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은) 이 뒤로부터 젊은 미남자 두세 명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기니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제 마음대로 방자하게 날뛰고 재물로 뇌물을 먹이는 일을 공공연하게 하였으며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풍기와 규율이 문란하여졌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도 기이편 '진성왕 거타지'조 앞부분에서 정치의 문란을 논하고 있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 잡간(匝干) 등 3, 4명의 총신(寵臣)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陀羅尼)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신들이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왕거인(王居仁)이 아니고야 누가 이런 글을 지을 수 있겠느냐.' 이리하여 거인을 옥에 가두자 거인은 시(詩)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이에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거인을 풀려나게 했는데 (…중략…) 다라니에는 이르기를, 남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라고 하였으니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찰니나제'란 여왕을 두고 하는 말이요, '판니판니소판니'란 말은 소판(蘇判)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 소판은 관작의 이름이요, 우우(于于)는 세 아간(阿干)이요, 부이(鳧伊)는 부호부인을 두고 말한 것이다."
조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왕거인을 투옥했다가 석방시킨 사건은 『삼국사기』 진성왕 2년조에도 나오지만, 나는 그 사건보다는 『삼국유사』 기사 중의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 잡간'이라는 귀절을 주목한다. 위홍에게는 부호부인이라는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 주는 조선시대의 문헌이 있다. 조선조 성종 21년 경술년(1490년) 봄 해인사의 비로전을 중창할 때 들보 끝에서 발견된 해인사의 매전장권(買田庄券), 즉 토지매입문서를 보고 유학자 매계(梅溪) 조위(曹偉)가 쓴 '서해인사전권후(書海印寺田券後)'라는 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위홍 사후의 정황과 함께,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에 관한 시사(示唆)도 얻을 수 있다. 관련 대목을 끌어와 본다.
"을사년(885년, 헌강왕 11년) 이전은 다만 북궁해인수(北宮海印藪)라고 칭하다가 경술년(890년, 진성왕 4년) 이후에 비로소 혜성대왕 원당(願堂)이라고 칭한 것은, 대개 각간 위홍이 무신년(888년, 진성왕 2년) 2월에 죽으니 실로 진성여주(眞聖女主) 2년이었다. (진성여)주는 위홍이 사사로이 모시는 총애를 생각하여 혜성대왕으로 추봉하니 즉 이에 이른 혜성(惠成)이라는 것은 위홍임이 의심할 바 없고, 강화부인(康和夫人)이라는 것은 또한 반드시 위홍의 처이다. 진성(여왕)은 효공왕에게 위(位)를 전하고 12월 북궁에서 죽으니 즉 저으기 생각컨대 해인사가 위홍의 원당이라. 그러므로 (진성여)주가 위를 버리고 권력을 놓은 후 오로지 사모하는 생각으로 불우지중(佛宇之中)에 몸을 맡겨 마침내 여기에서 죽으니 그 동혈지지(同穴之志)하고자 함이 또한 분명하다."
(권영오, '김위홍과 진성왕대 초기 정국 운영'에서 재인용)
이 글에는 우선, 해인사를 북궁해인수로 부른 착오가 있다. '해인수'의 수(藪)는 물론 '절'이라는 말이다. 북궁은 서라벌에 있었던 궁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경주시 성동동 전랑지(殿廊址)로 추정되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북궁 관계 기록은, 혜공왕 때 "북궁 뜰에 별이 떨어졌다"든가, "진성여왕이 북궁에서 죽었다"든가, 진성여왕이 왕이 되기 전의 호칭이 '북궁 장공주(長公主)'였다든가 해서 모두 경문왕가와 관련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북궁이라는 말은 경문왕가의 거주지, 나아가 경문왕가를 가리키게 되었고 해인사가 경문왕가의 원찰이 되면서, 북궁해인수라는 말이 '북궁의 원찰인 해인사'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경북대 문경현 교수의 해석이 있다. 따라서 북궁해인수가 혜성대왕 원찰로 바뀌었다는 것은 북궁과 해인사가 별개임을 알지 못한 매계의 착오로 볼 수 있다.
