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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라는 디자이너

[지상현의 Homo designans·11]

쌀키, 최고의 디자인

세상에는 1, 2년 반짝 하다 사라지는 물건도 있지만 몇 십년, 몇 백년 애용되는 물건도 있다. 용도가 없어지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물건들은 어포던스(affordance)가 높고 형태가 아름답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어포던스는 "~을 주다", "~을 낳다" 등의 뜻을 가진 afford의 명사형이다. 어떤 물건의 어포던스가 높다고 할 때에는 사용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많은 외국인들이 처음 본 쌀키를 제대로 잡고 위아래로 흔든다. 쌀키의 어포던스가 매우 높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 심리학자는 쌀키를 최고의 디자인으로 꼽는다.
▲ ⓒ프레시안

사물은 저마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어포드하는 것이 있다. 예컨대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손잡이를 두 개 연이어 잡는 경우가 많다. 손잡이의 흔들거림과 쥐는 방향이 그렇게 잡도록 어포드하고 있는 것이다. 공항의 경계라인의 지지대는 사람을 모은다. 지지대 뒤에 있어야 더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인데 이 경우도 지지대가 그 뒤에 설 것을 어포드 한다고 볼 수 있다.
▲ 필자도 이렇게 두개의 손잡이를 함께 잡아 본 적이 있고 공항 입국장에서는 경계라인 지지대 뒤에 서곤 한다. 지지대 사이의 간격에 서있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프레시안

어포던스가 높아져 최적화된 기능성을 갖게 되면 세련미 역시 최고에 달하게 된다.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이라는 말처럼 기능과 아름다움은 함수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각국의 민속품에서 영감을 얻으려 노력한다.

기능이 형태를 결정한다

어떤 예술가나 디자이너도 세월이 다듬은 형태보다 뛰어난 것을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계류에 깎여 둥글둥글해진 자갈들처럼 초기의 조야하던 형태는 세월과 더불어 스스로 최적화하고 아름다워진다. 몇 백년의 손때를 거쳐 다듬어진 쌀키의 모습도 처음에는 조잡했을 것이다.

몇 백, 몇 천 년에 걸쳐 민속품을 다듬은 세월의 힘을 미루어 짐작케 하게 하는 것이 초기 도자기의 형태와 문양이다.
▲ 왼쪽부터 기원전 3000년 경, 기원전 2000년 경, 5~6세기(신라, 경북 경주 노동동 출토), 5~6세기 경(신라, 경북 울주 삼광리 출토) ⓒ프레시안

맨 왼쪽은 기원전 3000년 경의 빗살무늬 토기다. 이 형태가 서기 5~6세기 경에 이르면 맨 오른쪽과 같은 형태로 변화한다. 물론 빗살무늬 토기가 이런 형태로만 발전한 것은 아니다. 용도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발전하지만 그 중 하나를 예로 든 것이다. 이것들 가운데 기하학적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는 맨 오른쪽의 삼광리에서 출토된 신라 토기다.
▲ ⓒ프레시안

정원에 가까운 타원에 직사각형을 관통시키면 토기의 모양이 나온다. 반면 초기의 빗살무늬토기는 얼핏 단순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형태를 재현하려면 쉽지 않다. 곡선의 곡률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빗살무늬토기가 맨 오른쪽의 토기보다 복잡하다는 데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른쪽 신라시대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가 갖지 못한 안정감과 용량을 확보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우수한 기능에는 구조적 복잡함이 수반되기 쉽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토기(노동동 출토)가 그런 예다. 이에 비해 삼광리 토기는 기능에 수반되는 복잡함과 단순성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형태 기억테스트를 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보지 않고 가장 정확하게 형태를 재현해내는 것은 맨 왼쪽 빗살무늬 토기와 맨 오른쪽 삼광리 토기인데 실제 구조의 복잡성을 감안하면 삼광리토기가 최고의 단순성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토기 표면의 문양도 그렇다. 표면 전체를 균질하게 뒤덮고 있던 빗살무늬는 점점 국소화 돼 5~6세기 경에는 중앙에만 띠처럼 몰려 있다. 보아스(Boas)라는 인류학자는 로마의 토기에서 이와 같은 경향을 발견하고 Good Gestalt(단순하면서 좋은 형태를 뜻하는 독일어. Gestalt 심리학파로 유명)를 추구하려는 동기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작용한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함의 미학

이런 토기들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갖고 있으며 어포던스도 매우 높다. 비슷한 사례를 최근의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수십년동안 계속 그려져 온 만화캐릭터들이다. '고바우 영감', '나대로', '루리'와 같은 신문 시사만화나 미키 마우스 같은 캐릭터들은 얼핏 보아 초기의 모습그대로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조금씩 알게 모르게 변하면서 현재의 세련미를 갖게 된 것이다.
▲ 왼쪽은 1928년 작 미키와 증기선에 나오는 모습이고 오른쪽이 현재의 모습이다. ⓒ프레시안

예컨대 미키마우스를 보자. 초기의 형태는 매주 3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소화해내기 위해 나름대로 가장 간단하면서도 귀여운 형태로 개발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현재의 미키마우스는 다른 모습이다. 위의 그림에서 왼쪽은 "미키와 증기기관선"에 나오는 초기의 모습이고 오른쪽이 현재 모습이다. 누가 보더라도 현재의 모습이 더 세련됐다고 느낄 것이다. 세월의 힘이다.

