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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공동체와 함께 적농청 동맹을

[개혁-진보 진영의 거듭남을 위한 제언] <하>

민주주의의 배반, 대통령 선거 제도

이번 대선은 우리의 대통령 제도, 나아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에서부터 다시 재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던져준 선거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정당을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들, 모든 시민사회운동 단체들, 모든 인민들은 어쨌든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 모든 것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올인 도박과도 같다. 나머지 5년, 4년은 주민투표제, 주민소환제, 주민발의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떠한 제동장치도 없이 위임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직업 정치인들의 이권 잔치로 전락하고 만다. 3,4,5년만에 하루뿐인 민주주의라고 하기조차 이상한 기형의 민주주의 체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모습일까. 물론 아니다. 일부에서 87년 체제라고 명명한 이같은 민주공화정은 1987년 당시 그때까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시민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파당에 지나지 않았던 보수야당 세력까지 포괄하고 있던 범민주화운동 세력은 독재 타도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단순명쾌한 최소강령 아래 결집되어 있었다. 당연히 6월항쟁의 승리 직후 봇물처럼 터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범민주세력의 대동단결에 금이 가는 첫 번째 사건이었고 헌법개정 논의는 군사독재정권 세력과 보수야당 세력 사이의 타협의 산물로 귀착되고 말았다. 때문에 1987년의 개정 헌법은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 일반 시민사회단체의 그 어떤 의미있는 영향력 행사도 없는 가운데 민주주의의 전망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토론의 과정 없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에 그치고 말았다. 1987년 당시 군사독재 세력과 보수야당 세력의 세계관과 수준이 그대로 반영된 헌법이었다. 당시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 대중조직과 한국 정당정치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 헌법이었다.

민주화는 결국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는 문제로 축소되고 말았다. 헌법 개정 이후 최초로 벌어진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운동 세력이 비판적 지지론, 독자후보론, 후보단일화론 등으로 사분오열된 것은 필연의 결과였다. 새로운 사회를 재구성하는 기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새로운 대통령을 만들고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는 정치 공학의 기획이 민주화운동 세력을 휩쓸어 버렸고 더 많은 일반 대중들을 매료시켰다. 쿠테타를 통해 군사독재 권력을 획득하는 방식 대신 일반 대중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로 권력자를 선출하는 게임은 어쩌면 짜릿한 권력에의 대리 만족감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군복 출신의 독재자에서 넥타이 맨 '제왕적 대통령'으로 무늬만 바뀐, 껍데기뿐인 민주주의를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이런 낭비와 투기의 권력 게임을 버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다시 재기획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으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민주권의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이다. 민주주의는 만인이 모두 평등하게 존엄을 유지하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삼는 제도이다. 민주주의의 선거는 대표를 뽑는 것이지 왕을 선출하는 게 아니다.

강력한 대통령제는 강력한 인민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와는 이율배반의 관계이다. 강력한 대통령제도 아래에서는 정당보다 대통령 후보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정당정치의 파행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현상을 처음부터 제어하지 못했던 것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비극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해방 후 미국의 군사정부가 남한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건국 자체가 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이루어진 역사를 반영한다. 미국식 헌법과 법률이 한국 민주주의 체제 설계의 본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연히 미국식 대통령 제도가 모방 차용되었고 그뒤 4.19 혁명 뒤의 짧은 내각제 시기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대통령제는 지금껏 불변의 제도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찍이 미국 건국 초기에도 이런 대통령제의 도입을 놓고 격렬한 논쟁과 농민반란이 벌어진 바가 있었다. 영국과의 식민지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뒤 당시 이주민 백인 부자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들을 배제하고 그들 중심의 강력한 연방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때 연방파를 반대하던 민주파들은 영국 왕의 폭정에서 이제 막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는데 새로운 왕과도 같은 대통령을 무엇 때문에 두어야 하는가 하며 연방주의자들을 공격했다. 토마스 페인은 당시 유명했던 『상식』에서 "최선의 상태라 하더라도 정부는 단지 필요악일 뿐이다"라고 설파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강력한 대통령제는 오히려 걸림돌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걸맞는 제도는 사실 내각책임제이다. 오늘날 연방 대통령이 파시스트 총통처럼 군림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사실상 허물고 있는 미국식 대통령제는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인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과 군사쿠데타로 스스로 집권한 대통령이 권력이란 점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다면 민주화는 무엇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일까.

