적인 결론일 뿐이다.

황 공사는 작년 7월 28일 베이징 한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먹은 후 복통을 못 이겨 다음 날 시내 비스타클리닉에 입원해 링거를 맞은 지 10분 만에 사망했다.

유가족들은 △중국 의약품 관리 당국이 로세핀과 칼슘을 포함한 용액을 동시에 투약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이 함께 투여했고 △진료기록에 '급성 위염'이라고 써놓고도 간염 같이 악성 증상에나 써야 하는 강력 항생제(로세핀)를 투여했으며 △투여 전 알레르기 여부에 관한 스킨테스트를 실시하지 않았고 주사시에도 반응을 보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의료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국과수 부검의 역시 '과로와 스트레스에 의한 심장질환이 있었지만 그날의 심근경색은 병원의 처치 잘못으로 촉발됐다'라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대사관 직원들도 '의료사고가 맞다. 병원도 중국 정부도 그렇게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유가족들은 전하고 있다.

한 유가족은 "심장질환 증세는 평소에 전혀 없었다. 만일 심근경색이 있었다고 해도 진짜 사인은 의료사고다. 심근경색 때문에 사망했다는 것은 교통사고로 사망해도 '과다출혈'이 사인인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말했다.

"재외국민 보호 못한다는 말 이제야 실감"

그 후 대사관과 외교부의 태도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10월 17일 황 공사의 사망이 순직으로 처리되고 그가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의료사고가 부각되면 순직 처리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순직 처리가 끝나면 병원을 더 세게 밀어붙이자'던 대사관은 밀어붙이기는커녕 이렇다 할 의논조차 해오지 않았다. 대신 대사관의 한 직원은 유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을 용서해 주면 안 되겠냐"며 병원을 대변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유족들을 아연케 했다.

그때부터 베이징 주재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과 교민사회에서는 '황 공사 사건은 완전히 종료됐다' 혹은 '유족들이 뒤에서 거액의 보상을 받았다'는 등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주중 한국대사관 국정감사가 끝난 지 1개월여 후인 11월 28일, 유족들은 가슴 철렁한 소식을 전해들었다.

순직 처리와 국가유공자 지정으로 유가족에게 해주어야 할 의무를 다 했고 유족들이 전권위임장을 대사관에 주지 않으므로 앞으로 병원과의 교섭은 유가족이 개인 신분으로 진행하라는 메일이 대사관으로부터 온 것이다. 대사관의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대사관은 사고 직후 유가족에게 '법적으로보다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유족에게 유리하니 대사관에서 맡아 처리하겠다'라며 '절대 중국 정부를 자극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라'고 권했다.

그러나 대사관은 병원과의 협상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결과를 도출할 때까지 유족의 입을 막고 유족을 철저히 배제하더니, 11월 28일 구두 통보에 이어 지난 9일 공식 공문을 통해 협상 책임을 유족들에게 떠넘겨 버린 것이다.

한 유가족은 "'유가족들이 협상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국가를 위해 30년간 소처럼 일한 외교관의 죽음에 어떻게 '만족'이란 말을 할 수 있나"라며 "대사관이 재외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보도가 왜 나오나 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토로했다.
故 황정일 공사는 누구?

고(故) 황정일(사망당시 52세) 공사는 1978년 외시 12기로 외교부에 입부, 29년간 주중대사관 정무과장, 동북아2과장, 주일본대사관 총영사 등을 역임한 '중국통' 외교관이다. 특히 1996년 동북아2과장 재직 당시 중국과의 끈질긴 협의 끝에 황장엽 씨의 한국행을 성사시켜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2004~05년에는 주이라크대사관 공사로 재직하면서 김선일 씨 사건 이후 이라크 교민 보호와 이라크 재건사업을 담당했다. 2006년 8월 주중한국대사관 공사(대사급)로 부임해 6자회담 및 탈북자·국군포로 업무 등을 담당하다가 변을 당했다.

황정일 공사 사건일지

- 2007. 7. 28 샌드위치 식사 후 복통
- 7. 29 베이징 비스타클리닉 입원 후 링거로 '로세핀' 투여 중 사망
- 7. 30 중국 당국, 부검 실시(한국인 의사 참관)
- 8. 10 대사관, '모든 걸 우리에게 맡기고 장례 치르라' 유가족에 권고
- 8. 14 대사관 영결식 후 한국으로 운구(15~17 서울서 장례식)
- 8. 15 사망원인 종합적 규명을 위한 1차 전문가회의 (베이징대 의대에서. 중국 의사 및 약리학자 25명 참가, 국과수 법의학자 참가)
- 8. 24 김하중 대사, 중국 정부에 '원만한 처리' 요구
- 8. 31 베이징시 위생국, '직접사인은 심근경색' 최종 부검 결과 대사관에 통보
- 9. 14 사망원인 종합적 규명을 위한 2차 전문가 회의
- 9. 28 대사관, 유가족에 병원입장(위로금 60~70만 위안, 위로의 말 전달) 전하며 협상 전권위임장 서명 요구 - 유가족, 거부
- 10. 17 외교부, 순직 및 국가유공자 처리
- 10. 20 국회 통외통위, 주중한국대사관 국정감사
- 11. 28 '유가족들이 개인 신분으로 병원과 교섭하라' 메일
- 12. 31 유가족, 외교부 장관에 진정서 제출
- 2008. 1. 9 외교부, '법적 대응하거나 병원과 직접 협상하라'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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