이런 세월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다. 보아스가 말했듯이 가급적 단순한 구조를 추구하려는 마음이 미키마우스의 모난 부분들(복잡한 구조)을 다듬어 단순한 형태가 되도록 이끈 것이다. 세월은 이렇게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모난 부분들을 드러내고 스스로 다듬는다. 아래 그림을 보면 최근의 미키 마우스가 초기에 비해 얼마나 단순한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예컨대 초기의 미키 마우스 이마의 선을 수학의 함수로 표현한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빗살무늬 토기에서처럼 하나의 함수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것은 동그라미를 그리면 된다. 전체적인 형태는 더 단순하다. 크고 작은 세 종류의 동그라미만 있으면 미키마우스를 그릴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미키마우스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고바우와 같은 오랜 세월 연재된 만화 캐릭터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고 피카소와 같이 시간을 초월한 천재의 작품에서 드물게 볼 수 있다.
▲ 현재의 미키 마우스는 세 동류의 동그라미만 있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구성원리가 단순해져 있다. ⓒ프레시안

필자가 좋아하는 디자인이 있다. 쌀키 만큼 오래되지는 않았겠지만 미키마우스 보다는 오래 사용되고 다듬어진 형태를 갖고 있다. 다름 아닌 '벤치'다.

아마 100여 년 전 쯤 유럽의 어디에선가 등장했을 벤치는 큰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큰 변화가 없다고 했지만 의자의 역사 속에서 보면 많은 변화를 겪어 나름의 단순미와 절제미를 확보한 것이 벤치다.

긴 막대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평행하게 엮은 구조는 빗물이나 먼지가 쉽게 흘러가게 하고 적당하게 기울어진 등받이는 행인의 지친 근육을 적당한 수준으로 풀어준다. 지나치게 풀어주면 다시 일어나 걷기 싫어질 것이라는 점도 벤치의 형태에는 알게 모르게 반영돼 있는 것이다.

이뿐인가. 재질이 나무여서 겨울에는 차갑지 않고 여름에는 뜨겁지 않다. 길이도 한 사람부터 두 세 사람까지 앉을 수 있어 적당히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다. 단순하고 튀지 않는 형태 덕분에 어디에 갔다 놔도 주변 속에 녹아 들어간다. 예컨대 가을의 낙엽 진 공원이나 돌담길과 벤치의 소박한 형태가 어우러져 풍기는 서정성을 생각해 보라.

이런 형태는 오래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환경에는 이런 요소가 중요하다. 벤치가 화려해지고 돌출하게 되면 당장은 좋은 것 같지만 금방 싫증나게 된다.

서울시의 벤치 디자인 공모, 제대로 되려면?

서울시에서 서울의 벤치를 예술적으로 다듬기 위한 사업을 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벤치 디자인 공모를 받아 시민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이 사업에 전문 디자이너들도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공모된 디자인들을 보면 액자형에서 원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들이 출품되었다.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는 벤치 등 몇 개 흥미로운 것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이다. 튀기는 하겠지만 환경 속에 녹아들어 갈 것 같지는 않다. 거리에 또 하나의 아이캣쳐(eye catcher: 시선을 끄는 요소)가 추가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필자는 왜 벤치가 시급한 개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현재의 벤치가 문제라면 그것은 벤치 위에 음식과 신발자국을 남기고 각종 광고물을 덕지덕지 붙이는 시민의식, 시멘트로 만들어 놓고 나무처럼 색을 칠해놓은 관료들의 심미적 교양이 큰 원인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벤치의 형태는 이미 오랜 세월 다듬어져 민속품 못지않은 절제미와 단순미에 도달해 있다.

물론 외국에도 예술적이고 '튀는' 벤치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미술관 앞이나 고급 쇼핑가 등 제한된 구역에만 사용된다. 실제로 가보면 그런 예술적인 벤치에 앉아 쉬는 시민도 거의 없다. 아마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등 특별한 곳에는 좀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벤치디자인도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지역에는 기존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벤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훌륭한 의사는 치료할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을 구분한다고 한다.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디자인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구별하는 것도 디자인이이기 때문이다.

기왕 시작한 벤치디자인 개선사업이 예산낭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디자인 지상주의에 빠지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 일본 롯본기 모리 빌딩 앞 고급 쇼핑가에 있는 예술적인 벤치들. 그 밖의 대부분의 지역에는 우리와 비슷한 벤치가 놓여 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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