허구의 서구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주의의 전망

이 시점에서 단순히 대통령제의 폐단을 넘어 우리는 새삼 누런 피부 흰 가면의 민주주의론을 다시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기성의 조립식 주택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이미 정해진 제도라기보다는 늘 나라와 사회에 따라, 전통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곡이 생기는, 늘 새롭게 세워지는 사회원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하면 당연히 서구 민주주의를 떠올리고 민주주의의 전범은 아테네라고 진리처럼 배워왔다. 그러나 사실 아네테 민주주의가 무슨 민주주의의 전범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잘못된 인식, 거짓과 환상일 뿐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인구의 절반 이상인 노예와 외국인은 철저히 배제된 채 시민권 소유자들만의 민주주의였으며 그것도 곧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우정치에 가까운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노예가 있는 민주주의란, 그리고 극심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그들만의 민주주의란 사실상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민주주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 ⓒ뉴시스

사정이 이런데도 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아테네 신화가 널리 퍼진 것은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역사 왜곡과 서구에서 학문을 배운 비서구 지식인들의 색맹에 가까운 서구추종 학문 태도에 비롯된 바가 크다. 오히려 백인 이주민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녀 평등과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었고, 빈민도 거지도 없이 공동 토지소유와 공동노동을 실현하고 있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 예컨대 이로쿼이족 연방이 아테네보다 훨씬 더 조화로운 민주주의의 모범 사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그런 원주민 민주주의 사회를 아예 깡그리 파괴하고 또 원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한 뒤에 세워진 백인 이주민들만의 '민주주의' 사회였다. 여성(1920년 참정권 획득), 흑인(1870년 참정권 획득), 노예는 말할 것도 없고 재산 없는 백인들도 배제된 그런 비틀린 민주주의 사회였다. 그런 아메리카 합중국을 우리는 한국전쟁 이래 반세기 넘게 모방해야 할 민주주의의 '선진국'으로 각인시키는 주입 교육을 받아왔다. 때문에 민주주의를 논할 때면 의례히 서구 정치학자들의 견해나 말씀이 무슨 금과옥조처럼 되뇌어지곤 한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인민이야말로 오직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유방본(民惟邦本), 민본주의 사상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초기 신라의 화백제도도 노예 위에 세워진 아테네 민주주의보다는 나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단언컨대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서구식 대의제 민주주의, 금권정치의 교과서와도 같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잣대로 재단하거나 기타 등등의 새로운 서구 정치이론 뼈대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의 방식으로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어렵다. 미국의 선거는 천문학 단위의 선거비용이 들어가고 당연히 대부분의 돈은 거대 기업과 억만장자들이 낸다. 미국 정치는 이들 '백인클럽'들의 로비로 이루어지는 부자들의 정치, 군산복합체와 금융투기자본이 지배하는 무기와 돈다발의 정치이다. 우리는 서구의 금권정치와 달리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획,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의 기획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새롭게 개척해 나가야 한다.

새로운 적녹청 풀뿌리 정당 정치

오늘날 현대 국민국가에서 개별 시민과 국가를 연결하는 가장 중심의 매개고리를 정당이라고 보는 서구 정치학자들의 견해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전혀 열어 줄 수가 없다. 국민국가의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의 가장 큰 맹점은 국가 수준의 선거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유권자 개개인들의 무력감만을 조장할만큼 규모가 너무나 크다는 데 있다. 대의의 규모, 선거의 규모와 단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개개인의 무력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선거 민주주의는 결국 수많은 기권자를 조장하고 또한 결국은 민주주의의 무력화로 귀결된다.

여기에 언론의 발달과 함께 이미지에 의존하는 정당정치는 정치의 희화화를 더욱 조장한다. 영화배우가 영화 속 이미지로 주지사나 대통령이나 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무슨 민주주의 선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수백, 수천만의 원자화된 개인이 선거 때만 동원되는 유권자, 한 표로서 생길 수 있는 개인 이익을 계산하는 자기 중심의 정치 소비자로 머물러 있는 한 민주주의는 아무리 정당정치가 발달한다 하더라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선출된 대표와 인민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못하는 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절망감과 우울한 금권 민주주의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시장경쟁의 탈락자, 국가에 예속된 수동의 1인 투표권자들이 순식간에 분노의 민족주의자나 국가주의자로 되는 중우정치는 늘 눈앞의 현실이다.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는 풀뿌리 기초공동체의 직접민주주의, 직접행동이 없으면 뼈대조차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만다. 민주주의의 튼튼한 기초인 이같은 공동체야말로 엘리트와 직업정치인들, 기업과 자본가들의 민주주의 매수 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 한국의 정당정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풀뿌리 정당은 이런 직접 민주주의, 직접정치를 기반으로 공동체운동, 시민사회운동과 적극 결합한 새로운 '운동정치'를 지향해야만 서구 선거 민주주의의 협소한 전망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활로를 터나갈 수 있다.

