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선물을 받아 고마운 마음에 "교수님의 <곁에서 본 김정일>은 대학원 북한정치 시간에 필독서 중 하나였죠"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건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사실이 그랬다. <곁에서 본 김정일>은 기자가 다녔던 대학원의 '북한정치연구' 시간에 '김정일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혔었다.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수업 시간에 발제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당시에는 그 책을 믿지 않았다. 그냥 시중에 떠도는 그저 그런 김정일 평전 중 하나려니 생각했었다. 교수가 추천한 책이니 개중 낫겠지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어떤 방향으로건 편견이 들어갔고(그렇다고 기자가 제대로 된 시각을 가졌다는 건 아니다) 부정확한 정보나 담긴 책인 줄 알았다. 정창현 교수가 누군지 몰랐을 때다.
한참 시간이 지나 정 교수를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이다. <프레시안> '한반도브리핑'의 필자로, 큰 사안이 터져 전문가 좌담을 할 때면 단골로 초청하는 전문가로,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한 기사를 쓸 때 가장 친절하게 코멘트를 해 주는 '자문역'으로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곁에서 본 김정일>이 편견에 사로잡힌 책일 것이라는 편견은 사라졌다.
그건 물론 정창현 교수의 정보와 분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정상회담 직후 찾아온 주말, 회담 결과를 나름대로 '소화'해 보려고 <프레시안>에서 나갔던 여러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기자의 그런 판단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이번 정상회담에 관한 그의 여러 가지 예측이 대부분 사실로 귀결됐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기사검색란에 '정창현'을 치고 한 번 읽어보시라)
"때를 기다려 올인하는 전략"
이번에 나온 <김정일>(중앙books 刊)은 그 <곁에서 본 김정일>의 개정증보판격이다. 굳이 개정증보판 '격'이라고 한 것은 초판을 기본으로 해서 사실상 다시 쓴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곁에서 본 김정일>은 조선노동당의 고위인사를 지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까까이서 지켜봤던 신경완 씨의 증언을 토대로 쓴 김정일 평전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김정일>에서 초판 발간 이후 새롭게 확인된 사실에 맞게 대폭 수정했을 뿐 아니라,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과 남측 언론사 사장단 면담 때 보여준 '김정일의 모든 것'을 보강하면서 그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했다.
'CEO 김정일'은 그러한 새로운 해석이 압축된 표현인 셈인데, 필자가 김정일의 리더십 스타일을 묘사한 부분을 읽다 보면 '최고경영자'라는 성격 규정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카리스마는 조직과 사람에 대한 장악력과 정보에서 나온다. 학습→검열→인사로 이어진 그의 조직 장악력은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후광' 정도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인터넷, TV, 영화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획득하고 국제정세를 파악한다. 그의 정보력은 다시 조직 장악력을 높인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에게 보고되는 최종 보고서가 올라올 때까지 실무 부서와 관련된 부서들 간에 '끝장 토론'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최종 입장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지만 일단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김정일 위원장이 결단을 내리면, 일사분란하게 집행된다.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과 추진력은 여기서 나온다."
기쁨조는 있나?
사실 김정일이 CEO까지는 아니더라도 국가 최고지도자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라는 것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대충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 관련 기사를 쓰면 밑에 댓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쁨조'다. 따라서 김정일을 조망하는 이 책에서 기쁨조의 실상을 밝히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고, 그 자극적인 소재로 맨 처음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쁨조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조의 존재를 주장했던 망명자들은 북한에서의 직위가 불분명했고, 분명한 위치에 있었다 하더라도 김일성 부자의 사생활까지는 알 수 없는 낮은 직급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신경완 씨는 기쁨조란 존재하지 않으며 외국인을 상대하는 공연단을 오해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필자는 이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사례에서도 증명되듯 기쁨조의 실체와 별개로 여자 문제, 습관, 신체적 결함이 곧 리더십의 결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또 귀순자들의 증언이 여과 없이 월간지나 주간지에 인용되면서 그 정확한 실체와 관계없이 김정일에 대한 '호색한' 이미지를 심어줘 김정일에 대한 이해 자체가 선정적이고 통속화될 위험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이 책은 기쁨조 논란 외에도 김정일과 북한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방해했던 한국 사회의 오래된 편견을 깰 수 있는 자료와 증언을 제시하며 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에 대해 "미몽에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 똑똑했다"고 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판단력이 예리했고 감수성이 매우 강한 인물"이라고 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2차 정상회담 성사 과정 퍼즐 맞추기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전까지의 막전막후를 상세히 소개한 1장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부분은 지난 해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의 한반도 정세를 한 눈에 조망하게 해 준다. 개별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어 보였던 갖가지 일들이 정세 변화에 어떤 영향을 줬고 어떻게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는지 퍼즐을 맞추듯 보여주고 있다.
2년 동안 남북관계를 담당했던 기자가 그야말로 엊그제 벌어진 일들을 읽어 내려가며 '아, 이런 사실이 있었지' 혹은 '이게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하고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부끄럽고 고통스런 경험이었다.
특히 김양건의 통일전선부 부장 취임, 21차 남북장관급회담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이 밤늦게 회담장에 찾아왔던 일,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장관급회담 와중에 청와대로 들어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던 일 등을 읽을 때는 그 사실을 특종 보도했던 타사 기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면서 '정보성 보도'를 마냥 무시해서도 안 되겠다는 '소박한' 생각도 하게 됐다.
다만 2차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김정일 위원장의 새로운 모습이 빠졌다는 것은 김정일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른 타이밍에 책을 내야 한다는 마케팅상의 숙명 때문이었겠지만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남측이 제시한 거의 모든 아이디어를 수용한 김정일 위원장의 결정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전략적 결단'이었다는 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충분하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또 한 번의 증보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이라는 다자 정상회담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김정일의 모습까지 담는 증보판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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