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후보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어제까지는 평가적 성격이 컸다고 본다. 그러나 (이회창 전 총재가 출마한) 오늘 진짜 대선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이어 "정동영이 대통령이 되면 다음 5년은 정동영의 시대다. 우리 국민들은 과거와 확실히 다른 5년을 선택해왔다"며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한국 대선을 관찰해왔던 선입견은 접어두고 새롭게 관찰해달라"는 당부도 곁들였다. 노무현 정부 5년과는 다른 미래를 정동영에게 믿고 맡겨달라는 말일 테다.
노무현 정부 심판론이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 지지율의 배경인데다 이회창 전 총재가 '좌파정권 종식'을 외치며 출마선언을 한 상황에서 정동영 후보의 이런 답은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두 보수 후보의 높은 지지율과 범여권의 지지부진한 지지율은 모두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혐오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정동영 후보의 대선 행보를 '현 정권과의 차별화는 여당 후보의 당연한 전략'이라고 보아주기에는 개운치 않은 지점이 많다.
정동영의 적(敵)은 정동영
문제는 노무현이 아니라 바로 정동영이다. 이번 대선이 미래 지향의 선거라면 대선의 핵심은 출마한 후보들의 비전이 담긴 공약과 추진력, 그리고 진정성을 평가하는 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후보의 진정성은 그가 여태까지 취해온 정치 행보와 노선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정동영 후보가 줄곧 외치고 있는 가치는 하나 같이 과거 자신의 행적에 대한 배신이고 부정이다.
'여당으로서의 책임성'과 북한 핵 문제 해결 등을 들어 이라크 파병을 찬성했던 그다. 2004년 총선이 끝나자마자 전경련을 찾아 규제개혁을 악속하며 긴밀한 협조를 구했던 그다. 노동계와 시민단체의 경고에도 허점투성이의 비정규직보호법을 통과시켰던 것도 그의 당이고 부동산 대책으로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설치를 거론했던 당에 대해 한마디 비판이 없었던 그다.
그랬던 정동영 후보가 이제는 '행정부와 국회의 역할은 다르다'며 이라크 파병 연장에 반대했다. 후보로 당선되자마자 전경련을 만나 의도성이 짙은 자극적 대립각을 긋는가 하면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된 뉴코아 노조원들을 만나 한마디 사과 없이 함께 '이랜드 경영진'을 탓한다. 이명박 후보의 교육 정책을 비판하며 '강자독식주의이며 시장만능철학'이라고 한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사이에 반부패연대의 단초로 논의되는 삼성 비자금 특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이른바 '떡값 검사'들의 실명까지 거론됐음에도 민주노동당이 주장한 특검 논의는 열린우리당의 무관심 속에 유야무야됐다.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
무엇보다 그의 '개과천선'을 곱게 봐주기 어려운 건 선거를 위한 정략적 선택의 결과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다시 표변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 개혁지지층이 흔쾌하지는 않지만 비판적 지지라도 보낼 수 있게끔 만드는 신뢰의 문제다. '이명박-이회창과 정동영은 다르다' 이전에 '과거의 정동영과 현재와 미래의 정동영은 다르다'는 믿음을 주느냐의 문제다.
하지만 정 후보의 '급좌회전'을 유심히 지켜보면 첫 단추가 돼야 할 진정성 담긴 사과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정동영 후보가 최근 '대학입시 폐지', '불법 간접고용 근절' 등 획기적인 공약을 내놓는 민생현장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현재의 난국을 만든 핵심 책임자가 한 마디 해명 없이 대안이자 해결사인 것처럼 나타난 현실에 어리둥절해 했다.
지난 6일 뉴코아 노조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노조원들은 "비정규직을 보호하자고 만든 법 아니냐, 법을 만들었으면 최소한 악용하지 않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정 후보는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법도 법이지만 사람을 중시하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고 둘러갔다. 간담회에는 비정규직법 제정을 주도했던 이목희 정책기획본부장도 배석해 있었지만 '원죄'를 고백하지는 않았다.
지난달 31일 정 후보가 교육정책을 제시한 학부모 간담회에서는 한 참석자가 정 후보 캠프에서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는 김진표 의원을 겨냥해 "전에는 특목고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따졌다. 김 의원은 "교육부장관 해보니 다르더라"는 변명으로 일관했고 정동영 후보는 남의 일인 듯 웃으며 "오늘 나왔던 질문 중 가장 날카로운 질문이었던 것 같다"며 분위기를 무마하기만 했다.
특히 삼성 비자금 국면에서 그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정동영식 좌회전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는 사법적 절차에 해당하는 '특검제 도입'을 거론했고, 삼성의 비자금 관리 사실에 대해 "창피한 느낌"이라고 감정적 토로까지 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당의장 시절 자신이 약속한 2002년 불법대선자금 환납 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가 없다. 액수의 크고 작음을 떠나 '삼성의 로비체제'에 편입됐던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것이다.
정 후보가 이러한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아무리 이명박-이회창 두 후보에게 각을 세운들 믿음직한 개혁세력의 아이콘이 되기는 어렵다. 특히 정 후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만든 유권자들은 지난 5년간 배반의 정치를 지켜본 이들이 아닌가. 민심을 얻기 위한 '씻김굿'도 없이 선거구도에 기대 '떡'을 챙기려는 심산은 성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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