제도정치는 늘 정치의 무덤이자 민주주의의 무덤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제도의 틀에 안착한 정치인들은 늘 금권정치의 함정으로 빠져들게 되는 구조악의 전철을 타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길이 권력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가까운 길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도정치를 뒤흔들어 깨워 민주주의의 영혼을 다시 새롭게 불러오는 것은 또 늘 운동정치이다. 우리는 지금 제도정치 이전에 운동정치의 시기에 처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거대한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당을 통해 시민의 힘을 조직하는 것이라는 최장집의 지적은 그러므로 전혀 타당한 지적이 아니다. 현대 국민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정당 간 정권교체를 통해서만이 '민중들 스스로의 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으며 강력한 국가가 있는 한 민주주의의 유일한 방법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대의제 민주주의이라는 그의 주장은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정당정치는 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를 토대로 했을 때만 인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새로운 체제를 굳건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물론 정당정치의 활성화는 한국 민주주의의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나 정당정치에 앞서, 정당정치의 제도화에 앞서 정당정치의 기반으로서 풀뿌리 공동체 건설이라는 시각이 먼저 선행해야 한다. 한국의 보수 기반이 권력과 재력이라면 새로운 사회운동, 새로운 정당정치운동의 기반은 정당이라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이다.
지금의 현실에서 정당정치가 제도화된들, 지배엘리트만을 몇 년만에 바꾸는 선거가 새로운 사회로 전환되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치인들은 선거 기간에는 유권자들에게 서로 얼굴을 알리려 기를 쓰지만 막상 선거만 지나면 유권자들과 멀리 떨어진 정치판에서 정치전문 엘리트로 활동할 뿐이다. 중앙정치건 지역정치건 마찬가지이다. 지역토호들이 장악한 지방의회는 지역주민의 생활과는 유리된 이권의 복마전으로 전락해 풀뿌리 보수주의의 확고한 기반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구조악이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지역 정당정치는 부패붕당정치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한국의 지방자치는 지방정부의 자치이지 지역주민의 자치가 아니다. 그것도 지극히 제한된 권한을 가진 지방자치 '단체'의 자치에 불과하다.

이런 구조를 혁파하고 정당정치가 일반 인민들 속에서 튼튼히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민주주의의 튼튼한 집을 지어놓아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정당은 처음부터 이런 풀뿌리 기초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 직접 정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장 큰 모순인 대의의 왜곡 현상과 각종의 정파 폐해가 극복될 수 있고 일반 인민과 정당의 경부대운하로도 좁힐 수 없는 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시민사회운동 구성원들의 정치 참여 논쟁도 사라지게 된다.

대의제의 폐단은 이른바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의회에 진출한 10석을 둘러싸고 권력 경쟁을 벌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당원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잘못 대의된 당 제도와 정치공학 수단을 동원한 술수의 정파 지배를 통해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차지하기 위해 저급한 방식의 권력추구형 정파투쟁을 벌이는 것이라면 보수 야당의 금권 파벌정치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숱한 내부 비리가 드러나고 종북주의 척결 논란에 휩싸인 현재의 민주노동당에게서 새로운 정당정치운동의 싹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다.
정당정치운동의 시각이 기초공동체 건설로 최우선해서 바뀌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계급과 지역을 포괄하는 풀뿌리 대중정당

우리가 필요로 하고 건설해야 하는 정당은 계급이나 지역에만 기반을 둔 정당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당이다. 선거 전문 대행 정당, 선거 때만 기능하는 선거 정당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운동의 정당이다. 물론 노동자나 농민 등 계급 계층의 기반과 지역 기반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제의 원리로 작용해서는 당연히 안된다.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민주노동당도 사실 평당원의 구성을 보면 전혀 계급정당이 아니다. 그리고 계급정당 노선은 이미 실패한 낡은 사회주의 혁명운동 노선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노동계급 중심의 혁명이나 노동계급의 동질성을 전제로 한 정당정치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허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정당은 의미있는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거대한 소수'가 아니라 기껏해야 영원한 반대자, 소수자로 머물 뿐이다.