만일 북궁해인수라는 말이 '북궁의 원찰인 해인사'라는 뜻으로 쓰였다면,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과 관련한 수수께끼도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보전 바로자나불은 그 조성 연대가 헌강왕대임이 분명하므로 위홍이나 진성여왕과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나머지 하나의 비로자나불까지 포함시켜, 이 두 불상은 특정인을 위한 원불로 보기보다는 경문왕가의 성원(成員) 전체의 원불로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
다시 매계의 글로 돌아가 보면, 매계가 "저으기 생각컨대 해인사가 위홍의 원당이라. 그러므로 (진성여)주가 위를 버리고 권력을 놓은 후 오로지 사모하는 생각으로 불우지중[절간]에 몸을 맡겨 마침내 여기에서 죽으니 그 동혈지지[같이 묻히고자 뜻함] 또한 분명하다. 운운" 하여 진성여왕이 위홍을 못 잊어하다가 해인사에서 죽었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이 대목에 대해서, '김위홍과 진성왕대 초기 정국운영'이라는 논문의 필자 권영오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지나친 비약"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나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위홍의 죽음이 진성여왕에게 개인적인 슬픔이 될 수 있었겠지만 매계의 표현처럼, "권력을 내놓은 후 오로지 위홍을 사모하는 생각으로 슬퍼하다가 해인사에서 죽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진성여왕은 일국의 왕이었다. 그리고 왕이라는 자리는, 아무리 숙부라고 하지만 결국은 신하였던 위홍의 죽음에 매달려 슬퍼만 할 수 있는 그런 한가한 자리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위홍 사후의 정세를 살펴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위홍이 죽은 후, 국정의 문란은 해를 넘기면서 점점 심해져서 진성여왕 3년에 이르면 "국내 여러 주, 군들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들이 텅 비고 국가의 재정이 곤란하므로 왕이 사신들을 파견하여 독촉을 하였더니, 이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또 진성여왕 5년에는 북원의 양길이 부하 궁예를 시켜 10여 군, 현들을 습격하고, 그 이듬해에는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라고 자칭하여 봉기하고, 진성여왕 8년에는 궁예가 북원에서 하슬라로 들어오며 장군으로 자칭하기에 이르러 나라 전체가 내란 상태에 돌입한다.
이런 와중에서 진성여왕은 재위 9년째 되던 해에, 위홍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숙원을 풀게 된다.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 요(嶢)를 찾아내서 태자로 삼음으로써 즉위 초부터 고민해오던 후사(後嗣)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진성여왕이 재위 말년에, 그동안 아마도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요를 태자로 삼게 되었다는 대목은 참으로 느닷없는데, 『삼국사기』 진성왕 9년조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이렇다.
"겨울 10월에 헌강왕의 서자 요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지나가는 길 옆에서 왠 여자의 자태가 아름다움을 보고 왕이 마음속으로 사랑하여 후거(後車)에 명하여 태워가지고 행재소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곧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아이가 장성함에 따라 체모(體貌)가 영특하여 이름을 요라 했다. 진성왕이 듣고 그 아이를 궐내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의 형제 자매의 골상(骨相)은 남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아이도 등에 두 뼈가 솟았으니 참으로 헌강왕의 아들이라'하고 이내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를 갖추어 태자로 숭봉(崇封)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요를 태자로 책봉한 지 2년이 되는 11년 6월에 진성여왕은 뜻밖의 결단을 내린다. 좌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부덕한 까닭이다. 현인(賢人)을 피하여 나의 위(位)를 넘겨주려 함에 나의 뜻이 결정되었다."라고 하면서 신라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왕위 선양(禪讓)을 천명하면서 왕의 자리를 요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렸다.
"…… 질남(侄男) 요는 망형(亡兄) 정(晸)의 아들로 나이가 거의 지학(志學, 15세)이고 그 바탕은 가히 종통(宗統)을 일으킬 만하기에 달리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정하여 근일에 이미 정치를 섭행(攝行)케 하여 국재(國災)를 진정(鎭定)하려 합니다."
진성여왕이 태자 요에게 선위하고, 당나라에 표문을 올렸던 데에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선양이라는 절차에 의해 요에게 왕위를 물려준 데에는 태자 요가 지닌 치명적 약점을 커버하려는 복선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골품이 반드시 진골이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었는데 요는 서자 출신이어서 진골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진성여왕은 진골이 아닌 요에게 왕위를 전하기 위해 선양이라는, 말하자면 편법으로 선수(先手)를 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당나라에 올린 표문에서, "달리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정하여 근일에 이미 정치를 섭행했다"고 말한 것도 선양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보다, 당나라에 표문을 올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선양과 요의 왕위계승을 추인받음으로써 이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부적격한 후계자에 의한 왕위 계승에 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성여왕은 이렇게, 위홍이 이루지 못했던 경문왕계의 왕위 계승을 재위 말년에 이루어냈다. 그리고는 상왕으로 물러나 있다가 진성여왕 11년 겨울 12월에 북궁에서 죽었는데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하였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는 "화장(火葬)에 붙여 뼈를 모량 서악에 흩었으니 이 산을 미황산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화장에 붙여 뼈를 모량 서악에 흩었다."는 귀절에서 나는 왠지 쓸쓸함을 느낀다. 그 쓸쓸함은 『삼국유사』의 기사가 진성여왕의 개인적 삶의 끝자락을 보여줄 뿐 아니라, 나아가 신라 왕조의 최후를 예견케 해 준다는 데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진성여왕이 그렇게도 집착했던 경문왕가에 의한 왕위 계승, 보다 정확히 왕위의 독점은 진성여왕의 바로 다음 대인 서(庶)조카 효공왕 대에서 끊어지고, 이후 왕위는 박씨들에게 잠시 건너가서 3대를 내려가다가, 56대 경순왕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국토를 고려 태조에게 바치고 귀순함으로써, 신라 천년 사직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