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에서 통영의 랜드마크가 된 동피랑 (사진: 이상희) |
붓 한 자루로 우주선을 띄우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쫓아낼 권리가 대체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 나라 곳곳에서는 그런 무자비한 폭력이 일상화 되어 있다. 그러나 통영은 다르다. 2007년 통영시에서도 동피랑 재개발 계획을 세웠었다. 동피랑 꼭대기에는 옛날 통영성의 세 망루 중 하나였던 동포루 터가 있다. 시에서는 동피랑 마을을 전부 철거한 뒤 동포루를 복원하고 그 일대는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때 오래된 마을과 골목, 삶의 흔적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방의제 추진기구 '푸른 통영 21'에서 재개발 대신 보존을 제안했다. 마을을 무작정 철거하기 보다는 "지역의 역사와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골목 문화로 재조명 해보자"고 시를 설득했다. 오래되고 낡은 마을과 골목길 또한 소중히 보존해야할 문화재라 판단한 것이다. 사실 이런 오래된 마을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 대부분 고령인 동피랑 주민들도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정든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다행히 주민들과 시민단체, 통영시가 한마음이 됐다. 재개발 계획을 중단하고 마을을 보존하기로 합의 한 것이다. 낡은 마을을 새롭게 변신시키기 위해 낡고 갈라진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온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자 죽어가던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낡은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길이다. 전국에서 몰려온 화가와 자원봉사들의 힘으로 벽화가 완성되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람들이 벽화와 골목길, 동피랑 언덕 아래 통영 바다 풍경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단지 채색의 옷만 갈아 입혔을 뿐인데,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동피랑은 새롭게 태어났고 어느새 통영의 아이콘이 됐고 랜드마크가 돼버렸다. 누구보다 청년세대의 공감이 뜨겁다. 그들에게는 통영보다 동피랑이 더 유명하다. 더러 통영이 아니라 동피랑에 왔다가 통영을 보고 느끼고 돌아갈 정도다.
동피랑 마을에서 본 강구안 바다가 마치 수채화 같다(사진: 이상희) |
통영에 사는 이명윤 시인은 "무서운 용역 대신 눈빛 선한 화가들이 다녀간 동네/ 망치대신 붓을 들고 세월의 고단함을 철거해 버린 동네"라고 동피랑 벽화마을을 노래했다. 나는 아직 이보다 더 아름답고 절절하게 동피랑을 형상화한 글을 알지 못한다. 약간의 물감과 붓 한자루만 있으면 사람들은 이 낡은 마을에서 우주선을 띄울 수도 있고 우주선에 양이나 장미꽃을 태울 수도 있다. 또 고목나무에서 화려한 꽃이 피게 할 수도 있다. 외계 행성에 사는 어린 왕자를 불러오거나 현실에서는 결코 돌아가지 못할 유년의 뜨락으로 시간여행 할 수도 있다. 벽에 그려진 어린 왕자의 손바닥은 시커멓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수를 청했으면 저렇게 손때가 묻었을까. 천사 날개가 그려진 벽화 앞에 서면 누구나 천사가 된다. 구름 뜬 하늘 그림 앞에서는 누구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하늘 바다 벽화 앞에서는 다들 하늘 바다로 풍덩 뛰어들 수도 있다.
옛날 동피랑에서는 당산나무 밑에 돼지도 키웠다. 골목은 미로처럼 얽히고 설켰다. 비좁은 언덕에 작은 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무당집도 많았고 가난하고 고달픈 인생들이 살았다. 동피랑 아이들은 가난한 동네 사는 것이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동피랑에 산다는 사실을 숨기기도 했었다. 동피랑은 살고 싶은 마을이 아니라 하루속히 벗어나고 싶은 비천한 땅이라 여겼다. 동피랑 사람들은 통영의 푸른 바다가 아니라 늘 세병관 부근의 평지만 보고 살았다. 언젠가 저 평평한 땅으로 내려갈 수 있기를 소망한 것이다. 하지만 가난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산 동네에서 늙어갔다. 그런 빈곤과 절망의 상징이었던 동피랑이 이제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땅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동피랑 꼭대기에 자리 잡은 구판장은 통영에서 가장 전망 좋은 노천 까페다. 까페는 동피랑 사는 할머니들이 운영한다. 할머니 바리스타들은 손자, 손녀같은 어린 손님들에게 원두커피와 카푸치노, 아이스티, 레몬에이드 등의 차를 내주고 과일주스와 식혜, 수정과와 미숫가루도 판다.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구판장 앞의 동피랑 점방에서는 다양한 기념품들이 판매된다. 오랜 세월 주민들과 함께 해온 마을입구의 점방 태인 까페나 새로 생긴 벽화슈퍼나 만나 꿀빵집 등도 여행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또 동피랑 마을 이곳 저곳에 작은 까페와 가게들도 생겨났다. 낡은 집들 한가운데는 동피랑 마을 경로당 건물이 나즈막하게 새로 들어섰고 그 건물에는 갤러리가 문을 열어 다양한 전시가 이어진다. 동피랑 갤러리와 점방 등에서 나오는 수익은 주민들을 위해 쓰여진다.