이미 민노총은 비정규직의 조직화, 비정규직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으로서는, 나아가 노동운동 전체의 대안과 전망을 실천하는 조직으로서는 심각한 한계와 대표성의 문제를 노출해 왔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조직은 밑에서부터 수많은 비정규직과 지역의 노동자들로부터 다시 새롭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적녹청의 정당정치운동, 공동체 형성 운동은 이같은 풀뿌리 공동체 노동운동을 추동하고 활성화시키는 창업보육센터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운동 또한 지역과 중앙 모두 정당정치와의 관계 정립을 새롭게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성장한 시민사회운동은 이제 공동체 형성의 운동을 통해 그동안 축적된 활동 경험과 활동가들의 저수지 둑을 허물고 새롭게 정당정치운동으로 물꼬를 틀 시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발상의 전환은 늘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이른바 온건 개혁세력이라고 통칭되는 정치세력 가운데서도 이제는 뚜렷한 자기분화를 결정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정체성도 모호한 반보수 잡탕 혼성정당을 조직한 결과는 이미 산산히 부서진 난파선으로 증명이 되었다. 유명 엘리트 직업정치인들이야 여전히 열심히 구명도생의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수많은 이른바 개혁진보 정치지망생들은 대중들의 절절한 희망을 실현하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현실가능한 사회변화의 길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혁명과 무장투쟁 노선을 부정하고 의회정치를 추구한다면, 그리고 적어도 북유럽의 사민주의 정도까지는 수용할 수 있는 자본주의 제한과 극복의 이념을 천명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공동체 형성의 적녹청 정당정치운동에 함께 못할 까닭이 하나도 없다. 노동자들끼리 또는 농민들끼리 또는 여성들끼리 또는 초록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떨어져서 홀로 따로국밥을 먹기보다 떠들썩하게 어울려 잔치를 벌이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형성의 첫걸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운동의 새로운 지평 확산

개인과 개인주의는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개념이자 자본주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을 노동력으로 '재발견'하고 이를 공동체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우리는 이런 해방된 개인들을 다시 공동체의 '자유'와 '우애'로 묶는 운동을 해야 한다. 새로운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운동의 풀뿌리 공동체 운동은 삶의 존엄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정언명령이기도 하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처음부터 의도가 불순한 잘못된 개인주의이며 그 결과는 처참한 인간 존엄의 상실이었다. 우리의 현재 삶이 이를 그대로 웅변해준다. 우리는 잘못된 서구의 개인주의, 개인 관념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인간관계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을 다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란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성장중독 증세에 사로잡힌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대개 일반 대중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조장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공공의 제도를 개인 권리를 행사하는 도구 정도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공공성이란 개인들의 이익의 도구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 속의 개인'을 경험하고 실천해야 한다.

서구에서 공동체를 강조하는 이념과 실천은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를 비롯해서 종교 공동체 이념과 운동 등 다양한 갈래가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 레닌의 공동체 운동은 전체주의로 흐르고 말았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개인주의 경향과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매킨타이어(A. MacIntyre) 등의 공동체주의는 비록 개인과 공동체라는 뿌리깊은 이원론의 서구 철학개념에 근본을 두고 있긴 하지만 다원주의와 탈중앙, 탈권위의 정치공동체를 강조하는 등 서구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좌우 이데올로기를 근본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를 주는 점이 없지 않다. 자유주의자들도 공동체주의를 부르짖고 한국에서는 보수우파가 공동체 자유주의를 내세우고 있긴 하다. 이 또한 극단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낳은 극단의 공동체 해체 현상에 대해 일정한 반응과 반증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낡은 사회주의의 죽음을 선언하며 좌도 우도 아니고 이를 초월하여 책임과 의무의 원리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민 사회주의(civic socialism)를 모색하는 주장도 경청의 여지가 있다.

