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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를 떠나라"…중동 역사상 최대의 '엑소더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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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를 떠나라"…중동 역사상 최대의 '엑소더스' 현장

[이라크 현장리포트ㆍ②] 시아파 집권 두려운 미국의 '이라크 딜레마'

다음은 지난 7일 <인디펜던트>에 실린 '병력 증파: 데이비드 콕번의 스페셜 리포트'(The surge: a special report by Patrick Cockburn)의 전문 번역 중 후반부다.

앞서 소개한 전반부("최후의 병력증파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에서 실패로 끝난 새로운 이라크 전략에 대해 부시 행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수 시점을 내년 대선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던 콕번은 이번에 소개하는 후반부에서 올 초 이라크에 2만 명의 미군이 증파된 이후에도 전반적인 치안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는데도, 미국과 이라크 당국이 통계를 조작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콕번은 이미 이라크인들 수백만명이 국외 탈출 또는 내국 난민으로 전락한 중동 사상 최대의 '엑소더스'(탈출)가 벌어지는 현장임을 고발했다.

이밖에도 콕번은 병력 증파는 전략이 아니라 잡탕 전술에 불과하며, 미국이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킨 뒤 다수파인 시아파가 이라크를 완전히 장악할 것을 우려해 이라크에서 발을 빼고 싶어도 못하는 '이라크 딜레마'에 빠진 곤혹스러운 처지라고 지적했다. <편집자>
▲ 이라크 경찰이 머리에 총상을 맞고 죽어있는 민간인 시체들을 수습하며 코를 막고 있다. ⓒ로이터

지난 2월 병력 증파가 진행됐지만, 처음부터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긍정적인 효과는 무크타다 알-사드르가 메흐디 민병대와 미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위험을 피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지휘관급 요원들을 바그다드에서 떠나게 하고, 부하들을 해산하고 그 자신도 사라졌다. 그의 행선지에 대해서 미국은 이란으로 갔다고 하고, 그의 측근들은 쿠파와 나자프 같은 성지로 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안전한 바그다드" 보여주기 위한 억지 연출

수니파는 바그다드에서 증파된 미군 병력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바그다드 동쪽 알-아드하미야 같은 지역은 봉쇄되었다. 하지만 기대한 성과에는 미치지 못했다. 아드하미야는 상업지구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절반은 다른 곳에 살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라크의 대원들이 배치된 합동검문소가 곳곳에 세워졌으나, 효과적이지 못하고 병력만 묶어두는 꼴이 되었다.

바그다드에 있는 미군과 민간 유력인사들은 병력증파가 성공적이라는 가시적 증거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바그다드에 와서 어이없는 주장을 했다며 비난했다. 매케인 의원이 바그다드의 치안이 급속도로 개선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대사관 직원들은 헬멧과 방탄복을 벗고 매케인 의원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딕 체니 부통령이 그린존을 방문했을 때도 로켓이나 박격포탄 공격을 경고하는 사이렌 장치를 꺼두어야 했다고 한다. 경보가 울리는 장면이 미국 전역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5월말, 필자는 차를 타고 바그다드 시내를 지나가는 것이 좀 편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위험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차창 안쪽으로 재킷을 걸어두고 뒷좌석에 앉아 있어 다른 운전자들이 필자를 보기 힘든 상태였는데, 군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게 되었다.

한 병사가 차 안을 들여다 보면서 필자의 신원을 물었다. 필자 일행은 운이 좋았는지 그는 필자가 외국인 저널리스트라는 말을 듣자 놀란 표정을 짓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잘 숨어 있으십시오."

숙소인 호텔로 돌아온 뒤 이라크 정부와 선이 닿아있는 이라크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린존에서 살고 있는 그 역시 필자에게 "매우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는 "무엇보다 군과 경찰을 믿지 말라"고 말했다.

며칠 뒤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라크 재무부 청사 앞에 40명의 경찰을 태운 호송 차량 19대가 도착했는데, 그들은 건물로 쳐들어가 영국인 경비원 5명을 납치해 갔다. 그들은 이후 소식이 없다. 납치범들은 메흐디 민병대 소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병력 증파로 바그다드에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데, 전략이라기보다는 늘 일종의 잡탕 전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수니파 반군, 시아파 민병대, 이라크 정부, 쿠르드, 이란과 시리아 등 게임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변함이 없다.

정말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이것을 두고 상황이 진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난 이라크 주민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이곳 적신월사에 따르면 사마라 폭격 이후 100만 명이 넘는 이라크인들이 내국난민(IDP)으로 전락했다.

이보다 더 많은 220만 명은 국외로 탈출했다. 이런 엑소더스는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이 도주하거나 추방된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중동 사상 최대의 인구 이동이다. 이라크에 진정으로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는 신호라면 이러한 난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는 때일 것이다.