숫자를 셋까지 밖에 못 세는 이상한 나라 사람들
"어린 왕자다. 스폰지 밥도 있네."
"하나, 둘, 셋"
벽화 앞에서 사진 찍는 소리다. 동피랑 언덕은 종일 하나, 둘, 셋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마치 숫자를 셋까지 밖에 못 세는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 같다. 누군가 셋 다음의 숫자를 알아내면 세계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벽화 앞에서 사람들은 그림 속 숨박꼭질 하는 소녀가 되기도 하고 어린 왕자와 악수를 하기도 한다. 달동네로 남아 있을 때는 그리도 오르기 싫었을 동쪽 벼랑. 벼랑 끝 인생들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동피랑이 이제는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하는 꿈의 언덕이 됐다. 사람들은 동피랑 언덕에 서면 벽화와 강구안 바다를 향해 일제히 셔터를 누르며 감탄한다. 외국이라면 이런 언덕에는 부자들만 살지 않던가. 최고의 전망을 가진 동네. 동피랑 주민들은 풍경만큼은 최고의 부자가 부럽지 않다.
통영은 풍경이 가장 큰 자산이다. 동피랑 언덕은 통영의 바다와 산과 사람살이의 모습을 가장 가깝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이런 언덕에는 어떤 구조물도 필요 없다. 여기는 빈공간이 많을수록 구조물이 적을수록 더 많은 사람이 오를 수 있다. 사람들은 벽화 앞에서 마냥 행복하다. 동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표현일 것이다.
"진짜 예뻐 바다가."
더 보탤 것도 없이 아름다운 풍경. 낡은 집들과 오래되고 좁은 골목, 상상력 가득한 벽화와 푸른 바다. 빌딩과 아파트 숲속에 살던 이들에게 동피랑은 이국이다. 외국의 오래된 골목을 걷는 것처럼 동피랑 골목은 이방의 향수를 자극한다.
마치 숫자를 셋까지밖에 못 세는 이상한 나라 사람들처럼 (사진: 강제윤) |
100년 동안 딱 두 번의 화장을 해보신 할머니
2년마다 새로운 벽화를 그리는 까닭에 지금은 그림이 바뀌었지만 동피랑 점방 옆 윤이상 선생의 초상이 그려졌던 집에는 동피랑의 제일 큰 어른이신 엄현업 할머니가 사신다. 작년(2011년) 봄, 마을 주민들은 동피랑 언덕에 모여서 할머니의 100세 생일상을 차려드리고 잔치를 열었다. 할머니는 이날 생애 두 번째 화장을 하셨다. 열여덟 새색시 때 화장해 보고 82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화장을 하신 것이다. 백 살 할머니는 새색시처럼 곱고 수줍었다. 할머니는 백 살을 먹었어도 천상 여자였다.
엄할머니는 팔순의 며느리 김필수 할머니가 모시고 사신다. 고부간으로 만났지만 이제는 서로 의지하며 사는 친구 같다. 어머니 같고 딸 같다.
"할마니 돌아가시기 까지는 내가 모시고 있어야제."
김필수 할머니의 남편은 진즉에 세상을 떴다. "할배는 우다시 배(저인망어선)에다 얼음 대주는 일"을 했었다. 김할머니는 자식이 없다. 아들 딸 둘을 가졌었는데 큰 딸은 열아홉에 저승으로 갔다. 어느 해 머리가 아프다더니 눈이 멀었고 그 길로 이승을 떴다. 아들은 사산했다. 김할머니 집 벽에 윤이상 선생 초상이 그려져 있을 때 저분이 누군지 아시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할배'가 누군지 모른다 하셨다.
"딱 보께 할배가 연세 많아서 돌아가싰을기고만."
할머니 집 앞 작은 언덕은 온통 돈나물 밭이다. 할머니는 돈나물을 뜯지 않고 잡초들만 뽑아준다. 돈나물은 식용으로 기르는 것이 아니다. 흙이 무너지는 것을 잡아주기 때문에 귀하게 여긴다.