사회주의건 자유주의건 우리는 그런 이론과 제안의 탐구와 함께 현실의 공동체를 스스로 실천하는 게 먼저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공동체는 억압의 공동체가 아니다. 가족, 학교, 마을, 지역, 직장 등 우리는 다양한 공공의 네트워크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 공동체는 여성을 억압 착취하거나 계급착취의 도구로 변질될 가능성이 늘 열려 있다. 사실 자본주의는 가족과 친구들, 지연과 학연, 취미 등등을 기반으로 한 친목공동체까지도 착취의 제도화를 통해 이윤 극대화의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그 어떠한 공동체도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내부에 착취 피착취의 자본주의 관계와 전혀 다른 철저한 호혜와 자립의 경제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공동체 형성의 기본은 자본주의 임노동 관계의 개선과 철폐로부터 시작된다. 공동체운동은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지만, 명백히 자본주의와 대립하며, 자본주의 태내에서 자라는 자본주의 극복의 싹이다. 특히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은 공동체가 아니라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장일 뿐이다. 나라 예산이 한 해 200조 원 가량 되는데, 우리나라 10대 대기업이 갖고 있는 현금이 대략 150조 원, 대기업군이 갖고 있는 현금만도 300조 원이나 된다. 그만큼 오늘날 한국은 기업이 지배하는 기업국가로 변했다. 시장에 권력이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발언은 비록 무책임한 국가 권력자의 궤변이지만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아마도 모든 기업을 협동조합으로 바꾸어야만 그나마 이 세상은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될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생기게 될 것이다.

다중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삶을 살고 있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늘 이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 대중은 민주공화 정치의 주체이자 직접 민주주의의 인민 통치 주체일 수도 있으며 중우정치의 객체이자 전문가주의에 포섭된 무력한 다중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늘 이 두가지 이중성격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중우정치로 나아갈 것인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운동의 이른바 패러다임 전환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여기저기서 강조하고 있는 공동체운동과 직접정치는 내용과 강조가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공동체로의 시각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협동과 연대의 경험을 쌓으며 다채로운 공동체들을 만드는 일, 그것을 시작해야 한다."(전진 회원 글, 「제2창당운동을 시작하자」) "정치활동의 주된 기조가 집회 시위 중심 등이 아니라 대안적 민생의제 등을 매개로 하는 주민접촉사업 중심으로 완전히 변경될 필요가 있습니다."(송태경, 「NL-PD 타파하고 중립혁신위 구성하자」)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에서는 지역정치공동체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국민직접정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활발하고도 진지한 대안 모색이야말로 새벽의 지평을 여는 닭울음소리임에 틀림없다.

지속가능한 공동체 사회를 향하여

자본주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는 이제 지속불가능하다. 석유정점과 모든 천연자원의 정점, 식량 위기와 함께 한국경제 붕괴의 쓰나미는 머지 않은 곳까지 이미 다가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 해 약 130억 달러(12조 원)에 이르는 연간 농축산물 수입액이 웅변해주는 바 우리의 식량자급율(27%, 쌀 제외 5%)은 위기 정도가 아니라 미리 재난선포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식량과 에너지 위기가 닥쳤을 때, 지역 자립과 자치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 귀결은 새로운 국가 파시즘의 탄생이다. 군사독재건 경찰 독재건 전체주의 체제만이 혼란을 막을 수 있다는 명분은 쉽게 대중을 사로잡고 순식간에 민주주의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9.11 테러 이후 나타난 미국 민주주의의 음울한 종언을 생각해보라.

공동체 운동은 이런 위기를 대비하고 우리들 자신과 자식들의 생존을 위한 인식과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운동이 진정 새로운 사회를 희구한다면 공동체 건설로 시급히 눈길을 돌려야 한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운동은 지금도 너무나 때가 늦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진폐환자 3만여 명이 고통 속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광부는 한때는 뒷돈 주고 입사해 부러움까지 사던 직업이었다. 그러나 결국 탄광노동자들은 자살노동을 한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풍요의 역설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임금이 얼마인가도 중요하지만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고, 내가 몸담고 있는 기업이 어떤 물건을 생산하는지도 중요하다. 기업의 이윤이 얼마인가 계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의 생산품이 과연 사람과 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것인지, 자원을 얼마나 무로 돌리는지, 생산자들의 건강을 얼마나 해치는지 먼저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 마디로 자신의 노동이 사회 속에서의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가치를 갖는지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노동은 자신을 죽이는 자살노동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노동자건 농민이건 도시 서민이건 우리는 이제 자신의 노동,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 다시 성찰하고 자신의 주위에서부터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자본주의 기업과는 전혀 다른, 세계화의 국민경제와는 전혀 별개로 존재하는 호혜와 자립의 지역화폐 경제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기후변화와 에너지-식량위기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지혜의 길이다.

극단주의와 근본주의는 그 자세부터가 다르다. 근본주의야말로 가장 현명한 현실주의이다. 지금이야말로 실현가능한 근본주의로 돌아갈 때이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풀뿌리 공동체의 형성으로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운동의 방향을 전환해야 할 절체절명의 시점에 이르렀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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