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는 "병역 이행이라는 국민의 의무와 소수 인권 보호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병역거부 분위기의 확산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를 강구한다는 차원에서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 분야를 가장 난도가 높은 부문으로 선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지난 6년여 동안 한국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어온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해결의 가닥이 잡히게 된 것이다. 크게 환영할 일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일제하 독립운동이라더니 징역형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01년 초 <한겨레21>의 한쪽 짜리 짧은 기사가 반향을 일으키면서부터지만, 그 역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일본에서 징병제가 확대되면서 일본내 '여호와의 증인'들이 병역을 거부하자 일제는 1939년 조선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도 탄압을 가하여 신자 38명을 투옥하였는데, 이들 중 5명은 옥사하고 나머지 33명은 신앙양심을 지키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옥문을 나섰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은 그저 신앙양심을 지켰을 뿐이라고 했지만, 정부기관이 편찬한 각종 독립운동사에는 이들의 '등대사 사건'이 일제 말기의 주요한 저항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일제하에서나 독립된 대한민국에서나 똑같은 행동을 하였을 뿐인데,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일제 말기의 행동은 독립운동으로 평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의 행동은 엄히 처벌해온 것이다.
'빨갱이' 인권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드러난 '양심적 병역 거부'
인권운동가들조차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사이 정부수립 이후(실제 광범위한 처벌은 5·16군사반란 이후) 무려 1만 3천명에 달하는 병역거부자들이 묵묵히 징역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제기된 시점도 매우 상징적이다. 19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여러가지 인권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비전향 장기수의 석방과 북송 문제가 첨예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의 출범으로 고령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두 석방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로 비전향 장기수가 북송되면서 90년대 내내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인권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문둥이'보다 더한 천형이라 낙인찍힌 '빨갱이'들이 아닌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문제는 극도의 반공지상주의, 국가주의, 군사주의가 판을 친 한국에서 '빨갱이'의 인권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드러난 그런 문제였다.
징역 '3만년'…이렇게 엄한 처벌은 한국뿐
병역거부자의 99퍼센트는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이들이 산 징역 햇수를 모두 합하면 족히 3만년은 된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여섯배쯤에 해당하는 징역을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산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남을 해친 것도 아니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인 총을 드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과연 이 일이 그토록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을까?
전세계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도 많지만, 한국처럼 엄하게 처벌하는 나라는 없다. 전세계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수감자 900여명 중 현재 830여명이 한국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르완다가 근 300여명의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었지만, 내전의 종식과 함께 이들을 석방한 바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군사대국, OECD 가입국,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이제야 이런 불명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남과 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의 길을 열어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나, 일제시대에는 할아버지, 군사정권시절에는 아버지, 그리고 민주화되었다는 오늘날에는 아들, 이렇게 3대가 감옥에 가는 현실을 보면 시기상조가 아니라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복무제, 군의 효율적 운영에 기여
2001년 처음으로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된 뒤부터 따지면 약 4천명, 2004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각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것을 행정부와 입법부에 권고한 다음부터 치면 2천여명의 청년들이 전과자가 되고서야 이번 조치가 발표되었다.
일부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사회복무제로 포용하는 조치가 국방력을 약화시킬 것이라 하나, 오히려 군의 효율적 운영과 병역제도의 개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선 군부대에 가보면 지휘관들이 큰 부담으로 느끼는 것은 이른바 '문제사병' '관심사병'이라 불리는 복무 부적응자들에 대한 '관리' 문제이다. 일선 지휘관들은 이들이 혹시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이들의 '관리'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2000년에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한 타이완의 경우, 열악한 복무환경과 형편없는 사병의 인권상황으로 인해 해마다 군대 안에서 많은 인명사고가 발생했는데,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복무 부적응 사병이 될 소지가 있는 청년들이 사전에 대체복무제를 지원함으로써 사고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공론화, 현역병 복무환경 개선의 계기
한국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얻은 성과 중 하나는 사병들의 복무환경과 인권상황이 크게 개선되었다는 점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에서도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여론을 우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현역병들의 복무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군인인권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2002년 일당 7백원, 월 2만원 정도에 불과하던 사병의 급여는 아직도 급여라 부르기에는 미흡하지만 올해 기준 평균 8만 8천원으로 4.4배 인상되었다.
군인 인권은 아직도 적잖은 문제를 갖고 있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인권상황이 가장 많이 개선된 부분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군당국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를 종교적 이유 '등'이라고 하여 종교적 이유의 병역거부자들에 국한하지 않고 일정한 선택권을 부여한 것은 잠재적인 '복무 부적응자'들을 대체복무로 유도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군인 인권과 복무환경 개선에 대한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그동안의 뜨거운 논쟁에 비하면, 막상 정부의 방침 발표 이후에는 반대 목소리가 높지 않은 편이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도 대체복무제 실시를 기정사실화하면서 병역기피에 악용되지 않도록 감독과 운영을 잘해야 한다는 선으로 물러섰다.
사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들을 계속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UN "대체복무 기간 너무 길다" 비판
이번 정부의 조치는 큰 흐름에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시행이 2009년으로 미루어져 있는데, 여러가지 실무적인 준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현정부 임기 내에 입법화 등 가시적인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당장 입영통지서를 받아놓고 있는 사람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할 경우 이들을 계속 잡아들여 감옥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매년 7∼800명의 병역거부자가 나오는 현실, 즉 하루에 2∼3명의 병역거부자가 나오는 현실에서 이들의 입영연기와 고소고발 취하 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아가 현재 수감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각각의 조건에 따라 가석방, 형집행정지 등의 전향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반대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국민들이 보기에 대체복무의 기간과 조건이 충분히 '가혹'하기 때문일 것이다.
병역거부자들 입장에서 한센병환자 재활기관이나 결핵요양소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겠지만, 현역복무의 2배라는 긴 기간은 재고되어야 한다. 유엔도 대체복무 기간을 현역복무의 2배로 잡는 것은 너무 길며 징벌적 성격을 띤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노무현정권은 출범 이후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확대 등 노동운동 상황의 악화, 국가보안법 폐지의 좌절, 양극화 심화, 한미FTA 강행 등으로 지지기반이었던 진보-개혁진영을 계속 실망시켜왔다. 그나마 이번 조치가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여전히 문제가 많고 더디기만 하지만)과 함께 그래도 노무현정부니까 이 정도라도 했다는 평가를 받게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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