지붕 없는 폐가의 벽에 그려진 벽화, 비밀의 화원(사진; 이상희) |
"부자 할매는 안죽을까 싶었는데 때 된께 가빌데"
동피랑 벽화들 중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동피랑 뒤편 천사 날개 그림 부근 지붕 없는 폐가의 벽화다. 이 집의 그림들은 어떤 여자 화가가 혼자서 그린 것이라 한다. 입구부터 온갖 꽃들이 그려진 이 집은 마치 비밀의 화원 같다. 언덕의 텃밭에 물을 주러가는 할머니가 내력을 알려준다.
"노가다 일하던 사람이 여자도 없이 아들 하나, 딸 하나 데리고 살던 집이요."
태풍 때 지붕이 날아가 버리자 사내는 애들을 데리고 이 집을 떠나버렸고 폐가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던 여자는 이 집의 내력을 알았던 것일까. 그림은 더없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정의 풍경이다. 여자는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꾸던 꿈을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동피랑 뒷길 아래 골목에 사신다. 본래 고성에 살았었는데 20년 전 여기 살던 아들이 오라 해서 정착했다. 하지만 아들은 부산으로 전근을 가버리고 지금은 할머니 혼자서 사신다. 시골에서 일하던 버릇이 있어서 그냥 놀려니 좀이 쑤씬다. 그래서 동피랑 뒤 묵혀지고 있던 비탈 밭을 개간해서 "박도 숭구고 고구마도 숭거 넝쿨도 팔고, 고추랑 배추도 숭겄다."
할머니는 동피랑에 그려진 그림들이 마음에 드실까.
"우린 그림 그려놔도 가보도 안하요. 잘 몰라요. 어짜다 테리비에 나오면 한테 모아가 나오니까 좋습디다."
지난 봄 동무하던 할머니들 몇이 연달아 세상을 뜨고 나서 할머니는 많이 쓸쓸하시다.
"같이 놀던 사람들이 병원 가버리니 적막강산이라. 요 도랑 할매들 다섯이 다 죽어 버렸어. 할매 하나는 부잔데 부자 할매가 왜 죽었는가 싶어. 할매 하나는 배급타서 살다가 배급 떨어져 어찌 살겠나 싶었는데 그 할매도 가빌고."
가난한 할머니는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죽었지만 돈도 많은 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할머니는 잘 이해가 안 간다. 돈만 있으면 병원에서 어떤 병이든지 낫게 해줄 거라고 믿고 계셨던 모양이다.
"돈 많은 할매는 안 죽을까 싶었는데 때가 된께 가빌데. 집도 좋은 거 가지고 있고 돈도 아주 많았는데."
삶은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죽음은 공평하다. 할머니는 그것을 몸으로 느끼셨다. 할머니는 무거운 물통을 두 개나 들고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자식들 김장 담가 줄 배추밭에 물을 주러 가는 길이다.
아이들이 공놀이 하며 놀수 있는 도시의 골목이 어디에 또 있을까(사진:강제윤) |
아이들이 공놀이 하며 노는 문화재적인 골목
'비밀의 화원'을 나서 골목길을 내려간다. 중앙시장 쪽 길들은 많은 여행자들이 오고가지만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주민들뿐이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 손수레나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고 가파르고 꾸불꾸불한 골목길. 이 길은 태평동과 정량동 두 동네를 가르는 경계다. 같은 마을인데 동을 달리하는 것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한 구분이다. 지금은 동문 2길로 바뀌었다. 길을 따라 주소를 표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골목 어귀에 할머니 몇 분이 앉아 두런거린다. '서양화가 이태규(1932-1982)가 살았던 집'이라는 표석이 서 있는 골목, 안쪽으로 그보다 더 작은 골목이 이어진다. 골목은 마치 실핏줄처럼 퍼져있다.
아! 그런데 정말 놀라운 광경과 마주하고 말았다. 이것은 대체 얼마나 오래된 풍경인가!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초등학생 여자 아이 둘과 유치원생 사내아이 하나, 축구공을 차고 받으며 맘껏 낄낄 거린다. 자동차의 위협 따위란 존재하지도 않는 골목. 도시의 어디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돼 주는 이처럼 안전한 골목길이 또 있을까. 이건 거의 문화재적인 풍경이다. 어디에서 이런 풍경을 또 찾을 수 있으랴. 집집마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골목. 저녁밥 짓기 위해 쌀 씻는 소리까지 들리는 골목. 골목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마음의 통로다. 오래된 사람살이의 문화가 살아있는 골목. 개발이란 이름으로 이런 골목을 없애버리는 것은 문화재를 파괴하는 범죄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통영시가 동피랑 마을을 철거해버리지 않고 보존한 것은 참으로 숭고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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