병력증파는 결코 이라크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방안이 정치적으로 미국에게는 항상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이라크에게는 그렇지 않다. 속도가 다른 '워싱턴 시계'와 '바그다드 시계'가 있다는 미국 정치인들의 말은 별 의미가 없는 소리가 되었다.

이런 수사법은 이라크인들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태한 반면 미국인들은 항상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오만한 시각이 담겨있다.

하지만 정작 다른 것은 시계가 아니라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이다. 미국인들과 이라크인들은 정반대의 결과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딜레마'는 걸프전쟁에서 비롯됐다. 1991년 당시 미국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아파가 정권을 잡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시아파는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다수파이기에 공정한 선거를 한다면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아파는 미국의 입장에서 중동의 최대 적국인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정권교체는 더욱 우려할 일이었다.

1991년 쿠웨이트에서 사담 후세인 군대를 격퇴시킨 뒤 바그다드까지 밀어부치지 않은 주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 후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한 때 이라크의 18개 주 중 14개를 장악했던 이라크 시아파와 쿠르드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도록 허용했다.

2003년 이후 미국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해왔다. 미국 행정부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부시 행정부가 어쩌다보니 중동 전역에서는 다수파이지만 이라크에서는 소수파인 수니파 바티스트 정권을 전복하는 혁명적인 사건을 저질렀다.

부시 가문은 사우디 왕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조지 W.부시가 수니파 아랍권의 안보 균형을 깨버린 것이다. 미국과 영국이 사담 후세인의 몰락 이후 이라크를 철저하게 장악하려고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CIA가 이라크 정보기구 예산을 대주는 이유

그들은 이라크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를 될 수 있는 한 뒤로 늦추기도 했다. 2005년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시아-쿠르드 정부를 택했다. 하지만 미국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철저하게 통제하려 했다.

현재는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이라크의 노회한 정객으로 인정받는 아메드 찰라비는 "미국과 영국은 바트당이 무너진 공백을 채우려는 정책을 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말한다.

미국과 영국은 철수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의 아랍 동맹국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바로 시아파의 득세, 그리고 이라크에 대한 이란의 강력한 영향력이다.

지난 4년 간의 세월의 이면에는 미국이 수니파 반군을 진압하기는 원하지만 시아-쿠르드 정부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속사정이 있다. 한 손으로는 이라크라는 국가를 떠받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힘을 약화시키려고 누르는 형국이다.

이라크 정보기구의 예산은 이라크 정부가 아니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대고 있다. 이라크의 독립은 바깥 세계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한계가 있는 것이다. 미국은 시아-쿠르드가 거두는 승리를 한정하려고 하면서 이라크를 차지하려는 투쟁에 확실한 승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채 계속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어떤 전쟁에서도 이라크에서 빚어지는 희생자 규모와 폭력사태의 일상적인 수준에 대해서만큼 거짓말이 횡행한 적이 없다. 영국의 한 각료는 "군당국은 내각 기만용, 국민 기만용, 자기 기만용이라는 희생자 집계의 3종 세트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비꼬았다.
▲ 이라크 군인들이 바그다드 시내를 지나는 차량을 검문하고 있다.ⓒ로이터

이라크의 민간인 희생자 규모에 대한 미국의 태도도 비슷하다. 지난해 초당적으로 작성된 '베이커-해밀턴 보고서'에는 미 군부가 미군과 이라크군이 93회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한 2006년 6월 어느날을 조사한 결과가 담겨 있 있는데, 미국 정보기관들이 조사한 결과 실제로 공격받은 횟수가 약 1100 회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라크 정부도 폭격 현장에 기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병원이나 보건부가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민간인 희생자 규모를 감추려고 해왔다. <AP> 통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 7월 2024명의 이라크인들이 폭력사태로 사망했는데, 이는 이라크 정부가 밝힌 6월 희생자 숫자보다 23%가 증가한 것이다.

이라크 정부의 발표는 축소한 수치임이 거의 확실하다. 지난 7월 26일 바그다드의 카라다 지구에서 폭탄 한 발이 터졌을 때 이라크 텔레비전과 서구 언론들은 경찰의 말을 인용해 25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다쳤다고 보도했지만, 1주일 뒤 시청 직원들이 집계해 문 닫힌 상가에 붙여놓은 목록에는 92명이 사망하고 127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은 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미군에 의해 살해된 이라크 민간인들의 집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군 당국은 미군의 공습 후 발견된 시체들은 반군들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지 이라크 경찰은 미군의 강력한 화기에 살해된 민간인들이라고 엇갈린 주장을 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이런 사건에 대해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는 서구 언론사들의 현지 사무소 직원들이 사망자에 포함되어 있을 때 뿐이다. (번역=이승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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