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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했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8> 16-18세기 유럽경제의 발전 ②

3. 유럽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했는가

유럽과 중국의 차이


그러면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월러스틴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고 중국에서 그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를 두 지역을 대비시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3-16세기에 유럽과 중국은 비슷한 인구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좋다. 15세기에 인구, 면적, 기술 수준(농업이나 항해술)에서 큰 차이는 없으며 가치 체계의 차이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유럽에서는 로마의 세계제국이 해체되어 혼란이 계속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제국이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의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안정되어 있던 중국에서는 천여 년에 걸쳐 유럽에서보다 농민착취가 적었고 유럽보다 더 발전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농업경영면에서 유럽인들은 목축과 밀의 경작으로 나아갔고 중국인들은 노동집약적인 쌀 경작으로 나아갔다. 중국은 땅보다 인력이 더 필요했던 반면 유럽에게는 더 많은 땅이 필요했다. 그것이 유럽인들에게 외부로 팽창하려는 욕구가 더 컸던 이유이다.

중국은 거대한 관료기구를 가지고 있었고, 화폐경제와 기술면에서도 좀 더 앞서 있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발전하는 데 더 유리했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 매우 커서 그것이 발전을 막았다. 즉 정치적 요소가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450년에 유럽에는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중국은 물론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반면 중국이 정체상태에 빠진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위에서 복잡한 이야기를 피하느라고 빼 놓았지만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를 세계-경제와 세계-제국으로 구분한다. 광역 경제 안에 여러 국가들이 포섭되어 있는 경우가 세계-경제이고 광역 경제를 하나의 정치체가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세계-제국이라고 부른다. 세계-경제는 보통 1세기도 연명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으나 한 국가가 그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세계-제국으로 바뀌게 된다.

근대 이전에 나타난 모든 세계-체제는 세계-제국의 형태였고 따라서 정치가 경제에 통제와 간섭을 하므로 어느 한계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로마나 중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근대 초에 만들어진 유럽 세계-경제(이것이 자본주의적 세계-경제 또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이다)는 수백 년을 존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하나의 세계-경제 안에서 여러 국가들이 경쟁했으므로 상대적으로 경제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대제국의 경우보다는 약했고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이 보는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요인들

그러면 월러스틴은 16세기에 유럽이 어떻게 자본주의로 향해 나아갔다고 생각할까. 그는 다음 네 가지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째, 유럽의 아메리카로의 팽창은 그 자체로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신세계의 금과 은이 유럽으로 하여금 수입 이상의 생활을 하게 했고 저축 이상으로 투자하도록 해 주었다. 생산 확대의 원인이 금, 은의 양이 늘어난 때문인지 인구 증가의 결과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금, 은은 그 자체가 상품이었다. 그리고 무역의 전반적인 팽창은 16세기의 번영을 뒷받침했다.

둘째, 유럽에서 대규모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물가혁명과 임금지체 때문이다. 물가가 오른 만큼 임금이 바로 따라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공업자들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셋째, 중심부에서는 자영농이 발전했고 주변부에서는 환금작물 재배를 위해 강제노동이 등장하는 농촌 노동양식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요먼(yeoman, 자영농) 농장주 없이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넷째, 자본주의 체제는 주변부의 환금 작물을 위한 강제노동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착취나 비유럽 지역과의 무역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나 그와 함께 유럽에서의 내재적인 발전도 중시한다. 아메리카로의 팽창이 결정적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귀금속 유입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유럽에서의 생산 확대가 인구증가 때문인지 귀금속 유입 때문인지 잘 알 수 없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유럽에서의 대규모 자본축적도 임금지체에 그 원인을 돌린다. 또 서유럽에서의 자영농의 등장이 없었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매우 미묘한 태도이다. 이것은 그가 자본주의를 기본적으로는 유럽 경제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에 유럽의 인구가 늘어나고 또 경제도 되살아나고 있었으므로 유럽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 요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는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료 부족으로 단편적인 증거만을 이용해야 하는 것도 제약 요인이다. 그럼에도 내, 외부적인 요인의 관계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할 필요는 있다. 그의 주장 가운데 문제가 있는 몇 가지를 검토해 보자.

귀금속 유입과 물가혁명

우선 귀금속 유입의 문제이다. 아메리카로부터 스페인으로 금, 은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503년부터이다. 1800년경까지 유럽에 들어온 은의 양은 모두 약 10만 톤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 16세기 중반에 개발된 페루 포토시 광산의 갱내 모습. 원시적인 채굴방식을 사용해서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그 가운데 약 40% 가량이 계속 적자를 보인 무역 대금의 결제를 위해 아시아로 유출되었는데 그 최종 도착지는 중국이다. 나머지는 유럽에 남았는데 1500년경 유럽의 은 보유량이 약 3만7천톤으로 추정되니 300년 동안에 처음 보유량보다 약 1.6배의 은이 유입된 것이다.

유럽은 중세 시대에 주로 은본위 제도를 택하고 있었는데 은이 부족하여 만성적인 화폐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풍부한 귀금속의 유입이 화폐량을 증가시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었을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 무역이나 발트해 무역의 활성화는 이것과 관련이 깊다.

