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비정규직, 발로 차는 노조…희망은 없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비정규직, 발로 차는 노조…희망은 없다"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26> 다시 생각하는 '노동운동의 ABC'

최근 한국의 유명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의 정규직 노조원들이 사내하청(비정규직) 노조원들의 노조 가입에 대해 찬반투표를 거쳐 끝내 부결시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사실을 들으면서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운동의 ABC가 무너지고 있구나'라는 씁쓸함이 내 속을 휘감으면서 필자의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한 10년 전. 당시 한국에서 필자는 지방의 자동차 공장을 다니며 노사관계의 변화양상을 조사연구한 경험이 있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장의 분열양상이 심화되고 있는 정황을 접하면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사내하청은 이미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필자의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한 노조 간부는 "사내하청 근로자들은 정규직에 대해서 계급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며, 필자가 그 도시에 체류하는 내내 연일 한숨을 푹푹 쉬었다(그는 현재도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동운동 진영에서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며 진정성있게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정규직이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스스로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시대마저 도래한 것이다.

'노동운동의 ABC' 지키는 독일의 노동조합

최근 한국의 모 언론사에서 독일의 비정규직과 노동운동의 대응에 대해 모범 사례를 발굴하기 위해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을 방문했다. 취재진과 함께 동행한 필자는 자문과 통역을 해주면서 현장과 노조를 직접 방문하며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줬다.

중견 철강산업회사인 D사를 방문했는데, 그 지역의 독일 금속노조(IG Metall)로부터 '비정규직 대응을 잘 해 가고 있는 곳'이라고 소개를 받은 곳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와 필자, 그리고 금속노조측의 비정규직 대책특별위원회 관계자는 함께 D사를 찾아갔고, 그곳의 종업원평의회(Betriebsrat - 한국식 기업별 노조) 의장과 면담을 한 후에 현장을 시찰했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바로 그 '노동운동의 ABC'가 서슬 퍼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소위 '일본식 생산방식' 내지 '얇은(Lean) 생산방식'이 1980년대부터 세계를 석권한 이후, 시장의 흐름에 따라 생산을 조절하는 유연한 생산시스템에 대한 요구와, 그에 부응해 필요한 고용 유연성의 증대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세계시장에서 품질과 가격으로 경쟁을 하는 모든 자동차 회사들에게 불가피한 변화로 받아들여져 왔다.

여기에서 관건은 노동조합이 그러한 유연성의 불가피함을 수용하면서,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뭉뚱그려서 안정성이라고 표현한다면, 지난 약 20년간 전세계 자동차회사의 사업장에서는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 간의 교환(exchange)이 명시적이고 암묵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고 그 과정에서 작업장내 조직과 질서는 새롭게 재편되어 왔다.

당일 방문한 D사에서도 사측은 비정규직의 확대를 추구해 왔다. 사내 종업원평의회는 당연히 비정규직의 확대를 막으려고 하면서, 유연하고 합리적면서도 지혜로운 내용으로 전략적 선택을 취했다. 그를 위해 일단 비정규직의 도입을 허용했고, 그 과정에 처음부터 개입했다. 그러면서 노사간에 비정규직과 고용유연화와 관련한 기업협약(Betriebsvereinbarung)을 체결해 이를 상호 공식화하였다.