16세기 유럽에는 물가가 크게 오르는 가격혁명이 나타났다.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략 3-4배 정도 올랐다. 곡물가가 가장 많이 올랐다. 화폐수량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화폐의 증가와 관련시킨다. 귀금속 유입이 화폐를 증가시켰고 이것이 물가를 올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만큼 화폐 유통량을 늘려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반면 속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화폐량 증가가 아니라 유럽 경제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 활동의 증가에 따라 화폐의 유통속도가 빨라져서 물가가 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가혁명을 검토하려면 인구 증가, 국내교역과 국제무역의 증가, 도시화, 공산품 생산증가, 명목임금 상승, 국가 조세 증가라는 변수들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당한 이야기이나 사실 어떤 요소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 문제는 아직 논쟁 중에 있고 당장 어떤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의 시기는 또 다르다고 하더라도 1525-1585년 사이의 스페인에서는 귀금속 유입량과 물가상승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또 16세기 유럽의 경제 활성화 자체에 화폐 증가가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월러스틴의 유보적인 태도보다는 귀금속 유입의 긍정적 영향을 더 강조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임금지체와 자본의 본원적 축적

월러스틴은 유럽의 대규모 자본 축적이 물가혁명 당시의 임금지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가는 급격히 오르나 고용계약은 대개 1년 단위로 되어 임금이 오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며 그래서 그 차액을 고용주가 차지하며 자본을 축적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돈을 모은 사람들이 대자본가가 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별로 없다. 그보다는 아메리카인의 직접적 착취와 노예무역을 포함한 대서양 무역이 유럽에게 준 이익이 훨씬 더 크다.

노예무역은 16세기에 본격화하여 19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다. 그 동안에 약 1,3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 서부 지역에서 붙잡혀 아메리카로 팔려갔다. 영국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어떤 연구자는 17세기 영국 자본형성의 1/3을 노예무역에 의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 1601-1701년의 대서양 노예무역. 흑인노예들은 대체로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나갔다. 노예무역은 19세기 전반까지도 계속되었다

▲ 영국의 리버풀 항구. 17세기에 노예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다.

이것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다른 나라의 경우도 정도는 덜하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시기 번영했던 유럽의 대서양 연안 항구 가운데 노예무역과 관련을 맺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서양 무역을 대표하는 것이 특히 영국인들이 주도한 삼각 무역이다. 직물이나 무기, 철제품 등 공산품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팔고, 그 돈으로 노예를 사서 다시 아메리카에 팔고, 아메리카 플랜테이션 산물을 싣고 유럽으로 되돌아와 파는 것이다. 한 번 항차에 여러 번 거래를 할 수 있었으므로 수입이 짭짤했다.
▲ 17세기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조선소 풍경. 17세기는 네덜란드 무역의 황금기이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설탕산업이었다. 이는 아메리카 플랜테이션에서 생산한 원당을 들여와 유럽 각 지역에서 정제하여 설탕을 만들어 파는 산업이다. 시설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나 높은 수익을 올려주는 유럽 최초의 자본주의적 산업으로 18세기 후반에 면직산업이 발전하기까지는 자본축적에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 17세기 이후 유럽에 많이 건설된 설탕(정당)공장의 모형. 서인도제도나 브라질에서 수입한 원당을 유럽에서 정제하여 설탕을 생산한다.

해적질까지도 중요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유명한 해적인 드레이크가 세계를 일주하며 약탈행위를 하여 1573년에 영국에 반입한 약탈물들의 가치는 60만 파운드에 해당했다. 당시만 해도 영국의 가장 큰 수입원이 양털을 유럽 대륙으로 수출하는 양모산업이었는데 1600년의 수출액은 10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이렇게 근대 초 유럽 경제에 외부적 요인은 매우 중요했다. 월러스틴이 임금 지체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재적인 발전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자영농의 성장과 농업자본주의

월러스틴은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해 주변부 강제노동과 함께 중심부의 요먼 성장을 불가결한 것으로 주장한다. 요먼은 대지주(영주)에게서 땅을 빌려 대규모로 영농을 하는 차지농이나 자기 땅을 늘려 농사를 짓는 자영농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서양 학자들은 근대 유럽경제의 확립에서 요먼의 성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특히 자본주의의 중심국가가 된 영국의 경제를 말할 때 그렇다.

이들이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해 토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농업생산성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켰으며 이에 따른 농산물가의 하락과 실질임금의 증가가 다시 농산물에 대한 대중적인 수요를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의한 농업의 발전이 근대 자본주의의 밑바탕을 이루었고 나중에는 산업혁명의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19세기부터 있어왔지만 특히 각광을 받은 것은 1950년대 이후이고 7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독립한 제3세계 학자들이 서양 자본주의 발전을 식민지 착취와 연결시켜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내부적 요인과 연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월러스틴도 사실 이런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6-17세기에 영국농업에 특별하게 발전했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관개 기술 등 여러 가지 기술이나 영농업의 개선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영국만의 것은 아니고 네덜란드 등 유럽 대륙에서도 일어나고 있던 일이다. 과거에는 18세기의 농업혁명을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 요먼의 일반적인 성장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토지는 15세기 이후에 인클로저를 통해 계속 소수의 대지주나 하층 귀족 계급인 젠트리 층에게 집중되었다. 주로 양모생산을 위해서였다. 1861년의 조사에 의하면 잉글랜드 전체 면적의 4/5가 7000명의 대지주 손에 있었다.
▲ 중세 말부터 영국은 플랑드르지방의 양모를 수출했다. 15-16세기에 인클로저는 양모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렇게 농업의 성장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자 1980년대 이후의 연구는 17, 18세기 영국 경제발전의 원인을 해외부문에다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과거에 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과소평가했음을 반성하고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비농업노동력의 40-50%가 수출산업에 고용되어 있었고 국내 제조업 증가의 많은 부분이 해외수출의 팽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농업생산성 증가에 따른 산업생산품의 수요는 매우 낮은 비율이다.

이렇게 유럽 자본주의의 성장과 관련한 월러스틴의 주장은 아메리카와의 관련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상당부분 1970년대까지 유럽중심주의적 학자들이 주장한 내재적 성장론을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설득력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아시아와의 관련에서 나온다. 월러스틴은 아시아의 경제를 형편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도외시했으나 이는 서양 학자들이 아시아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근대 초 아시아 경제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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