D사의 종업원 평의회는 비정규직의 도입을 수용하는 대신 두 가지의 결정적인 단서조항을 달았다. 하나는 비정규직 규모의 상한선을 전체 종업원의 10%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매년 노사가 함께 검토를 한 후 10%가 넘는 경우 이듬해에 나머지는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킨다는 원칙도 덧붙였다. 두 번째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 따라 차등없이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유연성을 수용한다는 노동자들의 이해대표체의 태도에 사측은 '감지덕지'하며 이 협약을 2000년대 초에 조인했다. 그 이후 이 원칙은 이 사업장에 유효하게 유지되어 오고 있다. D사의 종업원 평의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원칙, 정규직으로의 전환 가능성 등의 카드를 비정규직들의 노조가입을 유인하는 인센티브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D사에 존재하는 10%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입사 이후 100% 금속노조의 노조원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D사의 근로자 대표는 유연화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되, 그것이 공장 내 근로자들간 연대의 원리를 파괴하고, 임금근로자의 분열과 불안정, 궁극적으로 "노예화"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을 작업장 내에 구축해 갔다. 사측으로부터는 일정한 수준에서 유연성 확대를 양보하면서, 결국 그 카드를 통해 새로운 연대성의 창출과 노조조직력 확대의 계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실 독일 노동운동 역시 비정규화에 대해 그간 제대로 대응해 오지 못했다. D사의 사례는 매우 모범적이지만, 노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런 사업장은 지극히 소수에 속한다. 최근 독일의 노조는 전략을 바꾸어 기존의 종업원평의회가 주체가 되어 이 문제를 풀어가는 해법을 마련하는 쪽으로 흐름을 만들고 있다.

당일 만났던 금속노조의 한 관계자는 사업장이야말로 자신들의 "홈구장"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문제를 잘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필자는 이날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 종업원평의회, 즉 정규직 기업노조의 역할과 전략이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데 있어 대단히 힘이 있고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연대하고 또 연대하라

그럼 이제 한국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내하청 근로자들의 노조가입을 거부한 자동차회사 정규직 노조의 조합원들의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요인들이 있을 테지만, 그 어떤 변명도 노동운동의 상식에서 벗어난 이런 행동을 쉽게 정당화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파견근로자들을 노조원과 정규직으로 통합시키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밥상을 걷어찬 꼴이 아닐 수없다.

노동운동이 기업내에서 스스로 연대(solidarity)의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사회적 연대의 중심에 정규직 노조원들을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와 유연화 공세가 도전이라면 단기적인 이익, 소아적인 기득권에 집착하는 대응은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시장 논리에 무릎 꿇도록 만들 뿐이다. 연대의 원칙을 훼손하고 방치하면 근시안적인 선택을 한 정규직 조합원 자신에게 몇 년 후 화살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현재 한국에서는 산별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상당히 활발하다.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그러한 시도의 가장 큰 정당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깊어질 대로 깊어지고 넓어질 대로 넓어진 강물 위에 다리를 놓아 이어보자는 취지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현장에서 공사중인 다리를 정규직이 나서서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는 꼴이다.

한국 노동조합의 노동시장 정치는 더 이상 외부만을 향해 소리를 높이는 '요구의 정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토론하고, 투쟁하고, 함께 세우는"(Diskutieren, Streiten, Mitgestalten) 정치가 되어야 한다. 이는 30년간 독일의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의 잘츠기터(Salzgitter)지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어 온 산 증인들 30여명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지난 시절 기업내 노동운동의 발전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담은 안드레아 에크하르트(Andrea Eckhardt)라는 연구자가 몇 년 전 독일에서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 이 책에서는 현장에서 원칙과 이니셔티브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해 온 독일 자동차 회사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히 읽을 수 있다.

한국의 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은 현장과 지역에서부터 비정규직과의 '연대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조직적 차원의 연대와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적이고 감성적인 유대를 구축하는 노력부터 진행되어야 하며 그를 통해 작업장 질서를 서로가 "함께 세우는" 모양새로 나아가야 한다.

내적 응집력과 연대도 갖추지 못하고 국가와 자본에 대해 내세우는 요구와 비판은 호소력이 떨어진다. 정규직으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정부와 자본에게 별을 따내라고 소리치면서 땅에서는 비정규직을 발로 차고 있다면 이는 이율배반도 한참 이율배반이다.

정규직 노조원들에게 고매한 도덕군자가 되어 줄 것을 결코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연대와 단결을 생명으로 하는 노동운동의 통 큰 원칙을 지켜주면서, 고삐 풀린 시장만능의 시대에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는 진지로 노동조합이 생명력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일 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